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2)
일반적으로 수도원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단순히 신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닮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수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원도 사람 사는 곳. 밥은 먹고 살아야 하고, 아프면 의사도 찾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어지간하면 속세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는다.
봉쇄수도원은 그런 ‘어지간한’ 곳이 아니다. 봉쇄, 라는 말 그대로,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밖에서도 안에 들어올 수 없다.
한 번 발 디딘 이는, 정해진 구역 밖으로는 늙어 죽은 후에도 나가지 못한다. 죽은 후에는 수도원 경내 묘지에 매장되니까. 제 발로 포기하고 나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봉쇄수도원은 찾기도 어렵고 접근도 어려운 험지에 지어지기 마련.
카인과 릴리가 말을 타고 향하는 오트란토 봉쇄수도원도 그러하다.
깎아지른 바위산 사이 분지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사람 키보다 큰 나무 찾기도 어려웠다. 땅은 말 그대로 암반 지대라서 이끼 하나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헐벗은 산이었다.
그랬기에 카인은 처음으로 보안국 제공 사슬 갑옷에 고마워했다.
제국군조차 채용하지 않는 구형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걸 빼면 지나치게 두툼하고 무거워 기피 대상이다. 그 위에 얇은 셔츠까지 걸쳤으니 불편함도 덧입혀졌다.
하지만 이런 바람 부는 산길에서는 그런 불편함이 되레 안정감이 되었다. 길의 끄트머리에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용을 쓰는 자비기사단 병사들을 보니 고마움은 두 배로 깊어졌다.
“정지! 정지! 이 앞은 막혔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수도에서 왔소!”
카인은 고함을 지르며 말에서 내렸다. 교단에서 보내줬던 편지와 안나의 확인서가 든 길쭉한 나무통을 흔들었다.
바람이 너무나 거세게 부는 바람에 서류를 다 꺼낼 수가 없었다.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대신 카인은 끝부분의 인장만 살짝 보여주었다. 교황의 인장을 확인한 병사들이 놀라워하면서 통과 신호를 보냈다.
허무할 정도로 빠른 승인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기사단은 이미 그들이 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면 끝나는 일이었을 테니.
바람 부는 암석 들판을 지나가자 V자 모양의 협곡이 나타났다. 미친 듯이 부는 바람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귓가에 대고 나팔을 부는 것처럼 윙윙거렸다. 바람은 한 번 물은 희생자를 놓아줄 생각이 별로 없는 듯했다.
5분, 어쩌면 10분. 협곡을 지나자,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지 특유의 포근함 같은 건 아예 없었다. 돌보지 않아 방치된 개밥그릇도 이것보다는 안온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땅은 붉었고, 산은 나무라고는 없어 헐벗었다. 그런 곳에 세워진 석재 수도원은 더 없이 위압적이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는 건물이다.
중앙의 꽤 커다란 예배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집회소, 수도자 숙소가 배치되어 있다. 도서관처럼 보이는 반듯한 건물도 보였다. 바람이 제 몸을 비벼대는 바람에 조금 닳기는 했지만, 돌 특유의 둔탁한 견고함과 둔중함이 안정적이다.
그 앞마당에는 펄럭거리는 천막들이 잔뜩 세워져 있었다. 목책도 보였고, 말뚝에 매인 말들도 있었다. 임시 마굿간은 건물 벽 바로 옆에 지어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기사단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시동과 견습 기사로 보였다. 시동은 후드 없는 로브를, 견습 기사는 후드가 달린 로브를 입는다더니, 정말 그래 보였다.
“거대한 공사 현장 같습니다.”
카인 가까이 다가온 릴리가 속삭였다. 기사단원들은 꽤 바빠 보였다. 언제 가져왔는지 통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밀고, 못질하고 있었다. 나무판자를 빙 둘러 바람을 막고, 임시 화덕의 커다란 솥에서는 물이 끓는다.
뭘 위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기저귀. 피에 젖은 붕대. 오물이 가득 묻은 시트…지나가던 기사들이 카인과 릴리를 힐끔거렸지만, 피로에 잔뜩 찌들어서인지 그들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기도 지친 모양이다.
“릴리. 그냥 내려서 말을 끌고 가는 게 낫겠다. 너무 불편한데.”
카인과 릴리가 말을 달랬다. 푸르릉, 거리며 멈춰 서자, 말에서 내린 다음 장구류를 착용했다. 왼쪽 허리춤에 제국검과 검집을 착용한 건 똑같았지만, 카인은 오른손에 쇠로 띠를 두른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릴리는 귀중한 서류와 확인증이 든 동그란 나무 함을 챙겨 들었다.
두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무언가가 그들의 앞으로 굴러왔다. 견습 기사였다.
시동이든, 견습 기사든 낡아빠진 옷을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말이 좋아 로브지 사실은 넝마를 억지로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앞에서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견습 기사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천막 사이로 붉은 머리의 사내가 달려 나왔다. 투구를 쓰지는 않았지만, 쇠 징 부츠를 착용한데다 가슴에 자비기사단 상징이 그려진 단복을 입은 걸 보니 정식 기사로 보였다.
사내가 견습 기사를 발로 걷어찼다.
“이 병신 새끼, 느려 터진 새끼, 시키는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아둔한 새끼, 내가 상황 바뀐 거 있으면 당장 찾아와서 보고 하라고 했어, 안 했어?”
“하셨습니다!”
견습 기사는 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사내는 더 화가 난 듯했다.
“그걸 알아듣는 새끼가, 그걸 기억한다는 새끼가! 야,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나를 개망신을 줘. 네가! 뭔데! 나를! 망신당하게! 하냐고! 팔로 막아, 팔로 배 쳐 막으라고 병신 새끼야, 지난번처럼 피오줌 질질 싸고 싶지 않으면!”
강철 부츠가 사정없이 복부에 날아들었다. 견습 기사는 필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사내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감도는가 싶더니,
빡.
쓰러진 이의 머리를 걷어찼다. 견습 기사의 목이 확 젖혀졌다.
“보고! 막으랬지! 보고! 전쟁터에서 이러면 뒤진다고! 하, 이 병신 새끼 진짜. 들으면! 까먹고! 들으면, 까먹고! 오냐, 오늘 끝을 보자! 교훈을 대가리 뼈에 새겨주마!”
카인이 붉은 머리 머리 기사를 확 떠밀었다. 그 때문에 기사는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카인은 어이쿠, 하며 기사의 다리를 지팡이로 걸었다. 기사가 꼴사납게 뒤로 나자빠졌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이거 바람이 영 세서 말이죠!”
사색이 된 카인이 기사의 팔을 억지로 잡아 끌다가 확 놓아버렸다. 기사의 뒤통수가 쳐박혔다.
"아아악!"
“아이고, 머리 안 다치셨습니까?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세요?”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붉은 머리 기사가 손을 휘둘렀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수도에서 왔습니다. 이거 초면에 실례를 저질렀군요. 저와,저와 제 동료입니다.”
카인과 릴리는 미리 말을 맞추었다. 서로 동등한 '동료' 인 것처럼 행동하자고.
이 사건은 막시부르크 사건보다도 훨씬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상대가 '교황' 이니만큼 은밀함은 더 해야 한다. 그렇기에 카인은 자신이 4과 과장이라는 걸 밝히지 않기로 했고, 릴리는 수습 요원임을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최소한의 단서, 누가 누구의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인지조차 알리지 않아, 조사자 신원 파악을 늦추려는 시도였다.
그렇기에 릴리는 당당하게 견습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죄송하지만, 말을 어디에 매어야 하는지를 모르겠군요. 저를 잠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말이 도와달라는 것이지 강권이나 다름 없었다. 릴리는 말 두 필의 고삐를 움켜쥐었고, 다른 손으로는 견습 기사를 잡아 끌었다. 눈치 보는 견습에게 손을 두어 번 휘저은 붉은 머리 기사가 잇소리를 내었다.
“이름은?”
카인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냥 요원, 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저 친구도 그렇고요. 귀하의 성함은?”
“하! ‘요원’이라고? 그러면 나를 ‘성주’라고 부르시오.” 붉은 머리는 비아냥을 숨기지 않았다. “수도에서 요원들이 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게 당신들이로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초면의 나그네가 몸으로 부딪쳐 오는 것만큼 지랄 맞은 일.” 기사는 땅에 침을 탁, 뱉었다.
“당신이 책임자요? 여기 지휘관과 대화하고 싶은데.”
“지휘 체계도 개판이오. 하루가 멀다고 윗선이 바뀌는 통에 지긋지긋하다니까.” 다시 칵, 퉤. 이번엔 카인의 발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도 듣고 싶다면 말이지만, 일단 저기. 도서관 쪽으로 갑시다. 여기 주인은 원장 수사님이니, 원장님과 말해 보시오. 본관보다는 저기가 천국이라 할 수 있을 거요. 여기는 연옥 정도 되려나.”
“본관은 어떻길래?”
“지옥.”
요란하게, 바람이 울부짖었다.
릴리가 저편에서 걸어 나왔다. 수습 기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붉은 머리기사는 두 사람을 도서관 앞까지 데려다준 다음, 빌어먹을 새끼의 골통을 부숴버리겠다며 씩씩거렸다.
문을 열기 전, 카인은 릴리를 팔꿈치로 슬쩍 떠밀었다.
“아깐 잘했다.”
“기술 멋있었습니다.”
카인은 히죽 웃고 도서관 문을 열어젖혔다.
탁발 수도승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무척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허리가 굽고, 주름만큼이나 꼬부라진 나무 지팡이를 짚은 이였다.
“누구요? 처음 보는 분들인데.”
“수도에서 왔습니다.” 카인은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여기, 확인증도 있고요.”
릴리가 재빠르게 함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노인이 서류를 바라보았다. 마치 숨겨둔 먹을 것이라도 찾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희번덕거리는 눈이었다.
“가져가시오…나는 바르톨로메오 수사라오. 이 고요한 곳의 수도원장이지만, 근래 있었던 일 때문에 영 못 보일 꼴을 보이는구려. 내 방으로 갑시다.”
창고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방이었다.
백 년은 넘은 것 같은 책상. 등받이조차 없는 나무 의자. 손님용 의자 같은 건 아예 없었는지 나무 물통을 뒤집어엎고 위에 널빤지를 얹었다. 차가운 돌은 냉기를 내뿜는데, 빼빼 마른 나무 책장 안의 둘둘 말린 종이는 낙엽만큼이나 건조해 보인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오.” 원장은 하소연부터 늘어놓았다.
“환자들을 집어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가지를 않나, 기사단이 대뜸 마당에 천막부터 치지를 않나!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도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아요. 교황 성하의 명이라는데, 나는 그 명령서 한 장 본 적 없소이다!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은 신께서 축성한 성스러운 땅인지라, 역대 교황 성하들조차 이곳을 존중하셨거늘…!”
수도원장의 말은 이러하다.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 보니 자비기사단원들이 잔뜩 몰려왔단다. 검은 천으로 덮인 수레가 잔뜩이었는데, 포장을 벗기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들’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사람이었다.
자비기사단은 교황의 명령을 들먹거렸다. 수도원을 징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억지로 밀고 들어온 기사들은 성당의 의자를 부수어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그래도 부족하여 보이자 자기들 본원에서 가구를 가져왔다.
뿐인가, 임시 지휘소와 숙소, 식당까지 차렸다. 봉쇄수도원의 수사들은 엉겁결에 갖은 노역에 봉사해야 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지만, 기사단의 시중을 들라는 요청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들어먹지를 않아. 들어먹지를 않는다고. 여기는 봉쇄된 곳인지라 우편조차 잘 되지를 않아요. 겨우겨우 수를 써서 교구에 편지를 보냈더니 그제야 지역 기사단장이라는 놈이 듣는 척이라도 하더군. 지휘도 못 하면서 소리만 질러대는 무례한 놈이라오.”
“혹시 그 빨간 머리 기사입니까? 침 탁탁 뱉는.”
“저주받을 놈! 신성한 경내에서 또 그런 짓거리를! 아아, 이제는 힘낼 여력도 없구려…맞소. 그 사람이오. 알드릭 형제, 헤르부르크 성주. 이 지역 기사단장이라오.”
“원장님도 어떻게 제어가 안 됩니까?”
“기사단장이라는 족속들은 자기네 깡패 무리 우두머리들과 교황 성하 말만 듣는다오. 나 같은 시골 칡넝쿨 늙은이 말은 들어 먹지를 않지.”
기사단과 주교단 사이의 오랜 알력은 유명하다. 무관과 문관의 다툼만큼이나. 서로서로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틈이 나면 짓밟고 올라가려 하는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죠?”
“자기가 윗대가리 노릇을 더는 못 하게 생겼으니까.” 바르톨로메오 수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선 이단 심문관이 온다오. 당신네 제국 사람들 표현을 빌리자면, 감찰관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자기 상급자까지 오고 있으니, 지역 기사단장 입장에서는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닐 거요. 남부 지역 총괄 원수에게 밉보여서 여기까지 밀려온 거거든. 그러니 저자가 여기서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청소하고 기저귀 갈아주는 일 말고는 없소.”
“혼란스럽군요.” 카인과 릴리의 눈이 마주쳤다. 늙은 수사는 손을 포갰다. 툭툭 불거진 관절이 허옇다.
“안쪽 상황을 볼 수 있겠습니까?”
“좋을 대로. 어차피 당신네는 교단 사람도 아니잖소? 숙소에 함부로 들락거리는 것만 참아주신다면, 나머지는 뭘 해도 그러려니 하겠소. 귀도! 게 밖에 있는가!”
귀도 수사 역시 탁발승이었다. 다른 수도사들과 구별되는 점이라면 송아지처럼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 정도이리라. 갈색 눈동자는 선해 보였지만, 동시에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수도에서 오신 귀한 분들 데리고 저기 안쪽 안내 좀 해 드리게. 그리고, 여러분. 거기서 뭘 보시건 간에 말이오, 정중히 청하겠는데, 구토하려거든 바닥이 아니라 준비된 바구니에다 해 주시오.”
“구토라고요?”
원장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을 다시 내저었다. 파리라도 내쫒는 모양새였다.
귀도 수사가 “가시죠.” 하며 카인과 릴리를 이끌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후 무렵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글의 호흡과 전개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것이 많아서 제때 업로드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글을 쓰고, 고치고, 올리는 단순한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본 작품의 교황 휘하 기사단 직급은 기사단장(총지휘관) - 집사장(2인자, 참모총장급) - 원수(사단장) - 부원수(부사단장) - 지역 사령관 (기사단령 아래 각 지역 담당) - 성주(지역 사령관 휘하 각 성의 기사와 병사 지휘) 입니다. 다소 느슨한 고증입니다. 다만, 교회 기사단이 일반 주교나 신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교황의 명령과 자체 명령체계를 따르는 것은 맞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단심문관의 악명이 자자해진 것은 의외로 근세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