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22화 (23/47)

제 22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9)

카인은 눈을 비볐다. 릴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그녀 역시 눈이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들을 축복합시다.”

하스펠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었으되 살았고 살았으되 죽은 신에게 청합니다. 이들의 누명을 빛으로 녹여 주소서. 이들이 당한 고통을 빛으로 보상하여 주소서. 이들이 당한 서러움을 빛으로 고발하여 주시고, 이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빛으로 환히 밝혀 주소서.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작은 빛줄기들이 유리 천장에서 쏟아졌다. 하스펠 신부와 수사들, 시종들이 환자들의 머리와 이마에 붙은 재를 털어 주었다.

쿨룩.

기침 소리가 들렸다. 경건하게 미사에 집중하던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눈살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콜록. 콜록. 쿨럭!

환자들이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50여명의 환자 모두가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단순히 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으으흐으으으아.”

“아아하아혀어어어.”

말을 했다. 어설프고, 듣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분명히 말을 했다.

“어어여어어어.”

탄성이. 환희가. 기쁨이 떠올랐다. 환자의 곁에 선 이들은 보았다. 침상에 누운 이들이, 살아 팔딱거리는 붉은 금붕어라도 입에 문 것처럼, 시뻘건 혀가 기뻐 춤을 추는 것을.

“기적이오…”

“어여어어어어어어!”

자비로운 신은 역시 괴로움을 가만히 보아 넘기지 않으셨다.

환자들에게는 여전히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랬기에 선하고 선한 시종들과 수사들은, 환자들이 쇠사슬까지 찰랑거리는 것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아아아아야아아아아아.”

철그럭, 쿵. 쇠사슬들이 하나하나 풀어졌다.

“기적이오! 기적이 일어났소! 신께서 이들의 혀를 다시 살려주셨소, 축복이 이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셨소!”

“아이야아아아아아아!”

세상 물정 모르는 수사들이 신나 떠들었다. 이단심문관의 시종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기사단원들이 기적을 더 가까이에 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빛은 점점 더, 점점 더 밝아졌다. 이제 그것은 모든 이의 눈을 아플 정도로 찔러대었다.

바깥에서 자비기사단의 수습 기사들과 시종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웃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셋뿐이었다. 카인. 릴리. 고위 이단심문관 하스펠 신부.

카인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보려 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꺼림칙했다. 지금 일어나는 상황이, 분석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카인은 하스펠의 당황을 알아보았다. 이단심문관이, 세상 권태로워 보였던 이단심문관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카인은 비로소 깨달았다. 뭐가 그리도 이상했는지.

“릴리.”

“네.”

“그림자가 없어.”

카인과 릴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단 한 점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다.

그림자가 없었다. 빛은 바닥에서부터, 벽으로부터, 천장에서 사정없이 내리쬐였다. 뚜렷한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오로지

쩍 벌어진 환자들의 입 안뿐이었다.

카인이 릴리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손등에 재빨리 기호를 그려 넣었다.

‘물러나서, 때를 기다린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깥의 사람들마저 안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그렇기에 카인과 릴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려 앞으로 밀려 나가고 있는 판국이다.

“일어나셨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한 가운데로 향했다.

빛의 천장 아래, 순결의 성기사이자, 대주교인 윌리엄이 일어선 것이다.

팔과 다리는 여전히 뭉개졌고, 몸은 뒤틀렸으며, 꺾인 고개는 제대로 들기조차 버거워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멀쩡한 것처럼’ 침상을 밟고 섰다. 그가 찢어진 입을 벌리자, 날름거리는 붉은 혀가 또렷하게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은커녕 숨조차 쉬기 힘든 각도로 목이 비틀린 대주교의 입에서, 혀가 날름거렸다.

“…원수의 풍요로움을 보아 넘기지 마옵소서.”

화살에 맞은 독수리가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환호를 지르던 이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그들은 헛된 것을 발판으로 삼았으니, 모든 것이 갈 길을 가게 될 때 스스로 무너지리다. 자녀는 고아가 되어 구걸하게 하옵시고 어느 대지도 그들을 하루 이상 품어주지 않으리다.”

대주교는 턱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숨 쉬며 팔딱거리는 것은 오로지 혀뿐이었다.

“새는 남에게 이자 뜯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살점으로 배를 채울 것이며, 종이와 잉크와 펜으로 죄를 지은 자는, 그 후손이 그자의 인명을 종이와 잉크와 펜으로 지워버리리다.

보십시오, 원수의 아이를. 두 발이 단단히 붙들린 채 바위에 매쳐지는 아이를. 원수가 우리 자식에게 그리하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당할 것입니다.”

“…나가.”

하스펠이 눈을 번득였다.

“나가! 당장 여기서 나가! 여기를 비워! 여기를 비워야 한다고!”

그러나 하스펠의 외침은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침상에 누운 이들, 아까까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이들의 입에서, 혀가 불쑥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

“남을 저주하기를 못 갈아입듯 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살과 피처럼 자리 잡을 것이고, 악담하는 자의 혀는 저 스스로 말라비틀어져 주인의 목을 틀어막으리니!

양분을 주지 않아 나무를 굶겨 죽인 대지의 위로 죽은 가지가 박히리다!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제 손을 하늘에 비비적거리며 탄원하리다!

제 몸을 바치오니 거역스러운 땅을 태워주십사 청하리다!”

혀들이 합창했다. 환자들의 목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혀 자신이. 시뻘겋고 퉁퉁 부어올라 자줏빛으로 썩어들어가는, 누군가 깨물어버려 칠흑을 뚝, 뚝 흘리는 저 혀가 말을 하고 있었다.

“혀로 죄를 지은 자! 혀를 자를지어다! 그것을 가지고 지옥에 가느니 혀 없는 채로 구원받는 것이 행복하리다!

팔로 죄를 지은 자! 팔을 자를지어다! 그것을 가지고 지옥에 가느니 팔 없는 채로 구원받는 것이 행복하리다!

음부로 죄를 지은 자! 음부를 자를지어다! 그것을 가지고 지옥에 가느니 음부 없는 채로 구원받는 것이 행복하리다!”

“혀가…!”

바르톨로메오 원장 수사의 비명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혀가 돋아났소이다! 검은 혀가! 사람들의 안에서!”

혀가 자라났다. 싹이 돋아난 양파처럼 그것은 제 주인의 몸을 조금씩 빨아먹고 위로, 위로 자라났다.

“나가!”

이단심문관이 절규했다.

"광신이다! 광신자의 뒤틀린 기도야! 어서 벗어나라! 어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깥의 기사단 수습 기사들과 시종들이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지만,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혀는 이제 덩굴보다도 대나무보다도 사춘기의 음욕보다도 빠르게 자라났다. 끝 모를 것 없이 치솟은 검은 혀들이, 줄기가 되어버린 혀들이 가지를 뻗어냈다.

“우으읍!”

고위 이단심문관의 온몸이 혀의 줄기에 묶였다. 무수한 검은 혀들이 이단심문관의 얼굴과 팔과 몸을 핥아대었다.

하스펠 신부가 몸부림을 쳤지만, 혀들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벽으로, 벽으로 잡아끌었다.

담쟁이덩굴처럼 자라난 혀가, 벽을 만나 기어올랐다. 덩굴의 끝에 열매가 맺혔다. 희생자들. 환자들의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 사람의 혀. 피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외쳤다.

“도망쳐!”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제발! 제발 도망쳐! 광신자야, 광신자가 왔어! 광신자가 모두를 태워버릴 거야!”

그러나 혀와 머리를 잃은 육체들은 그러지 못했다.

죽지도 썩지도 못한, 걸어 다니지도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뼈와 살덩어리들이, 환자용 침상에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구더기처럼 그것들은 바닥을 기어 다녔다.

육신 하나가 시종의 발에 닿았다. 으으, 으아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시종을 집어삼켰다. 커다란 목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가 무의미하게 허공을 휘젓더니, 부르르 제 몸을 떨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모든 육신이. 50여구의 육신이 전부 그랬다.

수사들과 시종들을 잡아먹은 채. 그것들은 억지로 그들의 가랑이를 벌렸다. 개미가 주둥이를 벌려 고기를 뜯듯이. 축배를 든 다음 고기 한 점씩 다들 집어 먹듯이.

순결의 성기사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축복을…받으시오.”

육신들이 달려들었다.

“기사단! 발검! 악을 격멸한다!”

마르코 사령관이 외쳤다. 자비기사단원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빛이여!”

성기사들이 외쳤다. 그들의 손에, 그들의 검에, 찬란한 빛이 물결쳤다. 순식간에 성기사와 기사들이 둥근 방어진을 갖추었다.

그러나, 순결의 성기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빛이여?”

세상 누구보다도 순결한 용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기사들의 빛이 새로 태어난 별의 찬란함이라면, 윌리엄 대주교의 빛은 죽어가는 별의 단말마였다.

이제 막 태어난 순결한 것은, 누릴 것을 다 누렸는데도 아득바득 더 가져가겠다며 날뛰는 빛에 잡아먹혔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섬뜩한 빛줄기였다. 어두운 밤의 칼날. 들짐승의 안광. 그리하여 빛의 용사가. 마왕을 거꾸러뜨린 7인의 용사 가운데 한 명이 선언했다.

“모두 죽여라. 모두를 끌어안아라. 모두를 너희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라. 신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알아보시는 법이리라.”

성기사들의 빛이, 제 주인을 불살랐다. 기사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그 안의 성스러운 열정이, 순결한 신앙이, 악을 격멸하고 약자를 보호하리라 맹세했던 그것이, 자비기사단 성기사들의 몸을 찢고 터져 나왔다.

이내 그것들은 기둥이 되었다. 성스러운 불의 기둥이다. 불의 기둥은 노여워하며 바닥과 천장을 달구었다. 탁, 탁하며 과열된 돌이 갈라지고 깨지는 불길한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렸다.

“알드릭 성주! 부하들과 함께 문을 뚫어! 본대는 헤르부르크 성의 기사들을 보호한다!”

성격 나쁜 붉은 머리기사가 문에 달라붙었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성당 안의 집기를 공성 추처럼 써 문을 두드렸다. 바깥에서도 시종과 견습 기사들이 용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에 붙은 시커먼 혀들이, 혀의 줄기가, 조롱하고 조소하듯 문과 벽을 붙들었다.

심지어 그것들은 쓱, 혀를 내밀어 기사들과 시종들의 얼굴을 핥아대었다. 창부를 희롱하듯이 그 혀들도 그리하였다.

마르코 기사단장과 함께 온 본대는 다가오는 살덩어리들을 베어내고 잘라내고 쓰러트렸다. 하지만 헛일이었다. 쓰러진 살점들은, 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저 스스로 엉겨 붙었다. 잘려 나간 살점은 도로 붙고, 흘린 피는 뱀이 굴을 찾듯 제 몸뚱이로 돌아갔다.

“이게…이게 대체…!”

릴리는 검을 빼 들었다. 자비기사단원들과 함께 살덩어리를 베어 넘기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혐오스러운 것을 몰아내야 한다는, 몸에 익힌 기사의 행동이었다. 그녀의 이성이 마비된 것은, 이런 혼란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이어서였다.

그러나 카인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릴리. 칼 넣어. 우리는 고위 이단심문관을 구하러 간다.”

무의식적으로 릴리는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릴리와 카인의 눈이 마주쳤다. 카인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역시 당황스러운 상황에 몸을 살짝 떨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사냥매를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만은 단호했다.

“순결의 기사가 하스펠 신부를 붙잡아 놓는 이유가 있을 거야. 벽에 붙어서, 저 덩어리들 피해서 간다. 저것들, 앞을 못 보는 것 같아. 혀는 기분 나쁜 것 말고 딱히 해 끼치는 게 없어.”

끔찍하고 혐오스러웠지만, 릴리는 꿈틀거리는 혀들을 보았다. 정말로 축축한 침으로 얼굴과 옷을 핥아대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가자. 윌리엄이 모르게, 조용히. 칼 빼지 말고. 비명 지르지 마.”

“알겠습니다.”

카인은 지팡이를 움켜쥔 채 벽에 붙었다. 혀들이 당장 그의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쥐 떼가 목과 등을 타고 넘나드는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움츠렸지만, 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릴리 역시도 용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칼을 뽑고 싶다는 듯, 손을 움찔거렸지만, 그녀는 참아냈다. 딱 한 번. 혀의 이파리가 그녀의 볼에 닿았을 때 거칠게 팔을 휘둘렀지만, 혀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말려들 뿐이었다.

뚜두둑.

순결의 성기사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떨어질 것만 같은 각도로, 그는 카인과 릴리를 바라보았다.

“축복…”

그의 입이 벌어질 찰나.

“본대!”

마르코 사령관이 고함을 질렀다.

“알드릭 성주, 자네 부하들은 자네 스스로 보호하게! 본대는 대주교의 목을 친다, 돌격, 돌격! 덩어리들은 앞을 못 본다. 우회해! 몸으로 밀어내거나! 저것들과 교전해봤자 헛일이다!”

“밀집! 밀집해서 밀어낸다!”

사납게 휘둘러진 검 같았던 기사단이, 굳건한 모루처럼 뭉쳤다.

“밀집! 밀집! 싸우지 마! 밀어낸다!”

모루가 진흙밭을 서서히 가로지르듯, 기사단이 대주교에게로 전진했다. 순결의 성기사는 카인과 릴리에게서 눈을 떼고, 기사단을 보았다.

그가 축복했다.

"너희 모두를 저주할 만큼 사랑하리니, 나와 영생을 누리는 축복을 내릴 것인즉, 영원히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리라."

덩어리들이 일제히 기사단의 위로 뛰어올랐다.

시야에서 벗어난 카인과 릴리가 제단으로, 제단으로 달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재 시간을 자정으로 변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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