제 40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15)
가시밭길이라도 걷는 것처럼 수녀의 걸음은 신중했다. 손에 촛불은커녕 칼 한 자루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자물쇠를 맨손으로 열지는 않았을 터.
때마침 수녀가 책장으로 몸을 돌렸다. 역시나 수녀복 옆 자락이 트여 있었다.
오른쪽 골반부터 무릎까지였는데,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보였다. 담장을 넘거나 누군가를 기습하기에 좋아 보였다.
맨다리는 아니었다. 하네스처럼, 가죽 띠 두 줄이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하나는 골반에 가까웠고 다른 하나는 허벅지 중간이다. 두 줄 사이로 다양한 모양의 칼과 자물쇠 따는 용도로 쓰이는 철판, 얼음 깨는 송곳 등이 보였다.
보폭을 굳이 늘이지 않는 것도 저 하네스 때문인 듯했다. 장비가 부딪쳐 소음이 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위치가 절묘했다. 팔을 자연스럽게 툭, 떨구면 손이 닿는 위치였다. 언제든지, 편안하게 재빨리 빼낼 수 있다는 뜻이다.
발걸음. 장비의 착용 상태. 자물쇠를 따는 속도. 전문가다.
‘만약에 상대한다면…’
수녀복은 펑퍼짐하니, 분명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기습의 장점과 수녀복의 불편함을 역이용한다면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쳐야 하는지는 조금 고민스러웠다.
수녀가 뭔가 찾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책장 하나하나,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있으니까.
엄청나게 느긋한 걸로 봐서는, 여기에 순찰자가 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다.
하긴 복도에서 대놓고 자물쇠를 열고 들어왔을 정도니.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곳 지리에 익숙한 내부인이라는 뜻이다.
시간대도 잘 골랐다. 경비병의 주의력도, 수사의 집중력도 떨어지는 시간 아닌가. 그리고 내부인이라 가정한다면 하필 ‘오늘’ 들어온 것도 납득이 된다.
교황이 증거를 인멸하고 있다는 점. 하스펠이 이미 죽었다는 점. 하스펠이 순결의 성기사에 대한 현장 파견을 나갔었다는 점.
세 가지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하인리히의 사무실에 모여들었던 고위 이단심문관들이다.
그렇다면 저 수녀는 그들 중 누군가의 하수인이리라.
‘하지만 무슨 정보를 찾는 걸까. 찾아서 어떻게 하려는 걸까.’
교황의 반대자라면, 자기가 빼돌리려 할 것이다. 교황의 추종자라면, 한발 앞서 인멸하려 할 것이다. 아니면 정식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교황에게 앞질러 보내버리거나.
카인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기습은 언제든 할 수 있다. 수녀가 뭔가 찾아낸다면, 그때 달려들어도 된다.
수녀가 옆 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삐그덕 소리가 들리자 멈춰 섰다. 마룻바닥을 조심스럽게 다시 밟은 다음, 몸을 굽혔다. 몸을 동그랗게 마는가 싶더니,
“…빛이 있으라.”라고 속삭였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촛불 정도 크기의 불덩어리가 일렁거렸다. 그녀 역시도 기적을 쓸 줄 아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빛이 새어 나가는 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소매로 빛을 가렸다. 더듬거리며 틈새에 칼을 쑤셔 넣고 들어 올렸다.
“흠.”
수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히 뭔가 보관했을 법한 공간인데 텅 비어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손가락을 튕겨 불을 꺼트렸다. 벌떡 일어난 수녀가 별안간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카인은 몸을 굴리다시피 하여 사각지대로 옮겨갔다.
수녀가 짤깍 짤깍 소리를 내며 책상 자물쇠를 열어젖혔다. 드르륵, 서랍 열리는 소리와 뭔가 뒤적거렸다. 원하는 것이 없었는지 금방 닫혔다.
한숨을 쉬며 그녀는 책장으로 되돌아오는가 싶더니, 또 책상으로 되돌아왔다.
의자를 끌고 몸을 낮췄다. 배낭. 일기장을 넣은 배낭이 발각된 것이다.
카인이 뱀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수녀의 뒤로 돌아선 다음 두 팔로 목을 조였다. 팔에 힘을 강하게 주자 수녀의 고개가 푹 숙였다.
느려진 맥박을 확인한 다음, 카인은 수녀를 바닥에 눕혀놓았다.
“미안합니다.”
나가야 할 시간이다. 배낭을 몸에 단단히 결박시켰다.
위쪽 발코니에 밧줄을 걸어 고정한 다음 위로 기어 올라가기를 반복하면 나갈 수 있다. 카인은 허리춤에 말아둔 밧줄을 풀었다.
- 숙여!
그림자가 고함쳤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혔다. 쌩, 하며 머리 위로 칼이 날아갔다. 어느 틈에 수녀가 일어나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목소리가 기괴했다. 나무가 말을 한다면 저런 식일 것 같았다.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아까의 그 절도 넘치는 동작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사람 같았다.
“뭐 하는 놈이기에 감히 내 딸을 건드렸느냐? 물푸레나무의 딸을 건드린 자가 고이 살아나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나무 가면 아래에서 그림자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수녀가 허벅지에서 얼음 깨는 송곳을 집어 들었다. 한 번만 제대로 찔려도 숨통을 끊을 수 있기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자들에게 안식을 베풀어 준다는 뜻에서 ‘자비’라 불리는 무기다.
수녀가 달려들어 송곳을 내리찍었다. 카인은 송곳을 곤봉으로 받아내었다. 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곤봉을 정통으로 뚫어버렸다. 곤봉을 집어 던지자, 송곳 역시 구석으로 밀려났다.
수녀의 손이 오른쪽 허벅지로 향했다. 카인은 무기를 묶어 놓은 쪽을 냅다 걷어찼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복부를 발로 밀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수녀는 왼팔로 막아내었다.
주먹으로 가면을 후려쳤다. 쩍 소리와 함께 가면이 쪼개졌다. 수녀가 얼굴을 감싸 쥐며 물러섰다. 그림자가 쏟아지듯 바닥에 훅, 떨어지더니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너!”
수녀가 자세를 잡았다. 짜증스럽게도, 아까의 그 절도 있는 자세였다. 단검 하나를 집어 들고서는 수녀복을 아랫단까지 쭉 잘라버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버려버린 곤봉을 다시 주울 수는 없었다. 카인은 슬쩍, 의자 다리를 발목으로 걸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하앗!”
수녀가 앞으로 몸을 던졌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크게 앞으로 텀블링했다. 체중과 반동 실린 발차기가 카인에게 날아들었다. 끌어당긴 의자를 밀쳤다.
헛짓이었다. 수녀는 우아하게 팔을 구부리더니 스프링처럼 펼쳐 의자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리고 다시 매서운 발차기. 카인은 벽 쪽으로 몰렸다. 수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가 싶더니 괴성과 함께 덤벼들었다.
사람 크기 거미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옆구리에 날아드는 발을 막았나 싶으면, 반대쪽 어깨로 칼이 날아들었다.
간신히 복부를 쳐 밀쳐내 보지만, 닿는 것은 딱딱한 가죽 갑옷 특유의 촉감. 수녀복 안에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듯했다.
수녀복이 방해될 거라는 건 오산이었다. 펄럭거리는 옷자락과 치맛자락이 시야를 차단했다. 정교하면서도 어이없는 정도의 길거리 막싸움에 가까웠다.
‘이대로는 밀린다.’
자세를 낮추고 주먹을 쳐올렸다. 아쉽게도 턱을 빗나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어깨로 들이받았다. 수녀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다리를 걸어 뒤로 밀어낸다.
수녀가 뒤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허리에 반동을 주어 위로 일어나려 했다.
카인은 재빠르게 수녀의 위로 올라탔다. 다리로 몸을 찍어 누르는 순간, 수녀가 오른팔을 카인의 얼굴 쪽으로 쭉 내밀었다.
철컥.
- 쳐내!
외침과 거의 동시에, 카인은 왼팔을 들어 수녀의 오른팔을 쳐냈다. 손등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번뜩였다.
손목에 부착하는 기계장치로, 스위치를 누르거나 특정한 각도로 팔을 비틀면 스프링이 탁, 하고 풀려 칼날이 튀어나오는 간단한 구조다.
내구성이 약한 게 단점으로 꼽히지만, 모르면 당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수녀가 숨을 헐떡거렸다. 온몸이 찍혀 눌린 상황이라 반항조차 여의찮은 듯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무기를 숨기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동부에서 고용한 암살자냐? 손목검을 실전에 쓰는 곳은 거의 거기뿐인데. 어떻게 알고 막은 거지?”
“해칠 생각은 없다. 정말 너를 죽이려 했다면 아까 기습했을 때 목을 쳤을 거다.”
“아. 고상하시네. 연약한 수녀 팔다리를 못 움직이게 딱 묶어놓고?”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복도 저편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더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 수녀를 설득할 시간도 달랠 시간도 없었다.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곤란해지는 건 카인이다.
카인은 오른손으로 수녀의 목을 졸랐다. 엄지손가락을 교묘하게 움직여 숨통은 틔우되, 의식은 잃는 자리를 꾹 눌렀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기절하기를 바라면서. 수녀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시 축 늘어졌다. 축 풀린 눈이 까뒤집혔다.
“…욕심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또다시, 기괴한 목소리. 억지로 목을 짜내는 듯한 소리.
수녀가 말아쥔 왼손을 바닥에 쾅, 하고 내리쳤다. 카인이 아니라 바닥을 내려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목을 졸라대었지만 아무 의미 없었다. 나무 인형의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죄는 성장하여 죽음을 낳는다. 탐욕스러운 것아. 네 열매를 가져가거라.”
수녀가 다시, 쾅 하며 주먹을 내리쳤다. 후두둑 하며 피가 흘렀다. 바닥에 기이한 글자를 그리자 피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림자가 수녀의 몸을 꾸물꾸물 기어올랐다.
- “카이로스.”
카인은 기겁했다. 자신이 내리찍고 있는 것은 수녀가 아니었다. 죽은 약혼녀였다. 벌거벗은 채로, 칼에 베인 목에서 피를 흘리며, 베아트리체 단돌로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카이로스. 보고 싶었어.”
불길이 치솟았다. 시커먼, 그을음의 불이다. 살을 그슬리기는커녕, 실 하나도 태우지 못했다. 마룻바닥에 옮겨붙지도 않았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은 베아트리체의 몸을 잡아먹으며 카인의 몸에 옮겨붙었다.
추웠다. 그러나 생기를 불태우고 숨을 끊고 심장을 얼렸다. 베아트리체가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타버려 지글거리는 핏덩어리였다.
- “카이로스. 사랑하는 카이로스…입 맞춰 줘. 어서. 사랑한다고 했잖아. 살아서나 죽어서나 함께하자고 했잖아.
그대의 심장은 나의 심장이고, 나의 심장은 그대의 심장이니, 행복하건 불행하건, 기쁘건 슬프건, 우리는 언제나 하나이리라.
약혼 서약, 잊어버렸어? 기억, 안 나? 아니면…혹시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거야?”
심장이 타들어 갔다. 손끝에서부터 얼어붙었다. 카인, 아니 카이로스는 고개를 젓는 것이 고작이었다. 베아트리체가 카이로스의 손을 훤히 드러난 가슴으로 끌어내렸다. 진흙탕에 손을 넣는 것처럼 움푹, 하며 식어버린 심장이 만져졌다.
- “왜. 뛰지 않는 심장 같은 건 질렸어?”
베아트리체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어느 틈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카이로스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고드름이 심장에 박힌 것처럼 차갑고 시렸다.
- “따뜻해. 카이로스, 나에게도 줘. 내 심장도 다시 뛰게 해 줘. 한 입만. 한 입만 나에게 줘. 그러면 난 살아날 수 있어. 어서. 어서…어서 내놔!”
베아트리체가 카이로스의 심장을 두 손으로 조였다. 카이로스가 신음을 흘렸다.
거짓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몸은 이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통 속에 카이로스는 허덕였다.
- “그대의 심장은 나의 심장! 나의 심장은 그대의 심장! 맹세했잖아! 약속했잖아! 내놔. 내놔! 억울해. 억울해! 왜 나만 지옥에서 불타야 해? 왜? 왜? 저 추운 지옥불에서 왜 나 혼자만 고통받아야 해? 왜…왜…!”
핏줄이 덩굴처럼 카이로스의 몸을 얽어매었다. 힘줄이 카이로스의 몸을 단단히 붙든다.
- “왜.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옛날처럼 내가 안아주지 않아서? 옛날처럼 사랑을 나누지 않아서? 이제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다른 여자 생긴 거지, 그렇지? 죽은 년은 상관도 없어진 거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난 너만 기다렸는데, 나는 지옥 밑바닥에서 너 오기만 기다리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카이로스는 돌아볼 수 없었다. 죽은 여자가 그의 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입술과 입술이 거의 닿을 것만 같았다.
“죄는 괴로움을 잉태하고.”
베아트리체의 얼굴에서 살점이 녹아내렸다. 싱그러운 육체가 말라비틀어졌다. 녹아가는 약혼녀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안온한 빛이 방 안으로 퍼져갔다.
“괴로움은 후회를 낳아 기르니.”
시간의 강물에 내다 버려진 것처럼, 베아트리체의 몸은 빠르게 늙어갔다. 살점은 녹아내려 먼지가 되고 뼈는 검게 썩어 문드러진다. 그런데도 심장만큼은 물기를 빼앗긴 씨앗처럼 생생하다. 피 한 방울만이라도 닿는다면 금방이라도 쿵, 쿵 하며 뛸 것만 같다.
“후회는 속죄라는 유산을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나는 법.”
이단심문관 하인리히의 손이 수녀와 카인의 몸에 얹혔다. 수녀가 발작하며 제 몸을 뒤틀었다. 검은 불이 꺼져 들었다. 카인의 몸에서 추위가 조금씩 걷혔다.
“그대. 방랑자여. 오늘은 어디에서 한숨을 돌리려는가.”
“어흐으으으….”
수녀가 기이하게 울부짖었다.
“하인리히…! 저주한다…너를 저주해…!”
하인리히의 말투가 삽시간에 변했다.
“사라져라. 악마야! 너는 여전히 산 자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산 자의 땅은 산 자의 것, 죽은 자의 땅은 죽은 자의 것이니라! 네가 속한 어둠으로 꺼져라!”
수녀의 눈이 돌아왔다. 카인은 수녀의 몸에서 비켜섰다.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일어서려 했다.
“어흑! 쿨럭, 쿨럭!…신부님…”
“쉬. 쉬. 괜찮다. 괜찮아.”
수녀가 가늘게 흐느꼈다. 여전히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하인리히의 손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와, 수녀의 상처에 물처럼 고였다. 드러누운 달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그제야, 카인은 기이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수녀의 걸음이 이상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인리히와 수녀는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코까지는 거의 똑같았다. 나이 차이도, 부녀 관계라고 하면 어울릴 정도로 보였다.
“…미안합니다.”
카인은 털썩 주저앉았다. 하인리히의 손이 빛을 뿜었다. 수녀가 축 늘어졌다. 아까처럼 악귀 같은 것이 뛰어오르지는 않았다.
“설마 오늘 밤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요원님.”
“나도 저…저 수녀가 쳐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카인은 거칠게 복면을 잡아당겼다. 하인리히가 카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안온한 빛이 차가운 냉기를 몰아내었다.
“딸이로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하인리히는 수녀의 목을 짚었다. 다행히 수녀는 기절한 듯했다.
“어떻게 수녀가 그림자 주술을 쓰는 겁니까?”
“…어머니를 닮았지요.”
카인은 멀거니 하인리히를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아이는 이단심문관과 마녀의 딸입니다. 죄 중에 낳은 자식이나, 사랑받는 아이기도 합니다.”
“하스펠은 당신은 믿을 수 있다고 했었는데.”
“하스펠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인리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로지 하스펠만이 알고 있었지요. 내 아내는…하스펠의 여동생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요원님. 시간이 별로 없군요. 저는 야간 당직을 서다가 잠깐 바람을 쐬러 올라온 겁니다. 날이 좋지 않으니, 내일 마그데부르크의 사자 동상 시계탑 앞에서 뵈도록 하죠. 오후 세 시 조금 지나서. 어떻습니까?”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하인리히가 복도 망을 봐주고, 종교재판소 옥상까지는 쉽게 올라왔지만, 죽은 이의 냉기를 담은 바람이 자꾸만 괴로운 감촉을 되살렸다.
카인은 달렸다. 어둠이 어둠을 가리고 추위가 추위를 씻어낼 거라 믿으며 달렸다. 반절은 경험에 기대어. 반절은 무의식적으로.
마침내 근위국의 위장 숙소에 몰래 들어왔을 때, 카인은 너무 지쳐 옷조차도 벗지 못했다.
릴리가 세상 편안하게 자는 것을 확인한 다음, 벽에 기대어 주저 앉아 그대로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춥고도 추운 잠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 에피소드는 내일 마무리됩니다. 너무 길었네요.
'자비'라 불린 무기는 날카로운 송곳(스틸레토 종류)를 뜻합니다.
손목검은 '리스트블레이드Wrist Blade' 라 불리는데, 게임이나 영화에 자주 나옵니다. 사실 그냥 단검 소매에 숨겨 푹찍하는 편이 더 간편하긴 합니다...
의외로 중세까지만 해도 가톨릭 신부는 결혼이 가능했습니다. 엄격한 의미의 독신제는 그 때만 해도 권장 사항이지 필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곳은 가톨릭뿐이고요.
결혼을 해도 상관 없었던 제도가 엄격히 변화된 것은 12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의 권력이 점차 세지면서, 교황 직위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쉽사리 이런 관계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신 예찬'으로 유명한 철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아버지만 해도 가톨릭 신부였고(결혼 후 아이를 낳고 신부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