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27화 (28/47)

제 27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2)

대답 대신 카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짐작하기 위해서였다. 태양이 기울어진 정도를 보니 오후 3시 정도 되는 듯했다.

제국의 다른 도시처럼 마리푸르트에도 외곽 성벽이 있다. 그리고 외곽 성벽은, 계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에 닫힌다.

그러니 네 시간 안에는 도착해야 여유 있게 도시 안에 들어갈 수 있을 터. 문제는 카인과 릴리가 얻어 탄 수레를, 늙은 짐말이 터덜터덜 끌고 있다는 점이다.

짐말은 늙었지만 지혜로웠고, 느긋하지만 부지런하다. 마부석에 앉은 주인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침을 흘리며 자고 있어도, 제가 알아서 가야 할 길을 알아서 잘 가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이 짐말과 주인은 이 도로를 지나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카인은 혼자 생각했다.

그랬기에, 카인은 굳이 주인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짚 더미에 몸을 기댄 채, 햇살을 담뿍 받으며 느긋하게 흙길을 지나는 것도 나쁜 여행은 아니었으니까. 정 뭣하면, 마리푸르트의 보안국 지부에라도 연락하면 그만이다.

그나마 이런 거라도 얻어탄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행운.

* * * * *

네 시간 전.

릴리는 울음을 그쳤지만, 대신 몸을 덜덜 떨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카인은 릴리의 사슬 갑옷을 벗겨 주고 그나마 깔끔한 망토 하나를 몸에 둘러 주었다.

“잠깐 쉬어.”

“어, 어디 가십니까?”

“멀리 안 가. 살아 있는 사람 있나 둘러보려고 그래. 이 친구도…적당한 곳에 묻어 주고.”

릴리는 자기도 거들겠다는 듯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졌기에 일어나지 못했다. 카인은 릴리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짚어준 다음, 폐허가 된 수도원 안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는 불티가 날렸다. 시커먼 연기에, 간헐적으로 탁, 하며 뜨거운 돌벽이 터지는 소리도 났다.

부러진 가구. 불탄 옷가지. 찌그러진 갑옷과 투구. 망가진 문. 전형적인 폐허다. 그런데, 시체가 없었다. 사람 시체도 동물 사체도 없다. 시신은 오로지, 검집의 기사에게 빙의 당했던 가련한 견습 기사 한 구뿐이다.

카인은, 그 끔찍한 생물을 떠올렸다. 그걸 생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시체를 한 데 반죽해 뭉쳐 놓은 것만 같던 그것은, 분명 북동쪽으로 날아갔다. 마왕의 황무지 쪽이다.

폐허를 둘러보며 카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제국에는 당연히 보고해야 한다.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알아낸 것, 수집한 정보들을 안나에게 알려야 한다.

문제는 교단이다. 교단 안의 복잡한 정치적 셈법은 둘째치라도, 순결의 성기사이자 대주교마저 저렇게 타락했다면. 대체 교단 안의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무너진 수도원 건물, 쓰러진 자비기사단 군용 천막, 박살 난 마차들. 하지만 시신이라고는 제국검에 목이 뚫린 자비기사단 견습 기사뿐이며, 흔적이라고는 이단심문관 하스펠의 휘장뿐이다.

교단 관련 사람들은 전부 실종되었는데, 제국 보안국 사람 둘만 살아 돌아와서 나쁜 소식을 전한다면, 교단은 과연 이걸 얼마나 좋게 바라볼 것인가.

보안국 과장 선에서 결정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다. 안나가 카인의 판단을 존중하고 지지한다고는 했지만, 섣부른 무모한 판단까지 대신 맡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고심 끝에, 카인은 결정을 내렸다. 자신과 릴리는 예정대로 마그데부르크의 이단심문관 하인리히를 찾아가되, 안나의 지침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교단에는 알리지 않기로.

가장 가까운 제국 직할 도시이자, 카인과 릴리의 마차를 보관하고 있는 마리푸르트에서 보고서를 작성해 보내고, 안나의 답장은 마그데부르크에서 받는 것으로 하면 시간 낭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퇴직은 더 미뤄야겠네.”

공허한 폐허를 바라보며 카인은 중얼거렸다. 깊은숨을 몰아쉰 다음, 다시 움직였다. 자신과 릴리가 목격한 것을 뒷받침해 줄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차. 무너져버린 도서관. 천막.

대부분 불타고 무너졌지만 그래도 건질 만한 것은 있었다.

자비기사단 마르코 사령관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찾았고, 하스펠 신부의 마차에서는 ‘마녀사냥을 위한 교본’ 절반을 건졌다. 맨 앞장에 하스펠의 친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의 직인이 찍힌, 양피지 두루마리도 있었다. 약간 누렇게 변했지만, 수도원 상징이 찍힌 밀봉이 중요하지,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많은 것을 가져가고 싶었다. 사람이 사라졌어도 기록은 남았고, 더 많은 기록을 가져갈수록 더 많은 부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 있었다. 여기에 그 증거가 있다. 이것만 남기고, 그들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노니, 신의 자비가 함께하기를.’

* * * * *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는 매장 묘지뿐만 아니라 납골당과 시신 안치소도 있었다. 지반이 온통 바위라, 땅에 매장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카인과 릴리는 빈 석관에 수습 기사의 시신을 넣었다. 관뚜껑을 닫으며 그의 평안을 기도했다. 릴리는 울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몸을 떨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나아 보였다.

하늘은 맑고. 폐허는 고요하다. 바람은 없는데, 서글픔은 과하다. 카인은 자비기사단 막사에서 물주머니 두 개와 비스킷, 말린 고기가 든 작은 식량 주머니를 챙겼다. 릴리에게 절반을 나누어 주었다.

“타고 갈 말이 없어. 걸어가야겠다. 가방이 좀 무겁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짊어지고 갈 수 있습니다.”

제국검은 허리에 찼지만, 카인도 사슬 갑옷은 벗어 던졌다. 짐가방에 갈무리한 다음 두 사람은 바위산을 걸어 내려왔다. 당장 꺼지라는 듯 산에서 바람이 웅, 웅하며 울었다.

계속 걸었다. 조금이나마 먹고, 약간이나마 마셨지만,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비스킷과 고기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물은 미지근했다.

바위산 아래는 그나마 나았다.

나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진 숲이 있었는데, 가지가 잘 다듬어진 걸 보니 마을 주민들이 잘 관리하는 듯했다. 오트란토 수도원에 올라오며 지나쳤던, 별로 대단한 것은 없었던 숲이다.

새들은 벌써 바위산 위의 소란에 대해 떠드는 듯했다. 다람쥐들이 나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트렸다. 길가에 핀 이름 없는 꽃들은, 그런 풍문은 모르겠고 내 얼굴과 몸매나 보라는 듯 하늘거렸다.

- 카이로스. 사랑해.

카인은 걸음을 멈췄다. 스산한 목소리였다. 그 기괴한 용에게 딸려간 그림자의 음성과 똑같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릴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카인은 몸을 돌렸다.

“아냐. 별거…너 왜 그래?”

릴리의 얼굴, 어깨, 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없던 생채기다. 릴리가 손을 뒤로 감추는 것을 보니 더 의문스러웠다.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너 숨긴 거 뭐야. 꺼내.”

“정말 별것…”

“나 화낼 거야.”

릴리가 내민 건 거친 천 조각이었다. 올이 굵어서 걸레로도 쓰기 어려워 보이는, 심지어 시커먼 것이 묻어 더럽기까지 했다.

“…혀 때문에…” 릴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 혀 덩굴의 감촉이 소름 끼쳐서…지워지지를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

카인은 릴리의 손에서 거적을 빼앗았다. 물주머니 뚜껑을 열어 적시고 손으로 비벼가며 간단하게나마 빨았다.

그리고 릴리의 얼굴과 목, 어깨를 조금씩 닦아주었다. 대고 문지르면 생채기가 날 테니까, 살짝 두드리듯이. 미처 다 짜지 못한 천에서 물이 흘러 셔츠를 젹셨지만 릴리는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내려가서 제대로 씻자. 이런 거 혼자 삭이지 마. 마음에 병나면 아무도 책임 안 져줘. 보안국 요원이라면 더더욱.”

“죄송합니다. 자꾸 이런 못난 모습을…”

“무슨 소리야.” 카인은 릴리의 목덜미를 살짝 닦아주었다.

“너 잘했어. 내가 아는 수습 중에서는 네가 최고야. 보안국 역사를 다 뒤져 봐도 최고일걸? 내 목숨을 구해준 수습 요원은 너밖에 없었다고. 목숨 빚진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말하고 나니 뭔가 어색해져서, 카인은 얼굴을 붉혔다.

“큼, 그나저나 좀 놀랍네. 난 너 세상 무서워하는 거 없을 줄 알았는데.”

“아까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래. 정말 기괴하고 이상했어.”

“아니요. 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릴리가 카인의 손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가볍게 잡은 것이었는데도 카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이 아니라, 눈으로 붙들렸기에.

“정말 죽을 생각이셨습니까?”

“죽고 싶었던 건 아니야.” 카인은 애써 변명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만…이거 이길 수 있으려나. 싶었던 건 사실이었어. 그래서 최대한 이것저것 많이 끄집어내려 했지. 그래야 네가…”

“제 생각은 하나도 안 하시는군요.”

릴리의 말투는 어쩐지 쌀쌀맞았다. 카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죽을 자리에 뛰어드는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 말입니다. 저는 그걸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습니다. 검격. 방어. 공방. 제가 하나라도 놓치면. 하나라도 잘못 생각하면. 상대법을 너무 늦게 알아낸다면, 내 눈앞에서…소중한 사람이 죽어버리는데…제가 짊어져야 할 부담 같은 건 하나도 생각 안 하신 거죠?”

- 카이로스. 도망쳐. 네가 잘하는 거잖아?

그림자가 카인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카인은 손을 내렸다. 릴리의 말은 가만 놔둘 수 없었다. 위험한 말이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냥 두고 도망쳐? 그 시커먼 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데. 최소한 무기가 뭔지, 기술이 뭔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는 봐야 할 것 아냐.”

“저도 보안국 지침 정도는 압니다!”

릴리가 화를 내었다. 카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두둑, 천에서 물이 쏟아졌다.

“지침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잖습니까! 옳습니다. 말씀하신 거 다 옳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는데! 저도 맞는 거 아는데!”

“아는 데 뭐!”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끔찍하게 죽어가는지 봐야 했던 내 마음 같은 건 상관없었냐고요!”

릴리가 화를 내었다.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말투까지도, 어린아이 떼쓰는 것 같은 말투다. 정작, 릴리 본인은 자기가 이랬다는 걸 기억조차 못 한다. 지금까지 보면 항상 그랬다.

“난 싫어요! 싫다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죽겠다고 가버리는데! 내 의견 같은 건 한 마디도 안 묻고 가버렸는데! 왜 항상 자기 마음대로예요? 왜 항상 자기 멋대로예요? 최소한! 최소한, 내 의견 정도는 물어봐 줄 수 있었잖아요!”

릴리는 지금 선을 넘어오려 하고 있다. 카인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외면했던, 릴리 본인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있던 그 선을. 일단 넘어오면. 넘어가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저쪽에서 긋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라도 그어야 했다.

“너는 내…!”

하지만 답을 하지 못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인은 뒤쪽으로 몸을 돌렸고, 릴리 역시 그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칼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여차하면, 뽑을 기세였다.

나무 뒤에서 도끼를 든 남자 셋이 걸어 나왔다. 덩치들이 다들 좋았다.

“재미있구먼. 왜 말을 하다 말어. 한창 흥미진진한데.”

어깨에 도끼를 얹은 남자가 히죽거렸다. 수염이 굉장히 지저분하고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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