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12)
릴리는 카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다음, 한참 동안 벤치에 말없이 앉아만 있던 건 그렇다 쳐도, 별안간 같은 방을 쓰자니.
평소엔 그렇게나 불편해하지 않았던가.
“저야 좋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평소엔 별로 안 내켜 하시는 것 같아서…”
카인은 뜻밖에도 환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실컷 고생만 하고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잖아. 기껏 마그데부르크까지 와서, 여전히 이런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해.”
그런 맥락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긴, 이런 도시라면 숙소 잡기도 꽤 어려울 것이다. 잠시 후, 카인은 일어섰다.
어쩐 일인지 카인은 릴리보다 반 발짝 앞서 걸었다. 그 넓은 마그데부르크는 이제 동굴보다도 좁아 보였다. 보이는 건 오로지 카인뿐이었다.
여기서 손을 놓치면, 길을 잃어버릴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맴돌았다. 주변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환하고 현란하며 시끄러워서였다.
그런데 카인은 계속 멋진 숙소를 지나치기만 했다. 돌기둥 숙소를 지나친 건 그러려니 했지만, 대리석 기둥 숙소를 지나친 건 조금 의아했다.
바로 그다음 번 숙소는 이전보다 층수가 더 높았지만, 카인은 이번에도 지나쳤다. 릴리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저 앞으로는 점점 더 비싼 숙소만 나올 것 같았다.
이윽고 카인이 걸음을 멈췄다. 릴리는 입을 살짝 벌렸다. 6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기둥 대신 머나먼 이국에서 가져온 듯한 석상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금박 옷을 입고, 눈에는 보석이 박힌 석상이었다. 붉은 것은 루비, 푸른 것은 사파이어, 노란 것은 호박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공금으로 잔다고 해도 이런 호화스러운 곳에서?
“흠. 여기가 아닌데.”
릴리는 결국 질문했다.
“어디까지 가시는 겁니까?”
“최고.”
여기가 최고가 아니라고? 지금까지 본 곳 중에서 가장 화려한데? 릴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저 앞에는 넓은 공원뿐이다. 밤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도 얼마 없다.
“저 앞으로는 쉴 곳이 없을 것 같습니다. 공원밖에 없는…”
“아. 맞다.”
카인은 릴리를 살짝 잡아끌었다. 릴리는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이 공원 모퉁이를 돌거나, 저 너머로 가면 조금 저렴한 곳이 나오는 걸까? 그렇다면 합리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카인은 공원 입구에 멈추어 섰다. 담벼락과 문이 꽤 높아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네. 휴. 잠깐만 기다려.”
그리고선 정문 옆의 작은 문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공원에서 자자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천장과 벽과 기둥은 있는 집인 줄 알았건만.
“그래도 별은 참 예쁠 것 같으니까.”
릴리는 애써 밝게 생각했다. 수도원의 끔찍했던 널빤지 침대는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그날 밤은 무척 행복했었다. 오늘도 그런 일이 분명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벽이 열렸으니까. 벽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거대한 문이었다. 너무나 크고 길어서 문인지조차 몰랐다.
이윽고 가마 두 대가 다가왔다. 덩치 좋은 사내 네 명씩 달라붙은 가마였다. 공원에 왜 가마가 있을까, 관광용인 걸까 생각했다. 그들이 릴리 앞에 가마를 내려놓고 조용히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뭐해? 타.”
“…네?”
“타고 가야 해. 멀대.”
또 네, 라고 대답할 틈이 없이 카인은 자기 가마에 올라탔다. 릴리는 황급히 옆으로 달려갔다.
“저, 저 이건 그래도 좀 부담스러운…”
“그냥 타.”
카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옆의 사내들이 엿듣는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체력 아껴. 걷다가 힘 다 뺄래?”
그리고는 신호를 보냈다. 카인의 가마가 출발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릴리는 가마에 올라탔다. 잠을 못 잔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평소의 카인답지 않았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자는 건 뭐고, 체력 아끼라는 건 또 뭘까.
‘에이. 설마.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릴리는, 살짝 설레는 마음을 가만히 접고 가마 밖 풍경을 살펴보았다.
건물들은 층수가 낮았지만 하나같이 멋있었고 독특했다. 제국 특유의 밋밋하지만 속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겉에서부터 온갖 기교를 다 부렸지만 크기 자체는 아담한 것들이 많았다.
연못. 작은 분수대. 장식들. 이단심문소에서 본 것처럼, 온갖 억양과 온갖 복장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단심문소 사람들보다는 훨씬 화사했고, 부유해 보였으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윽고 가마가 멈춰 섰다. 큼직한 건물이었다. 거의 그레이트 홀에 맞먹는 곳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고프지? 먹자.”
꼬르륵, 소리가 배에서 울렸지만, 릴리는 조금 주저했다.
“왜? 우리 요즘 먹는 것도 시원찮았잖아. 좀 부담스러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릴리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먹고는 싶은데…너무 맛있는 거 먹으면, 배가 나올까 봐서…”
아무리 그래도 배 나온 모습을 보여주기는 좀 그랬다. 굳이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좀 들었지만, 카인의 눈치 없음을 생각하면 그냥 이렇게 질러 말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카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릴리의 옆으로 쓱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너 오늘 잠 못 잘 수도 있는데. 지금 안 먹으면 후회한다?”
“네, 네에?”
“많이 피곤하겠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카인은 뭔가 심각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내가 많이 움직일 거니까, 네가 힘쓸 일은 별로 없을 거야. 그냥 느긋하게 있으면…”
“오, 오늘 왜, 왜 이렇게 적극적이십니까?”
“왜.” 카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너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니야?”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가서 먹자. 참…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아. 그리고…이거 말해도 되나 싶은데.”
어쩐 일인지 카인은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다. 릴리는 주변을 쓱 살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은 우리가 부부로 위장하고 있잖아. 그렇지?” 카인의 질문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음, 우리가 목욕을 같이 해야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거든…혹시 불편하면, 조금 다르게 말을 꾸며내도 되기는 하는데.”
너무나 놀란 나머지 릴리는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솔직했기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일단 먹자.”
* * * * *
음식은 좋았다. 좋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좋았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 많아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돼지고기볶음은 조금 기름졌지만, 매콤한 향이 어우러져서 그렇게 느끼하지는 않았다. 소고기 요리에는 갈색 소스가 가득이었는데, 고기를 굽다 흘러나온 육즙에 허브를 넣고 졸여 끼얹은 거라고 했다.
포도주 한 모금까지 마시자, 릴리는 마음 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카인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릴리는 좀 과하게 마셨을지도 모른다.
사실 릴리가 노래를 불러도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넓디넓은 홀 안은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과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극단에 마술까지 선보이는 광대도 있었다.
볼이 후끈거리고, 배가 조금 불러왔지만, 눈앞의 카인을 보자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바람에, 릴리는 다시 또 한 잔을 들어 올렸다.
“같이 마시자.”
카인도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주석 잔이 살짝 부딪쳤다.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곳을 다 오고…”
아차 싶었다. 말하고 나니 산통을 깨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카인은 느긋했다.
“말했잖아. 고생한 값은 해야지. 맨날 맥주 끓인 수프나 먹고…그리고. 네 승진 축하.”
“네?”
“너 이제 정식 요원이야. 축하해. 수습 뗀 거.”
카인은 잔을 들었고, 릴리는 맞부딪혔다. 하지만 저 말을 이해하려면 술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지나가던 종업원이 또 한 잔을 따라주었다.
“아. 저기. 포도주는 인제 그만 하면 된 것 같고, 벌꿀술로 주시겠어요?”
“그리하겠습니다.”
카인의 주문을 받은 시종이 떠나갔다. 릴리는 쿵쾅거리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저, 저 이제 정식 요원인가요? 하지만 그건 심의를 거쳐야 하잖아요…”
말투가 이상해진 것은 의식도 못 했다. 카인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나중에 버네이스 영감님 보면 내가 승진시켜 줬다고 해. 그럴 자격이 있어서 그랬다고도 하고. 내가 그렇다는데 자기들이 어쩔 거야? 사실 너한테는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카인은 주석 잔을 매만지며 잠시 뜸을 들였다.
“마냥 너를 어리고 미숙하게 보는 건 나한테나 너한테나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눈치도 빠르고, 감각도 있고. 실수는. 뭐 누구나 다 한 번씩은 하니까…요원 대 요원이니까, 같이 가는 거야.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대고 매달리는 그런 거 이제 없어. 서로 등 기대면서 일하자는 거야. 할 수 있지?”
“네.”
릴리는 냉큼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어요.”
“축하해. 릴리 요원.”
다시. 쨍, 하는 맑은소리. 시종이 다시 다가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벌꿀술이 든 도자기를, 다른 사람은 지글지글 끓는 철판 같은 것을 가져왔다. 쇠꼬챙이에 꽂힌 꼬치구이였다.
“이런 종류의 꼬치구이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아, 이거? 케밥이라고 하는 건데…”
“크흠.”
콧수염 멋들어진 시종이 눈치를 주었다.
“외람되오나 이 음식의 이름은 수블라키라 합니다.”
카인은 시종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아니. 케밥이요. 북부 사막 근처가 기원이고.”
“아뇨. 서부 황무지의 오아시스 근처가 기원입니다만.”
“하. 웃기는 소리.” 카인은 히죽거렸다. “그러면 공정하게 샤슬릭이라고 합시다. 어때요?”
콧수염 시종은 상당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알 거 다 아시는 분 같은데 왜 이러십니까?”
릴리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런 곳에서 시비가 붙다니. 그것도 음식 이름을 가지고. 하지만 카인은 이런 대화가 즐거운 모양이다.
“농담입니다. 루쿠마데스 먹어본 것도 꽤 오래되었군요. 꿀을 얹어 먹는 게 꽤 맛있었는데.”
“흥.” 콧수염 시종이 흐뭇한 듯 웃음 지었다. “아쉽게도 조리 중이라 시간이 걸리지만, 바클라와는 풍성합니다. 식사 후에 내어드릴까요?”
“장미꽃봉오리 차도 같이.”
“좋은 시간 되시기를.”
시종 둘이 떠나갔다.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다 무슨 소리입니까?”
“세상 쓸데없지만 싸움 잘 나는 이야기. 그래도 마냥 쓸데없진 않아. 먹는 거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이…꼬치 요리나 먹자고.”
릴리는 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잘 구워지고 속까지 양념이 들어간 양고기였다. 양고기 특유의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갓 잡은 듯, 신선한 고기였다.
* * * * *
디저트는 너무 달았다. 얇게 반죽해 구운 페이스트리를 설탕 시럽에 푹 담근 거라고 했다. 얇은 빵 사이사이에 시럽이 배어든 탓에, 빵이 아니라 돌돌 말린 설탕 시럽을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또 장미꽃봉오리 차와는 무척 잘 어울렸다. 향긋하고 상쾌하지만, 단맛 없이 씁쓸한 차와 단맛밖에 나지 않는 디저트라니.
“죄송해요오.”
“응? 뭐가?”
“너무 많이 마셨나봐요오.”
전혀 죄송한 표정은 아니었다. 릴리는 카인의 몸에 기댄 채로 헤실거렸다. 두 사람은 숙소 앞에 있었는데, 릴리의 흐릿한 눈으로 봐도 숙소라기 보다는 어지간한 저택 한 채였다.
“목욕하면 다 깰걸.”
“아. 목욕하기로 했지…” 다리가 슬쩍 풀렸다.
배가 좀 나오면 어떠랴. 불을 끄면 상관없지 않을까, 릴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가 좀 이상했지만. 마침 밤도 길고 길다는데.
저택의 문이 열리자 시종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시종들의 옷을 본 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몸매를 가려주는 제국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옷이 아니었다. 동부 연합 공화국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몸에 착 달라붙는 데다 허리에 붉은 띠까지 둘러 몸매를 강조하는 그런 옷이었다.
거기에 천은 어찌나 얇은지, 북부와 서부에서 자주 쓴다는 아마포를 떠올리게 했다. 속살의 실루엣이 슬쩍 보일 정도였으니까.
“뜨거운 물과 욕조를 준비했습니다. 가장 오른쪽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가운은 바로 옆 방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시종들은 두 사람을 침대가 있는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침대방 옆에 드레스룸이 따로 있고, 그 옆에 욕조가 있는 목욕탕이 있는 모양이다.
“저…”
카인의 옆에 딱 붙어서, 릴리가 소곤거렸다. 입을 열 때마다 술기운이 훅, 하고 나오는 것 같아 적잖이 민망했기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카인은 따라오는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른 시종들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이제 아무도 없어.”
“이거 비밀인데요오..” “응.”
“제가. 등에…흉터가 좀…있어요.”
카인은 조금 놀라는 듯했다. 역시, 그날 밤 수도원에서, 옷을 갈아입던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것이구나, 릴리는 생각했다. 조금 더 과감해도 괜찮은 밤이었는데.
뭐. 어때. 오늘 밤이 왔는데. 릴리는 애써 용기를 내었다.
“놀라시면…안 돼요. 알았죠?”
“그래. 알았어. 그리고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많이 놀라실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어차피 옷 입고 들어가잖아. 가운 색깔 진해서 살 안 보일걸?”
갑자기 왜 술 깨는 소리를 하는 건지, 릴리는 알 수가 없었다. 카인은 조금 많이 당황한 듯했다.
“…아. 어…미안. 내가 말을 안 해줬지. 여기 남부잖아. 그래서 남부식으로 목욕하거든. 큰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는, 가운 입은 채로 들어가서 몸의 피로를 푸는 식이야. 옷을…벗거나 하진 않아.”
“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릴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거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라지자, 릴리는 좀 더 과감해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카인에게 좀 더 가까이 붙고, 가슴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감싸 안은 다음.
“그런데, 저 정말 오늘…밤에 안 재우실 거예요?”
“미안.” 카인은 정말로 미안한 듯했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드디어 책에서나 봤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어떤 느낌일까. 릴리는 설렜다.
카인이 그녀의 허리 뒤로 팔을 두르고, 다른 팔로는 상체를 살짝 끌어당겼을 때. 닿은 가슴과 가슴이 살짝 눌렸을 때는, 등을 따라 흐르는 찌릿한 쾌감과, 눌린 가슴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 카인이 먼저 속삭였다.
“많이 피곤하겠지만, 오늘 밤 깨어 있어 줘야 해. 적어도 내가 종교재판소 갔다 올 정도까지만.”
“뭐라고요.”
릴리가 카인을 확 밀어냈다. 찌릿한 쾌감이 머리를 쾅쾅 두드리는 두통이 되었다.
카인은 왜 릴리가 눈을 부릅뜨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이렇게 술에 고기에 과자에 차까지 먹여놨는데 잠을 자지 말라고 하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정말로 미안해졌다.
“그래도 너무 긴장할 건 없어. 여기 사실은 근위국이 운영하는 시설이거든. 방금 그 웃기지도 않은 대화는 신원 확인용 암호고. 너 여기서 쉬고 있는 동안, 내가 재판소에 잠입해서 정보를 좀 빼 올 거야. 그러니까…릴리?”
릴리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주저앉았다. 부끄러움이 확 치솟았다. 조금 많이 괘씸해져서 벌떡 일어난 다음 카인의 팔을 찰싹 아프게 때렸다.
“야!”
“진짜 미워! 진짜!”
그리고 몸을 홱 돌려 나가버렸다. 카인은 아픈 팔을 움켜잡았다.
“…취했나? 아무리 취해도 그렇지…아, 이거 멍든 건 아니겠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수블라키(그리스 식 꼬치고기요리) 케밥(터키 식 꼬치고기요리) 샤슬릭(타타르 식 꼬치고기요리)
바클라와(얇은 페이스트리를 겹겹이 쌓아 구워 시럽에 재운 디저트)
비잔티움, 그러니까 동로마 쪽은 목욕을 잘 했고, 의외로 서유럽도 목욕을 아주 안한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만 14세기 흑사병이 퍼지면서 목욕 문화가 퇴출되다시피했는데, 목욕이 흑사병을 퍼트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중세에는 이동의 자유가 별로 없었던데다, 굳이 여행할 일도 크게 없었기에 숙박시설이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답니다.
대신 순례객을 위해 수도원에서 숙박을 지원하기도 했고, 그 외에는 평범한 마을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적 있지만 본 작품은 어디까지나 선택적 고증을 중시합니다.
근육 마초 남캐만 수두룩하게 나오는 중세라던가 길인지 하수도인지 구별이 안 가서 왕이 탄 수레가 더러운 물에 빠져 개망신을 당하는...뭐 그런 것까지 고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녁에 한 편이 더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