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完)
카인의 검이 큼직한 궤적을 그렸다. 아래에서 대각선 위쪽으로 올려 치는 각도다. 검집의 기사는 단순히 검을 꼿꼿하게 세우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쉽게 막아낼 터다.
정말로 기사는 그 자세를 취했다. 카인이 바라마지 않았던 그 자세다.
오른쪽 손목을 교묘하게 비틀어 역수로 쥐었다. 품에 파고들어 단검으로 찌르는 암살자처럼, 카인은 검집의 기사의 몸에 부딪혔다.
느려터진 기사는, 검집으로 돌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검집의 안으로 파고들면, 검집의 공격도 방어도 피할 수 있다.
그대로 카인은 칼을 그어 올렸다. 그림자가 쪼개지며 피가 튀었다. 시커멓게 죽어가는 사람의 피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다.
“이런.”
기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인의 배에 꽂혔다. 간신히 왼팔로 막아 방향을 틀어내기는 했지만, 사슬 갑옷이 조금이나마 충격을 막아 주기는 했지만, 속이 뒤틀리는 건 매한가지다.
카인의 세상이 뒤집혔다. 볼썽사납게, 카인은 한참 뒤로 굴러갔다. 꽝 하며 바닥에 처박힌 뒤통수가 아파져 왔다.
검집의 기사가 다가왔다. 죽은 피를 철철 흘리며 그것이 다가왔다. 카인은 웃고 싶었다. 무너져내리는 수도원. 그림자 말뚝에 박힌 채 검은 화염에 타들어 가는 시체들. 그리고 이제, 검집으로 두들겨 맞을 자신. 매정하게 푸르른 하늘. 그리고 정점까지 솟아오른 검집.
카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피하려 했다. 몸을 굴리고, 칼을 내찌르면…그러나 제국검은 멀리 떨어져 있다. 오른손은 비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집은 카인에게 닿지 않았다. 깡,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멈췄다. 검집이, 다른 검집에 막혔다.
“야. 너 내가…뭐라고 했어…”
릴리가 팔을 휘둘렀다. 카가각, 소리를 내며 검집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릴리는 그대로, 검은 기사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렇게 강한 타격이 아니었는데도, 기사는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알았습니다.”
릴리가 중얼거렸다.
“…뭐?”
“파훼법. 알았습니다. 제가 막습니다. 막을 테니 치십시오. 그러면 이깁니다. 저 혼자서는 안 되지만, 둘이라면 가능합니다.”
릴리가 제국검을 뽑았다. 카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회복하실 때까지, 시간을 끌겠습니다.”
검집의 기사가 몸을 추스르며, 검집을 치켜올렸다.
“…너. 너는…안다. 너는…해치고 싶지 않다…물러서라.”
“당신은 누구입니까.”
릴리가 검을 똑바로 세워, 칼끝을 눈높이에 맞췄다. 검집의 기사는 한참 후에야 답했다.
“나는…기사다.”
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사는 명예를 지키고, 약자를 지키고, 맹세를 지키며, 자기 마음을 굳건한 성으로 지키는 이.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하여도 마음이 꺾였다면 기사가 아닙니다. 기사 서임을 받지 않은 시종이라 하여도 올곧은 마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기사입니다. 그러니 묻습니다. 그대는 정녕 기사입니까?”
“나는 기사다!”
“지금의 모습이 ‘정녕’ 그대가 바라마지 않았던 기사의 모습입니까?”
검집의 기사가 흠칫했다. 릴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칼끝마저도.
“나는 나를 핍박하던 이들을 핍박했다. 나를 억압하던 이들을 억압하였다. 나를 때린 이들을 때렸고 모질게 대한 이들에게 모질게 대하였다. 그들이 나에게 행한 대로 갚았을 뿐이다! 나는 그저 복수하였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뭘 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기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는 너는 무엇이냐!”
목 졸린 까마귀가 꺽꺽거리는 것 같았다. 기사가 검집을 들어 올렸다. 시커먼 불길이 주변에서 쉿, 쉿 소리를 내며 뱀처럼 치솟았다.
“너는, 내 앞에서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너는! 너도 저 자처럼 불의한 자더냐? 너도 저 자처럼 신의 없는 자더냐? 너도, 저 자처럼!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냐!”
릴리가 검을 들었다. 검집의 기사가 주춤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릴리는, 그저 크로스 가드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을 뿐이다.
“나는 검을 베는 검…”
느릿하고도 단호한 선고.
“나는 방패를 막는 방패이자 창을 찌르는 창. 화살을 맞히는 화살이자 성채를 무너뜨리는 성채.
쌍두독수리의 기수이자, 백혈기사단의 발퀴리아이며, 스캴드메르skjaldm. 백혈의 기사 릴리아나 브륀힐드다.
하얀 피가 다시 땅에 흐를 때까지, 기사로 살다 기사로 죽을 것을 다시금 맹세하리니.
대적자여. 묻노라. 그대가 오늘 내 숨을 거두어 갈 자인가?"
답은 없다. 기사가 다시 물었다.
“묻노라. 그대가 정녕 나를 거슬러 검을 세우려는가?”
답은 없다. 기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묻노라. 그대가 정녕 나를 이기리라 믿는가?"
답은 없다. 릴리아나가 검신에 입을 맞추었다. 크로스 가드를 눈 높이까지 들어 올린 다음, 오른쪽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에 잘려나간 햇살이 단말마처럼 섬광을 흩뿌린다.
"그리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를 꺾겠노라."
기사 릴리아나가 숨을 멈추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카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다. 릴리는, 아니. 요원이 아닌 기사 릴리아나는, 그저 검 끝을 눈 높이에 들어 올린 채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평범한 방어 자세다.
고요했다. 그저 고요했다. 그런데도 검집의 기사는 멈칫거렸다. 너무나 크고 거대한 나무 앞에 선 나무꾼이, 제 빈약한 팔과 무딘 도끼를 의심하듯이.
기사가 머뭇거리자, 릴리아나가 검을 내밀었다. 왼손으로는 단단히 손잡이 아랫부분을 감싸 쥐지만, 오른손은 마치 칼 손잡이와 악수라도 하는 듯 느슨히 잡는다. 검 끝을 검은 기사의 명치에 겨눈 채로.
교본에 나오는 전형적인 장거리 방어 자세다. 백혈기사단의 발퀴리아는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최소한 열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었는데도, 암흑에 휩싸인 기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주변을 쉿쉿거리던 그림자들이 사나운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런데도 릴리는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았다. 그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암흑의 기사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림자 안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기사단원들의 잘린 손목이, 물어뜯긴 팔이, 몸에 박힌 창이 솟아 나와 릴리아나의 몸을 찌른다.
릴리아나는 창을 피하지 않았다. 되려 창날에 검을 대었다. 카가각, 하며 밀어낸 기세 그대로 장대를 베어낸다. 나무 장대에 거스름이 일어나더니, 창이 힘을 잃고 나가떨어진다.
그대로 손목을 눕힌다. 위로 솟아오른 검이 떨어지기 전, 그림자의 손등을 칼로 베어버린다. 손이 쪼개지며, 검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그대로 밀고 나간 검을 우뚝, 멈춰 세운다. 오른 다리를 크게 앞으로 뻗으며 찌른다. 검은 기사의 손등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죽 긋고, 다시 다리를 끌어당겨 검을 바로 세운다.
기사가 검집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조금 비스듬한 세로베기. 릴리아나는 때를 기다렸다. 기사가 검을 쳐들 때를. 정점에 다다를 때를. 카인과 검격을 나누던 모습 하나, 하나를 되새겼다.
속도. 감각. 동작. 습관.
검집이 떨어질 때, 릴리아나의 검은 이미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떨어지는 검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찌르기에는 찌르기로, 베기에는 베기로,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대처하는 것이 백혈기사단의 가르침이다.
천 옷이었다면, 아마 검은 기사의 팔 반절 정도, 손목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베었으리라.
그러나 기사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역겨운 것으로 만들어진 갑옷이었지만, 그래도 검날을 막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 뿐. 일격을 허용한 기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자세가 열리자 무수한 빈틈이 드러났다.
숨을 참고 참고 견디다, 마지막 돌덩이 하나가 뚝 떨어지면, 태산조차도 와르르 무너지듯이, 릴리아나는 압박을 공세로 바꾸어 쏟아부었다.
검은 빈틈을 뚫고 갑옷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내리찍고 베어 넘기고 썰어버린다. 내리 떨어지는 검집이, 제국검 끄트머리에 가로막혔다.
제국검이 살짝 휘어졌던가? 비슷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휘어진 것이 아니라, 릴리아나가 일부러 검을 휘었다. 검의 수명을 줄이는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녀는 검의 분노를 안다.
억지로 굽혀진 검이, 모욕을 당한 검이, 얼마만큼 빠르게 제 몸을 도로 펴는지를.
릴리아나는 검을 달래지 않았다.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목을 살짝 비틀어 분노가 뻗어나가야 할 바를 가리켰다. 거센 전환에 검 자신의 반동까지 더해진 검이, 기사의 어깻죽지를 찢어발겼다.
기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지금입니다!”
릴리아나가 검을 휘둘러 검집을 쳐내었다.
완전히 비어버린 앞면. 카인은 제국검을 내뻗었다. 갑옷 사이, 한껏 젖혀진 목으로, 릴리가 만들어 준 틈으로.
돌이킬 수 없고, 물릴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필연이다.
- 카이로스.
그리고 그림자가 떠오르는 것 역시 필연이다.
어둠에 사로잡힌 기사의 투구가 제멋대로 벗겨졌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꿀렁거리는 그림자였는데도, 카인은 그림자에 떠오른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한 그림자가 속삭였다. 검이 목을 파고드는 짧은 순간에.
- 나를 정말 또 죽이는 거야? 네 약혼녀인, 나를? 그날처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이 목을 파고들었다. 마지막 망설임이 아니었다면, 이미 목은 떨어져 저 뒤로 굴렀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의 망설임 때문에, 목은 얕게 베였다. 또 다시.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또 다시.
- 배신자…겁쟁이…도망쳐. 너에겐 그게 어울리니까.
“아아아아아!”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인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억지로, 잠긴 문을 밀어젖히듯이, 끝까지 밀어 넣었다.
검이 기사의 목을 관통했다.
도저히 그 칼을 뽑을 수가 없어서, 카인은 칼을 놓쳐버렸다.
기사가 멈칫, 멈칫하며 뒤로 걸어가더니 기우뚱, 하며 뒤로 넘어졌다.
울컥. 우극. 뚫려버린 목에서는 유의미한 말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나오는 것은 거무스름한 피였다.
- 내 사랑. 지옥에서 보자.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무너져버린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서 살덩어리들이 몸을 일으켰다. 제 마음대로 엉겨 붙은 그것은 거대한 짐승이 되었다.
말의 등뼈로 만들어진 날개와 창자로 만들어진 피막을 펼치고, 타들어 가다 만 사람의 얼굴을 비늘 대신 붙인 악룡이 날개를 펼쳤다. 바르톨로메오 수사와 하스펠 신부의 얼굴도 거기에 있었다.
마치 그것이 하수구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림자들이 악룡에게로 모여들었다. 자비기사단원들의 불타버린 몸, 반절은 타고 반절은 피를 흘리는 말의 몸뚱이, 여전히 병장기를 쥐고 있는 손과 도끼에 박힌 머리 같은 것들이 몰려들었다.
그 끄트머리에, 검집을 든 검은 기사가 있었다.
- 너를 기다리마.
"남의 몸에...기생이나 하는 새끼가..."
카인은 침을 뱉었다. '진짜' 검집의 기사가 말없이 카인과 릴리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려 악룡의 등에 올라타더니, 이내 지나가는 악몽처럼 지평선 저편으로 날았다.
“쿨럭. 쿨럭.”
견습 기사가 눈물을 흘렸다. 훌륭한 성기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이가, 그러나 한순간의 격정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에게, 빛은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두 손 가득 미약한 빛이 맴돌았다. 견습 기사는 그것을 목에 대었다.
검은 여전히 꽂힌 채였지만 상처는 겨우 아물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생의 마지막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는,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공은 풀려 있었고, 서서히 굳어가고 있다. 그는 이미 살 수 없는 몸이었다.
“…기사…셨군요…”
“네.”
기사 릴리아나가 무릎을 꿇었다. 적수였던 이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었다. 견습 기사의 눈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저도 되고, 싶었어요. 기사. 그러면…”
끅. 끅. 하며 바람이 새어 나왔다. 얼굴에는 벌써 해골이 드러났다. 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가며 핏줄이 드러났다. 릴리는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면…?”
“…그나마 덜…맞을 테니까.”
흐흡. 하며 수습 기사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가라앉았다. 휘유. 하는 휘파람 소리였다. 이제야 제 쉴 곳을 찾았다는 듯. 릴리가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고생했다.”
카인이 허망한 눈으로 날아가는 짐승을 바라보았다. 릴리가 허물어졌다. 바닥에 웅크린 몸에서 숨죽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고생...고생하셨습니다..."
“그래…끝났다. 이제 끝났어. 고생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다.”
카인은 허우적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어느것도 끝나지 않았다. 해결된 것도 없다. 그와 릴리가 상대한 것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했다. 검집을 들고 칼춤을 추는 미치광이.
그러나 그 마구잡이 같은 말에, 릴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집어삼키는 울음이 아니라 터트리고 내보내고 흘려보내는 그런, 안도의 울음이었다. 쌓이고 쌓인 긴장을, 누르고 누른 공포를, 흘리고 버리고 비우는.
풀 한 포기 피워내지 않는 성질 더러운 바위산마저도 묵인할 만큼,
릴리는 카인을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다 지쳐 잠들었다.
죽은 이의 목에 꽂힌 제국검이 반짝거렸다. 지긋지긋한 빛이 눈을 찔렀다. 그러나 카인은 눈을 부릅떴다. 감을 수가 없었다. 지평선을 노려보며 릴리의 등을 토닥거렸다.
오래전, 베네루치아의 한여름 밤에, 약혼녀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