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31화 (32/47)

제 31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6)

랜슬롯 어셔 백작은 성실하고 신실했으며 영지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이른 나이에 일찍 죽게 된 이유다.

어셔 백작령의 유일한 수입원은 은광이다. 말이 좋아 광산이지, 광맥이 다 말라붙은 지금은 폐광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어셔 백작은 다른 인부들과 광맥 탐사에 나섰다가 그만 사고를 당했다.

큰 폭발음이 들리더니 입구부터 무너져내린 것이다.

움푹 들어간 땅. 백작부인과 영지민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사람을 잡아먹은 땅은 고집스럽게도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물집 터진 손을 내팽개치며 울부짖었다.

백작부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붕대 감은 손을 힘겹게 움직여 베개와 옷, 침대에서 남편의 머리카락을 모아 유품으로 삼았다. 한 줌도 되지 않았지만, 남편이 남긴 건 그것뿐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백작위는 랜슬롯의 동생인 로드릭 어셔가 이어받았다. 랜슬롯과 부인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동생이 대신 받은 것이다.

형제의 우애는 돈독했기에, 형이 죽은 후에도 로드릭은 형수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좋고 믿음 좋은 로드릭도 흙으로 빵을 빚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영지의 빚은 감당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가족과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영지민들은 이틀에 한 끼 먹기도 버거워했다.

그러자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돈은 많지만,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무시 받고 살았던 이들이었다.

어셔 백작령은 매력적인 매물이었는데, 가치라고는 없는 땅이었기에 가격을 후려치기도 쉬웠고, 성도 영지민도 봉토도 있기에 백작 행세하기에도 충분해서였다.

이들은 은밀히, 혹은 대놓고 로드릭 어셔에게 백작령을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 백작 작위까지도 돈 주고 사겠다는 것이었다.

백작부인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 온 여인이었다. 귀족 자리를 스스로 내어놓는 것도 아니고 돈 받고 판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드릭은 형수를 설득했다. 우리 가족만 생각하면 문제가 없지만, 가장을 잃은 영지민들에게 뭐라도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형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백작부인은 그 말에 무너져내렸다.

한참을 슬피 운 후에 백작부인은 로드릭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한 다음 혼절해버렸다. 로드릭은 이복형제인 애드거 어셔와 함께 영지민을 설득했다. 애드거는, 비록 아버지의 사생아였지만 성격 좋고 재미있는 교구 신부로 유명했다.

협상 끝에 로드릭 어셔는 좋은 거래를 끌어냈다. 어셔 백작령에 대해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바로 이웃한 봉토의 귀족들이 기겁할 만한 금액이었다.

“세상에 돈이 썩어 나도 그렇지, 자갈밭을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산다고?”

귀족들은 정보를 알아 오라며 하인들을 풀었고, 그들은 훈훈한 미담을 들고 돌아왔다.

매매 금액의 상당 부분은 가족을 잃은 영지민에게 골고루 돌아갔는데, 풍족하지는 못해도 평생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라고 했다.

거기에 백작 부인은 마을 근처 외딴집을 받았으며, 하녀까지 두고 돈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낼 만큼의 몫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로드릭 어셔가 본인의 몫을 상당 부분 형수와 영지민들에게 나눠준 덕분이었다.

대신 로드릭은 작은 상회 하나를 꾸릴 만한 자본금만 가졌는데, 제국 남부로 가서 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실제 사업 문제를 가지고 새 영주와 이런저런 상담도 자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영지의 새 주인이 된 ‘백작’은 예상외로 검소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고려하여 줄이지는 않았지만, 불필요한 사치와 낭비를 줄여 나갔다.

식비를 아끼고, 무의미한 음료 구매도 줄였고,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품은 팔아 영지의 앞날을 책임져 줄 가축 구매비로 사용했다. 손님 접대용이 아니면 사냥조차도 거의 하지 않았다.

비웃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땅을 사느라 돈을 다 써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비웃었지만, 영지민들은 내심 백작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호감을 돈 주고 샀다고는 해도, 그들에게는 당장 절실한 돈이었으니까.

여기까지 들으면 흔한 몰락 귀족의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영지에 파리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시골 영지는 지저분하고, 영지민들은 그 지저분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들조차 ‘너무 과하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파리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거기에다가 파리들이 집안의 창문이나 문지방에만 들러붙어 있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 된다.

백작 부인의 오두막은 더 심했는데, 집 외곽 벽에 파리가 잔뜩 달라붙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안에서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땅에서 불이 치솟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번 붙은 불은 꺼지지도 않았다. 물을 뿌려도, 모래를 집어넣어도 잠시뿐. 불은 자꾸만 치솟았다.

새들과 짐승들이 미쳐 날뛰며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고, 영지민들은 불면증을 호소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괴물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백작의 저주야.’ 사람들은 소곤거렸다.

‘죽은 랜슬롯 어셔와 마을 사람들이 저 갱도에서 기어 나오려고 대지를 긁고 있는 거야. 원한이 깊으니 그렇겠지. 그들의 살점이 썩어 있을 테니 파리가 얼마나 많겠어.’

괴상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자 의혹은 확신으로 변했다.

썩어가는 오물과 퇴비를 합친 것보다도 더 강한 냄새였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 만큼 지독했고 옷과 이불에조차 들어찼기에 아무리 빨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황 냄새야. 악마가 올라올 때 나는 냄새래.’

기이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오두막 주변의 도깨비불에 대해 소곤거렸고, 불타 죽은 고양이와 개의 사체에 관해 이야기했다. 백작부인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도 사람들은 의심스러웠다.

‘피부가 더 하얗게 됐어.’

‘밤마다 누구를 만난다는데. 신음도 막 질러댄대. 오두막 밖으로 다 들릴 만큼.’

‘한창나이긴 하지. 스물다섯인데.’

‘만나는 게 사람은 맞을까?’

의심은 비난으로 변모했다.

‘영지가 이 지경이 되어가는데 바깥으로 안 나오는 것 좀 봐. 저래도 되는 거야?’

‘저 파리, 지긋지긋해. 오두막이 저렇게 들러붙어 있는데 대체 뭘 하는 거야? 안이 멀쩡한가? 아니지. 혹시 오두막 안에서 밖으로 기어 나오는 거 아냐?’

‘안에서 촛불 켜놓고 뭘 하는 거지? 하녀들은 또 어디를 갔고?’

거기에 은밀한 지식이 섞여 들어갔다.

‘벨제붑이라는 악마가 있대. 구린내를 풍기고 가는 곳마다 병충해가 일어나는데, 자기 신도와 만날 때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으로 교접하는데. 으으…더럽고 추잡해.’

‘밤마다 운다면서.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앙앙거리며 울어대겠어?’

‘세상에…이젠 옷도 잘 안 입는 모양이야. 봤어? 눈 흘기는 거? 음탕해. 음탕하다고. 더 예뻐졌네. 남편 잡아먹고, 마을 사람들 잡아먹고, 밤마다 악마와 즐기고. 재밌게 사네.’

그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사냥개, 횃불, 농기구를 들고 오두막집으로 쳐들어갔다. 새 영주의 부하들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들 역시도 오두막집의 마녀를 곁눈질했다.

“눈 풀린 것 봐, 대체 얼마나 해댔으면! 이 파리, 이 파리 새끼들! 다 네년이 낳은 거지! 다 네년이 까지른 거지! 더러운 년, 저주받을 년, 음탕하기 그지없는 짐승 같은 것아! 사람이 아니라 알을 낳는 망조의 탕녀야! 천벌이 네 머리 위에 내릴 것이다!”

“그만! 제발 그만들 하세요!”

로드릭 어셔와 애드거 신부가 달려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차마 전 영주의 동생과 인심 좋은 신부까지 건드리지는 못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새 영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 그렇다면. 이단심문관을 부릅시다.”

라고 제안했다. 정말로 악마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옳소, 하는 외침이 커졌지만, 새 영주는 본인이 고발자가 되는 건 부담스러운 듯했다. 주저하던 로드릭이 마음을 굳혔다.

“고발은 저와 제 동생이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악의적으로 고발하는 것보다는, 형수님의 무죄를 밝히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까요.”

“잘 부탁합니다.”

사안의 위중함과 심각함, 민심의 동요는 도저히 지방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곳 마그데부르크의 종교재판소에서 다루게 된 것이라고 했다.

서기가 낭독을 그치자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덕분에 카인은 뒷좌석을 힐끔 바라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것이 분명한 노인이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는데, 카인과 릴리가 앉은 좌석에 발을 대고 있던 탓에 진동이 그대로 전해진 탓이다.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발을 떼었지만, 미세하게 탁, '탁' 치는 소리가 거슬렸다.

재판석의 중심부에 자리하는 이는 노인이었는데, 나이가 많은 탓인지 눈꺼풀이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었다. 돌출된 눈썹은 고집스러워 보였고, 툭 튀어나온 손가락 관절은 매의 발톱 같았다.

“우선, 먼 곳에서 본 법정에 오신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곳은 상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잘잘못을 가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예언자께서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분별의 축복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신이시여, 이 미련한 판관 말라키아를 축복하소서. 미욱한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닫힌 귀를 열어 주시며, 젊은이의 맑은 정신과 늙은이의 지혜를 담게 하여 주소서.”

잠시 기도문을 읊은 다음, 판관 말라키아가 물었다.

“원고. 서기의 낭독에서 그릇되거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대답은 피고석에서 나왔다.

“거짓말이야…”

피고석에 앉은 백작 부인이 흐느꼈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당장 호통이 떨어졌다.

“묻지 않았소이다! 한 번만 더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다면, 사특한 것에 ‘들린’ 것으로 간주하고 구금할 것이니, 이 점 똑똑히 기억하시오! 만약에 그 안에 마귀가 깃들어 있거든, 당장 이곳에서 떠날 것을 명하노라!”

법정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카인은 어깨를 찔끔거렸고 뒷자리 노인은 발 떠는 걸 잠시 멈췄다. 릴리도 움찔한 것으로 보아 꽤 놀란 듯했다.

“원고. 대답하시오.”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안에서 더해야 할 것이나 보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 말씀하시오. 만일 판관들의 결심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안에 대해 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점 역시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라오.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보충해야 할 것이 있소?”

두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본 법정이 파악하기로, 원고의 고발 내용은 이렇소이다. 고인이 된 랜슬롯 어셔 백작의 아내, 소피 어셔를 다음 혐의로 고발한다. 첫 번째, 불결의 악마, 파리의 대왕, 마왕의 수하 벨제붑과 교접하여 영지에 무수한 파리 새끼를 퍼트린 혐의…”

경비병이 백작 부인을 붙들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물어뜯고 있었다. 눈자위가 뒤집어지고 허리가 자꾸만 꺾였다. 하지만 판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자기 몸을 기꺼이 향락의 도구로 제공함은 물론, 고인이 된 남편 랜슬롯 어셔와 영지민 42인의 목숨을 바쳐 젊음과 아름다움을 되찾았으며 더욱 빼어난 미모를 얻게 된 것.

세 번째. 자신의 귀족 지위와 백작령이 팔아넘겨진 것에 앙심을 품고 꺼지지 않는 불과 악취를 피운 행위.

이 부분이 조금 불명확한데, 불과 악취를 풍긴 것이 악마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는 건지, 아니면 이미 악마를 ‘불러들였고’ 그 흔적으로 불과 악취가 남았다는 것인지?

원고. 어느 쪽이오?”

“악마를 불러들이기 위한 행위입니다.” 로드릭 어셔가 답했다.

“악마를 불러들인 이후의 흔적입니다.” 에드거 어셔 신부가 답했다.

두 이복형제는 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에드거 신부가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악마를 불러들이기 위한 행위로 사료됩니다.”

“에드거 어셔 신부. 쌍두독수리의 두 머리에 걸고 고발의 내용이 진실함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피고석에서 백작 부인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머리를 절었고, 눈은 자꾸만 까뒤집혔으며, 입가에는 흰 거품이 일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물어뜯은 팔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래도 백작 부인은 계속해서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판관 말라키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경비병에게 이르렀다.

“조사관을 불러 주시오.”

경비병이 법정 뒤편의 문을 열었다. 적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깎은 장년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였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한데다 두툼하고 갈라진 턱에서는 고집이 느껴졌다. 적잖이 보이는 새치와 숨길 수 없는 얼굴의 주름이 그런 완고함을 더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강바닥의 바위 같아서, 부드러운 모래 사이로 잡고기는 숨겨주지만 입 큰 포식자는 매정하게 쫒아내곤 한다. 붉은 로브 자락 아래의 상당한 덩치와 올곧은 자세는 그가 한 때 군인이었음을 알려주었다.

나이만큼이나 경력도 꽤 많은 사람인지, 휘장 역시 여러 개를 달고 있었다. 그 휘장 중에는 붉은 리본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것도 있었다. 하스펠 신부가 유품처럼 남겨준, 마왕에 맞서 일어선 십자군이었다는 뜻이다.

장년의 신부가 판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카인은 말라키아의 눈에서 깊은 신뢰를 보았다.

“고위 이단심문관 하인리히 신부. 어셔 백작령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였었지요?”

“그랬습니다.”

“악의 존재 혹은 그 영향력에 대하여 확인하였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이 일에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까?”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좌중이 웅성거렸다. 카인의 뒤에 앉은 노인이 다시 다리를 격렬하게 떨었다. 카인은 굉장히 성가셨지만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이 법정에 악의 영향을 받은 이가 있습니까?”

하인리히 신부는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네. 바로 제 눈앞에 있습니다.”

부인의 입에서 사람의 소리도 아니고 짐승의 소리도 아닌, 말 그대로 악귀의 시잇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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