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3)
“누구냐.”
카인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누구기는 누구야. 여기 사는 사람들이지.”
나무 뒤에서, 이번엔 여자 다섯이 걸어 나왔다. 통통한 몸매의 아낙부터, 나이 지긋한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그녀들 모두 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버섯이니 베리니 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 사람들, 어디까지 들은 거지?’
난감한 일이었다. 카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잘 관리된 숲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칼까지 멋진 거 차고 있네. 등짐도 두툼하고. 행상이요?”
통통한 아낙이 가까이 다가왔다. 앞치마의 흙냄새와 바구니의 버섯 냄새가 훅 풍겨왔다.
“저. 그게…”
“흑…”
별안간, 릴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아낙들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일제히 릴리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아가. 무슨 일이냐.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릴리는 뭐라 대답했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할머니에게도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라고 하는 거야. 좀 크게 말해 봐. 어이구, 아가가 많이 놀란 모양이네.”
릴리는 다시, 비교적 또박또박, 하지만 울음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우리 남편이요…”
카인의 귀에 이명이 들렸다. 모기 천 마리가 앵앵거려도 이것보단 덜 시끄러울 것 같았다.
지금은 비밀 임무 중이니, 보안국 요원임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할 수도 없다. 오트란토 수도원은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봉쇄수도원이니 방문객도 행상인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릴리는 자신과 카인은 부부이며,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행상인이라는 가짜 신분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훌륭한 임기응변이다. 지침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부부라니.
“저보고 멍청하대요…길도 하나 제대로 못 찾는다고 막 욕해요…자기도 잘못 들었으면서…자기도 길을 모르면서…나만 바보래요…”
아낙들의 눈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통통한 여인네가 당장 카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이. 진짜야?”
“어…그게…어…”
릴리가 흐흑, 하며 쭈그려 앉았다.
“너 같은 거 버리고 가버릴 거래요…”
“어이. 왜 말을 못 해?”
할머니까지 카인에게 눈을 부릅뜨며 다가왔다. 카인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꾼들은 도끼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세상 불쌍한 놈이라는 듯 카인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놈의 자식아. 이 썩을 놈의 자식아, 저 이쁜 아기 뭐가 밉다고 울리냐, 애를!”
“아! 아 따거, 아!”
정말로 아팠다. 부모님에게 맞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사실 카인 정도 자식들 하나둘은 있을 나이의 아낙들이기도 하다. 거기에 농사일과 채집으로 단련된 근육에다 ‘예쁜 새댁’을 울린 비열한에 대한 분노까지 더해지니.
“어이. 가만 들어 보니 자네가 백번 잘못했네. 잘못했다고 하소.”
수염 지저분한 나무꾼이 점잖게 훈수를 두었다. 카인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사슬 갑옷을 벗은 게 후회스러웠다.
“어이구, 아가. 아가. 울지 말어. 울지 말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야.”
“제가 진짜 싫은가봐요…저 어떻게 해요?”
릴리는 으아앙, 하며 울어 젖혔고, 아낙들은 주저앉은 릴리의 머리와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꼭 안아주기까지 했다.
“아가. 다른 놈하고 살 섞고 산다는 게 다 그런 것이다. 좋은 날보다 눈물 나는 날이 더 많고, 눈물 나는 날보다 화내는 날이 더 많어. 그래도 다, 시간 지나고, 세월 지나고 하면, 그것들 다 작고 알록달록한 구슬이 되는 법이여 돌이켜 보면, 왜 화를 냈더라. 왜 좋았더라…하는 건 다 잊어버려.”
“정말요?”
“그럼. 그냥 화내고, 슬프고, 웃었고…딱 그것만 남어. 하루만 지나 봐라. 어제 왜 화냈더라, 기억도 안 날 거다. 별거 아녀. 다 별거 아니다. 지나고 나면 다 흐르는 거야. 붙잡고 싶은 것만 붙잡고, 나머지는 그냥 다 보내줘 버려. 뭐, 인생 얼마나 거창하게 사냐. 그냥 작게나마 웃고, 울고, 그런 게 다 뿌리처럼 넝쿨넝쿨 엮어져서 사는 거지. 별거 없어, 야.”
“그래도 아기가 제 서방을 많이 좋아하는구먼.”
“무슨 소리여. 서방도 야 좋아하던데. 아까 못 봤냐? 슬금슬금 눈치 살살 보면서 미안해하더구먼.”
“…정말요?”
“어이구, 몸만 덜컥 컸지 완전히 애기네. 애기여.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팔다리도 늘씬늘씬해서 좋구만. 어이고. 이런 큰 걸 두 개나 달고 다니네…어이고야. 여기는 뭐…아이고, 세상에. 이야…저놈의 자식이 복에 겨워서 그냥 이런 얘기를 그냥…”
릴리와 카인이 다시 마주 보고 선 건 한참 후였다. 릴리는 다시 눈이 퉁퉁 부었지만 헤실거리며 웃었고, 카인은 된통 얻어맞은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옆에서 아낙들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라는 듯 쳐다보고 있으니 더 그랬다.
“거. 가만히 들어 보니까 너도 잘한 거 하나도 없는 놈이 성질까지 냈더구먼. 사과혀.”
자기도 길 어딘지 몰랐던 주제에 아내 탓이나 했던 남편이 되어버린 카인은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여보’는 배고파서 먹어버렸냐? 사과 제대로 안 해?”
카인은 제발 좀 도와달라는 뜻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도와주었다.
“맞아. 제대로 사과해. 잘못했어, 안 했어?”
‘너 이따 진짜 좀 보자.’ 생각하면서도 카인은 꾹꾹 화를 억눌렀다.
“미안해.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래도 본심이 아니었던 거, 알지?”
릴리는 천연덕스러웠다. 모르는 척하며 시선을 쓱 피했다.
“잘 모르겠어. 나 사랑하는 건 맞아?”
“…사랑하지.”
“그러면 전에 하고 싶다고 했던 거 해 줘. 약속해. 이 자리에서. 하겠다고.”
대련. 카인은 금방 떠올렸다. 안나의 마차에서. 대련을 한 번도 같이 안 해줘서 섭섭했다는 말. 워낙 특이한 말이어서 기억하기도 쉬웠다.
“…알았어. 하자. 또, 다른 건?”
제발 그만하다는 뜻이었고 릴리도 알아들었다. 그래서 릴리는 그만하기로 했다.
“사랑한다는 말 안 했잖아. 해 줘.”
카인은 고향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생각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로 사과나무를 심으러 갈 거라고. 심을 사과나무가 없다면 벌레라도 잡겠노라고.
“사랑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릴리가 입을 맞추어왔다. 사과나무 같은 건 완전히 날아갔다. 업무다. 이건 업무다. 부부로 위장한 요원들끼리의 업무다. 카인은 여러 번 중얼거렸다. 아낙들이 눈물을 흘리고 나무꾼들마저 눈시울을 붉히는 와중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 * * * *
정의는 실현되었고, 아낙과 남편들은 만족했다. 마리푸르트로 간다는 말에 선뜻 건초 운송 수레까지 내주었으니 말이다.
“마리푸르트에는 우리 마을 출신들도 좀 산다우. 마구간 딸린 여관 운영하는 데 평판이 아주 좋아. 마침 건초가 부족하다기에 물량 대주러 가야 했는데, 타쇼! 애기가 어찌나 놀랐는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네.”
카인이 한두 대 정도 맞은 걸 빼면 별문제도 없었다. 떠나기 전, 아낙들은 릴리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진짜 그게 된다고요?”
“일단 오늘 밤에 해 보라니까. 꼼짝 못 할걸. 아주 그냥 뿌리를 뽑아버려.”
아낙들은 얼굴이 빨개진 릴리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잘 살어라! 애 능력 닿는 대로 잔뜩 낳고 재밌게 살어!”
동네일 없는 사람들이 나와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카인은 지쳤다. 그냥 푹 잠이나 자고 싶었다. 숲의 그늘진 곳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니 고개까지 돌리고 싶었다.
끔찍하게 죽었던, 사랑했던 사람의 그림자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 숨쉬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자다.
쿡.
“아야.”
릴리가 카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퉁퉁 부은 눈을 크게 뜰 수 없었지만, 그래도 흘겨보는 건 꽤 무섭다.
“대답 안 하실 겁니까?”
카인은 ‘무슨 질문’이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대련? 내 발 물집 가라앉고 네 눈 부은 거 가라앉으면 하자.”
“혹시 겁나십니까?”
“겁은 무슨. 너 또 울리기 싫어서 그러지. 또 오해 사긴 싫어.”
“저한테 화 안 내셨으면 되었을 일 아닙니까.”
“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
말이 좀 강했나, 싶었는데. 릴리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입술을 찌푸린 걸 보면 말이다.
“…삐지셨습니까? 설마?”
“중상모략이야.”
“삐지신 거 맞군요.”
카인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골 아낙네에게 얻어맞은 어깨와 팔이 아직도 아팠다.
“…우리 다음에는 그냥 사촌이라고 하자. 부부는 정말 아닌 것 같아.”
“전 부부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싫어.”
“저는 좋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전 사촌이라고 할 겁니다. 누님.”
카인은 짚 더미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면 저는, 사촌이지만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라고 할게요. 여보.”
사레에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나는 네가 안 다쳤으면 좋겠어.”
기침이 가라앉자, 카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침이고 뭐고를 떠나서. 몸이든 마음이든, 안 다쳤으면 좋겠어. 보안국일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다치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일은 좀…좀 더 심해.
어떤 때는, 사람을 일부러 속여야 하기도 하고. 또, 이용해야 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 다치면, 너무 힘들어지거든.
그러다 보면 힘든 것도 지쳐서 그냥 닳아버려. 그러니까 보다. 그런 거였구나.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그냥…다 놔버려. 슬픈 일도 없지만, 재미있는 일도 없어지는…뭐. 그러더라.”
답은 없다. 잠이 든 모양이다. 카인은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잠에 깊이 빠져들기 전, 카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카인은 그 검은 기사에게서,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렇다면, 릴리도 비슷한 걸 보았을까?
의문에 대한 답은 닷새 후, 마그데부르크에서 들을 수 있었다.
* * * * *
마그데부르크는 거대한 도시다.
단순히 크기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제국이 성립하기 전에는 한 국가의 수도였고, 지금은 제국 제2의 수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마그데부르크는 쌍두독수리의 성지다. 남부 왕국에 자리를 잡은 교황이 제국에 올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교황과의 사이가 극악을 달렸던 시절엔 이곳에 황제가 뽑은 대립 교황이 들어선 적도 있었다.
쌍두독수리의 성지라는 건, 전 세계의 쌍두독수리 교단 신자들이 모여든다는 의미기도 하다. 성지순례 목적으로 혹은 종교적 영감 때문에, 사람이 많이 다니니까 물건 유통도 잘 될 거라는 장사치들의 기대 때문에.
그래서 마그데부르크는 언제나 활발하다.
그런 마그데부르크에도 인상적인 장소는 단연 ‘검의 경애 공원’이라 할 만하다. 검의 경애란, 검으로 보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찬사라는 의미다. 검으로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건, 곧 그에게 자신의 칼을 내어준다는 뜻.
그래서 마왕을 무찌른 일곱 용사의 석상 앞에는 5차 십자군의 검이 잔뜩 박혀 있다. 제국 표준 검뿐만 아니라 동부에서 자주 쓴다는 레이피어에 지팡이, 북부와 서부 이교도들의 휘어진 곡도와 시미터 등, 각양각색의 칼로 가득하다.
마왕을 무찌른 곳은 동북부의 황무지고, 따라서 검의 경애도 본래 그곳에 있었지만, 교황은 굳이 마그데부르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북부 황무지는 땅 주인이 불확실하지만, 마그데부르크는 분명하니까. 물론 검의 경애 공원 자체는 제국이 다스리지만, 그것을 활용한 무궁무진한 관광 계획은 교황의 주도하에 세워졌다.
그러다 보니, 이단심문소 본원이 마그데부르크에 세워진 건 당연한 일이다. 각지의 교단 소식을 가장 쉽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카인과 릴리는 이단심문소 정문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