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6)
두 사람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지금 알아낸 것만으로는, 전체 모습을 다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사안의 윤곽만이라도 잡아보려 했다. 그래야 내일 이단심문관 그리고 기사단 고위층과 면담에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테니까.
교단과 제국 모두 영웅들을 보호하는 건 똑같다. 두 집단 모두 지금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것도 같다. 다만 대처는 완전히 다르다.
제국은 카인과 릴리를 조사자로 선택했다. 두 사람이 황실과 제국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귀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서다.
카인은 귀족이 아니고, 고향을 밝히지 않았다. 그 말은 '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을 경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안부는 장담할 수 없다.' 는 식의 협박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릴리도 비슷하다. 백혈기사단은 제국 내 독립 무장 집단이나 마찬가지. 귀족들과 딱히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제국에 충성한다고는 하지만 제국군처럼 절대복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황제 이외의 누군가가 자기들을 툭툭 건드리려 하면, 결코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백혈기사단원들은 비밀 경호 임무를 맡고 있다. 릴리와 함께라면, 적어도 그들이 먼저 공격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국은 '누구로부터도 영향받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조사'를 지향하는 셈이다.
반면 교단의 대처는 '교황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듯 하다.
일단 제국과 달리, 그들은 아직도 이렇다 할 인선을 하지 못했다. 교단과 교황의 혼선은 당장 봉쇄수도원에 순결의 기사 윌리엄과 피해자들을 가두다시피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던가.
대신, '시성' 이라는 절차에 돌입했다. 성인품에 추대하려면, 그 대상자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모든 행적, 행동, 보여준 기적, 주변인의 평가 등. 모든 조사는 합법이 되고, 범위에는 제한이 없으며 적어도 교단 고위직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정보가 될 것이다.
가면놀이를 할 수 없을 만큼 권력구조가 복잡하거나. 교황이 예전처럼 가면놀이를 할 만큼 위세가 강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안이 너무나 중대해서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거나.
카인과 릴리는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 제국에 교단이 굳이 손을 벌린 것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교단 성배기사단과 제국 백혈기사단에 호위를 부탁한 것만 봐도 그렇다.
심지어 날강도 기사 때문에 머리아파하는 제국을 도와주면서까지 호위를 부탁한 일은 교단이 얼마나 쫒기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단하긴 대단한 노인이야."
비꼬는 것이 아닌, 카인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탄사였다. 교황은 음습한 정치인이다.
'시성'을 통해 용사들에 대한 조사를 정당화시켜 뒷말이 나오는 것을 차단했다.
모든 조사 결과는 교황의 손에 들어갈 것이고, 소문과 정보의 통제 역시 교황의 지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뒷말이 무성했다면, 유언비어가 난무했다면, 교황의 위세는 더 떨어졌을텐데. 이제는 교황이 되려 역정보와 의도적인 헛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만약 일곱 영웅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면, 성인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문제가 생겼다면 '아무리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을 성인으로 공경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라며 우아하게 발을 뺀 다음, 드러난 문제를 뭉개버리면 된다.
정치적 부담도 줄이고, 교황 자신의 주도권도 챙기는 꼼수다.
꼼수인 까닭은, 그것이 정공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꼼수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교황에게 적절한 수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성 절차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용도일 것이고, 진상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에 있을 터.
“교황은 비밀정보조직을 다루는 법을 알아. 맨 꼭대기에 앉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전체 모양을 볼 수 없도록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아. 어디까지가 노림수고 어디까지가 혼란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죄다 섞어버렸잖아.”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이득이 됩니까? 모르는 건 모른다, 아는 건 안다. 그렇게 말하면…”
“약점을 대놓고 드러내는 거니까 그렇게는 안 하겠지. 하다못해 제국만 해도, 교황이 모르는 걸 알아차린다면 얼마든지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어.”
무릎을 끌어모은 릴리가 불평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희는 고생고생 해가고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현장에서 뛰는데, 교황 성하께서는 일부러 흙탕물을 일으키시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저희의 눈까지 흐려가면서요. 꼭 미꾸라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뭐 어때. 미꾸라지가 흙탕물 속에 숨는 건 몸을 보호할 수 있어서잖아. 기다리면 알아서 가라앉을 거고, 우리는 그저 차분히 기다리면 돼. 답답하고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오늘 많이 알았잖아. 내일은…더 많이 알 수 있을 거고.”
카인은 손가락으로 널빤지를 톡, 톡 두드렸다. 지금 상황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이미 다 알아냈다. 이 이상은 빈약한 사실을 토대로 한 추측과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은 자유지만, 선입견이 생겨서는 안 된다.
“오늘은 그만 자자.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나머지는 내일 교단 사람들하고 이야기해야겠는데.”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다.”
눈을 감은 카인과 달리, 릴리는 한참 동안 가방을 뒤적거렸다.
“더 할 거라도 남았어?”
“아. 네. 오일을…”
무거운 사슬 갑옷에 쓸렸다는 윗가슴. 카인의 뇌리에, 릴리의 가슴골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자리 비켜줄까?”
“아닙니다. 굳이…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카인은 벽 쪽을 보고 누웠다. 이 방은 촛불도 없고, 달빛이 유일한 조명이어서 그런지, 릴리는 조금 애를 먹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뻥, 하며 마개 열리는 소리와,
“아…”
난처한 신음까지.
“왜. 무슨 일인데.”
“…살짝 쏟았습니다.”
“바닥에 흘렸어?”
“그러진 않았는데…옷이…조금 젖었습니다. 갈아입을 정도는 아니긴 한데. 아…”
카인은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편하게 해.”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안 자니까.”
모포는 얇았고, 바깥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바람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락, 하며 옷자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귓가에 대고 낙엽을 사각거리는 것만 같았다.
찔걱…찔걱…살과 살이 닿는 소리. “으읏. 흐…” 하는 얕은 신음. 쓸린 곳이 많이 부었던 모양이다. 부르튼 상처에 차가운 기름이 닿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찌걱,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올리브 향이 가득 퍼졌다. 차가운 기름이 체온에 달아올라 고유의 향을 뽐내는 것이다. 손가락과 가슴 사이에 오일을 곱게 문지를수록 향은 더 퍼져나갈 것이었다.
“흣…”
카인은, 대체 언제 끝나나. 싶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릴리는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벗어 놓은 셔츠는 옆에 둔 채. 길고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를 오른쪽 어깨 앞으로 한데 모은 채로.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게 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인은 보았다. 릴리의 등에 난 무수한 흉터를. 낮에 예배당에서 보았던 고통스러워하던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채찍 자국. 불에 덴 자국. 칼자국. 꿰맨 자국. 천사의 등에서 날개를 억지로 잡아 뽑으면 저렇게 될까. 집요한 달빛이 불타오르며, 어서 똑똑히 보라는 듯 들이밀었다.
‘…많이 맞아봐서 압니다.’
릴리는 그렇게 말했었다. ‘흉기가 ‘검집’임을 알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저렇다면, 그 안은 더 깊을 텐데도.
저렇게 등이 가녀렸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릴리는 카인보다도 키가 크다. 물론 다리가 길어서 그런 것이지만, 안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아 보인 적은 없었다.
‘올리브 향 때문이다.’ 카인은 생각했다. ‘체취와 뒤섞인 따뜻한 올리브 향 때문이다.’
그러니까 릴리가 자신을 어깨 너머로 슬쩍 넘겨다 본 것 같은 건, 눈이 마주친 것 같았던 건,
고개를 젖힌 릴리가 흐으읏, 두 손으로 가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나른하게 툭, 툭 쓸어 내린 건. 그 때문에 등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 기름에 반짝거리는, 가슴의 윤곽이 선명히 보였던 건.
‘달이 장난을 친 거겠지.’
카인은 억지로 고개를 잡아끌었다. 나직한 신음과 함께 릴리가 옷을 집어 들어 입는 소리가 들렸다. 모포 안에 몸을 뉘는 소리도.
“혹시. 주무십니까?”
잠을 깨울까 봐 소곤거리는 소리도.
“응.”
“시끄러우셨군요.”
“아니.”
“정말 그만두실 겁니까?”
“응.”
“손잡아 주십시오.”
“응?”
가뜩이나 머리가 빙빙 도는데. 카인은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릴리의 목소리는 오일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어처피 절 여자로 보시지도 않고. 이 일 끝나면 그만두실 거지 않습니까. 그러면. 가시기 전에 동료가 동료에게 손 하나 정도는 빌려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굳이 동료가 동료한테 그래야 해?”
“…솔직히, 말해도…되겠습니까?”
“응.”
“자꾸 나쁜 기억이 떠오릅니다.”
달빛 안에 고이는 건 침묵이다. 릴리는 손을 조금씩 내뻗었다.
“그 상처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입은 상처들은, 너무 오래 봐 온 것들입니다. 아까부터 참고 있긴 했는데…이대로는 잠을 못 잘 것 같습니다. 나쁜 기억…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등을 안 봤더라면 거절하기도 쉬웠을 텐데. 기둥 뒤에서 우는 모습을 안 봤더라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인은 그냥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 빠진 사람, 손잡아 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돌아누운 상태에서는 손을 내밀 수 없다. 그래서 카인은 똑바로 누웠다. 담요 밖으로 왼손을 뻗었다.
카인 쪽으로 몸을 붙인 릴리가 오른손을 내밀어 다소곳하게 붙들었다. 오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미끈거렸고 간지러웠으며, 따뜻하고 촉촉했다.
“엉큼한 짓, 안 하실 거지 않습니까?”
릴리가 짓궂게 물었다. 카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니냐?”
“믿습니다. 여기는 ‘수도원’이니까요. 언제나 그렇듯…규칙, 지키시겠지요. 그렇죠?”
“하.”
릴리 말이 맞다. 여기는 수도원이다. 기사단처럼 천막이라도 멋대로 쳤다면 모를까, 수도자들이 자는 엄연한 숙소다. 이런 곳에서 욕망을 쏟아 내는 건 예의 없는 짓이리라.
“그래. ‘수도원’이지.”
“고맙습니다.”
“자자.”
릴리는 금방 잠들었다. 담요조차도 다 가리지 못한 커다란 가슴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손은 빼지 않으려 했다. 아예 손깍지까지 꽉 쥐었다. 카인이 힘을 풀자, 그제야 릴리도 힘을 풀었다.
‘수도원이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 순진하게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이상하게 보고 있었던 걸까.’
카인의 눈이 조금씩 감겨들었다.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과하게 많이 들었다. 보고 들은 것에 덧붙여서 냄새까지도 낯설다.
어둠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러내고, 빛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고 있었을까.
비밀의 뿌리는 깊고, 자라난 악의는 높아 올려다보기조차 힘든데.
코끝을 감도는 건 달큰하고 아릿한, 기름기 섞인 살 내음.
손바닥을 가득 채운 것은 끈적하면서도 촉촉한 기분 좋은 체온.
벽은 돌이고, 침대 매트리스는 널빤지에, 베개는 목침이지만, 옆에 누운 건 살아 숨 쉬는 선한 사람.
어지러웠다. 복잡했다. 그저 도망치고 싶어서 카인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릴리를 보았다. 벌거벗은 채로, 온몸을 훤히 드러낸 채. 올리브 오일을 발라 매끄러운 몸이 달빛 아래 반짝인다.
그런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늪에 드러누운 채 서서히 가라앉았다.
카인은 릴리를 붙들고 꺼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릴리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카인을 붙들었다. 두 팔로 등을 감쌌고, 두 다리로 다리를 얽매었다.
늪이 마치 침대라도 된다는 것처럼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카이로스. 가자. 더 나쁜 쪽으로.’
이미 그것은 릴리가 아니었다. 그림자였다. 드레스를 입은 그림자였다. 시커먼 피가 점점 번져가는 그림자였다.
카인은 발버둥을 쳤다. 신음을 흘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가 웃으며 기괴하게 비틀렸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 괜찮습니다.
조금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뭉클한 것이 얼굴에 닿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추위에 떨며 잠든 사람이 몸을 웅크리듯이, 카인은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았다.
-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온몸에 부드럽고도 뜨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카인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여기라면 안전할 것 같았다.
- 제가 여기 있습니다. 떠나지 않아요. 떠나지 마세요. 가지 마십시오. 가지 말아주세요.
기분 좋은 구속이다.
- 버리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카인은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깍지는 풀려 있었고, 카인 자신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릴리는 봄날 창가에 놓인 인형처럼 미소 지으며 깊이 잠들었는데, 그녀 역시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토록 더운 밤이었나. 의아할 정도였다.
카인은 릴리를 굳이 깨우지 않았다.
* * * * *
간단히 씻고,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햇살에 데워진 바위에 앉아 잠깐 쉬는 두 사람에게, 어제 보았던 그 수습 기사가 다가왔다. 얼굴이 멍투성이였다. 간밤에 호되게 맞은 모양이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그는 이단 심문관은 오전 10시에, 기사단 고위 간부는 오후에나 올 것 같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추가 보급품과 더 많은 인력을 데려오느라 늦을 것 같다고 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인사하며 떠나가려는 수습을 카인이 붙잡았다.
“대체 왜 그렇게 맞았습니까?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수습 기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다른 기사들과 종자들의 눈치를 보았다. 릴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거들었다.
“맞아요. 기사단이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훈련입니다.”
수습 기사는 슬프게 웃었다.
“다들 이렇게 지냅니다. 복종하고 복종시키는 법, 규율…극기를 배우고, 한 번의 실수로 죽을 수 있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기사님들도 다 이렇게 지냈는데, 저 혼자 약한 모습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당신처럼 심하게 맞는 사람은 못 봤어요.”
카인과 릴리는, 시종과 수습 기사들이 다른 기사들에게 정강이를 차이거나 머리를 얻어맞는 걸 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처럼 죽을 정도로 맞지는 않았다.
수습 기사는 손을 덜덜 떨었다. 애써 웃으려 했지만.
“성주님이 저를 특히 좋게 봐주셔서 그러는 겁니다. 아무나 성주님의 수습 기사나 시종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왜 그렇게 견디는 거죠?”
카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습 기사는 이제 턱까지 조금 떨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듯했다.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알겠습니다.”
수습 기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슬퍼 보였다.
카인은 그런 눈을 안다. 너무나 오래, 지쳐 쓰러져 심장이 터질 때까지 짐을 끌다 길에서 죽는 말의 눈이다. 마부의 채찍을 눈에 맞아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하는 그런 짐말의 눈이다.
“성기사들은 다 저럴까.”
“모르겠습니다.” 릴리의 목소리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저런다고 좋은 기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기사의 덕목에 인내가 있기는 하지만…저런 식은…저런 식은 아닙니다.”
릴리가 나쁜 기억을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어야만 합니다.”
“내 생각도 그래.”
카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며 일어섰다.
오전 열 시, 정말로 이단심문관이 도착했다. 후드를 채 벗지도 않고 그가 카인과 릴리에게 손짓했다.
“잠깐 저 좀 봅시다. 셋이서만 이야기 좀 하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4/25 : 앞부분을 살짝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었습니다. 전개 변화는 없고 문장 배열 순서 교체이므로 내용상 변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