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14화 (15/47)

제 14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1)

『(…) 평범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식을 탐구한다는 학자마저도 종종 '역사'와 '역사학'을 혼동한다. 이러한 오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편견 때문에 생긴다. '역사학이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무감정하게 나열하는 것이다' 라는 편견 말이다.

그들은 '역사를 윤색하여 박제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질' 이라 여긴다. 역사라는 짐승의 외형은 살려 두되 구리고 냄새나며 썩어들어가는 오장육부, 눈알, 피를 제거한다. 그러면 냄새도 나지 않고 구정물도 흐르지 않는, 완전무결하고 이상적인데다 멋지기까지 한 '박제된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학자는 오로지 과거의 메달과 트로피를 윤이 나게 닦아대는 시종에 불과할 터.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사학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지식을 뜻한다. 의미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오늘 먹을 빵을 하나 더 구워야 생기는, 생존에 필수적인 상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이 지향하는 바는 그보다 좀 더 깊다. 바로 관점과 정의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가를 묻는 정체성에 대한 학문이다.

어떤 생물은 너무나도 커다랗기에,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 멀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숲은 너무나 깊고 어둡기에 그믐밤과 안개와 늑대의 무리를 뚫고, 만년설이 쌓인 산에 올라야만 비로소 그 청량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시간은 거대하며, 현재는 너무나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나이’라는 나룻배에 올라 세월의 강물을 타고 표류한 다음에야, 비로소 거쳐온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멀리서 본 것만이 옳고 가까이에 본 것은 그르다’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지나친 폭거다.

다만 어떤 일은. 아니, 어떤 일이라 하여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일곱 용사라 불렀던 이들에 대한 진상의 기록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기억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칭송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제국은 그들에게 월계관의 영광을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신분으로, 심지어 제국인이 아니었던 이까지 섞여 있던 그 일곱 용사는, 제국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두가 하나가 될 때 가장 지독한 악마저 몰아낼 수 있다는, 연합과 연대에 대한 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아, 우리는 또한 잊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인간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성인의 곁에는 순교자가 난다는 것을 잊고 있었고, 기적의 옆에는 피를 흘려야 하는 어린 양이 있음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영광에 눈이 멀어, 우리의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밟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표류해야만 했다. (…)

- ‘모든 제국인에게 고하는, 용사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초안)’ 서문에서 발췌 (제국 수도 아카데미 학장, 안나 콤모두스 저) 』

* * * * *

카인과 릴리가 수도를 떠나고 며칠 후. 그들은 여전히 우편 마차를 타고 있다.

우편 마차라는 건 말 그대로 우편을 운송하기 위한 수단. 우편은 근육통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

그 말은, 우편 마차는 우편의 안전은 고려해도 사람의 편의성은 설계 단계부터 생각도 안 했다는 뜻이다. 설령 그것이 보안국 요원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위해 개조된 마차라고 할지라도.

그렇기에 더 없이 피곤한 여정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눕기만 해도 잽의 연타가 날아오는 것만 같은 그런 고통이다. 릴리와 카인이 이런 여정에 익숙해졌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멍투성이가 되었을 터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이 제국 중앙 도로만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제국 중앙 도로는, 사람으로 따지면 대동맥 혹은 대정맥에 해당하는 중요한 도로다. 대부분 탁 트인 평야 지대 한 가운데 설치되고, 제국군 감시 초소와 말을 탄 경비병들이 수시로 순찰을 한다.

선제후와 공작령 등, 귀족들의 땅을 지났다면 날강도 기사에게 합법적으로 돈을 뜯길지도 모른다. '안전하게 호위해 줄 테니 가진 것의 반을 내놓아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적어도 제국 중앙 도로에서는 그런 불유쾌한 일은 겪을 일 없다.

카인과 릴리는 제국 직할 도시를 거쳐 계속해서 남하했다. 쉬어야 할 때면 우편국에 잠시 마차를 맡기고 여관을 찾았다. 우편국에 마부들이 쓰는 무료 숙박 시설이 있기는 했지만, 두 시간 간격으로 문이 벌컥벌컥 열고 닫히는데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방은 어떻게 드릴까요? 1인실 2개, 아니면 2인실 1개?”

여관 주인이 물어올 때마다, 릴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카인은 릴리가 말을 끝내는 걸 원치 않는다는 투로.

“2인…”

“1인실 2개!”

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여관 주인이 맹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때면, 카인은 탁 소리 나게 돈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영업자가 돈 내는 사람 말을 들어야지 달리 누구 말을 듣겠는가.

덕분에 카인은 1인실에서 느긋하게 안나의 지침과 비밀스러운 접촉 방식에 대해 충분히 숙지할 수 있었다.

안나의 편지는 예상대로, 불가에 가까이 대어야 내용이 드러나는 특수 잉크로 적혀 있었기에,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했다.

문제는 그 다음. 사흘 전 밤이었다. 규정대로, 여관 마당에 촛불을 들고 나와 서류를 불태우는 걸 릴리가 봐버린 것이다.

“혹시…”

“뭐.”

“연애편지입니까?”

“응.”

다음 날 릴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독한 눈으로 카인을 노려보곤 했다. 그리고 이틀 전 묵었던 숙소에는 1인실이 없었다.

릴리는 이번에야말로, 라는 표정으로 2인실을 외치려 했지만 카인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공동 숙소로 합시다."

라며 돈을 내버렸다. 덕분에 그들은, 류트로 온 세상을 하나로 단결시키겠다는 정신 나간 악단과 밤을 보내야 했다. 북부 이교도까지 섞인, 잘도 제국 국경을 넘은 악단이었다.

하지만 맥주를 안주보다 더 많이 마시고, 노래를 실컷 부르다 보니 그런 건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항의하러 온 옆방 사람들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재미는 있었지만, 카인과 릴리는 퉁퉁 부은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와 말은 그새 바뀌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날의 마부였다면 '엄청난 밤을 보낸 모양이네.' 라고 지레짐작하며 음흉하게 웃었을 테니까.

카인은 지도를 살폈다.

오트란토 봉쇄수도원까지는 하루만 더 가면 된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마리푸르트에 우편 마차를 두고, 말을 빌려 탄 다음 반나절 정도 가면 되는 셈이다.

피곤했지만. 잘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안전한 도로라고 해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릴리가 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사실 미지의 날강도보다도 그녀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카인은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일곱 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릴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볼 거 없으면 책을 봐. 바깥 구경을 하던가.”

“책은 다 읽었고 경치 구경은 지루합니다.”

“이젠 곁눈질도 안 하네.”

“저도 아름답고 멋진 걸 보고 싶습니다. 욕심 좀 부리는 게 나쁩니까?”

“그런 문제라면 거울 보는 게 나을 텐데.”

“저는 거울이 없…”

무심코 대답하던 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카인은 낄낄거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진짜 연애편지였습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네.”

릴리는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카인은 목을 가다듬었다.

“…연애편지 아니었어. 임무 지시서였다. 다 숙지하고 난 다음에 소각한 것뿐이야.”

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흥. 거짓말쟁이. 못 믿겠습니다.”

“또 뭐가.”

“그러면 왜 각방을 고집하십니까? 숨겨둔 애인에게 답장 쓰려고 하셨던 거 아닙니까? 아니면 또 다른 연서를 몰래 읽으시려고요?”

카인은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릴리는 비뚤어졌다. 뒤늦은 사춘기라도 찾아온 것일까.

“아니…당연하잖아. 아무리 우리가 같이 일하는 요원이라고 해도. 같은 방에 굳이 잘 필요가 있어? 남녀 사이에?”

릴리는 고개를 홱 돌렸다. 꼭 떼쓰는 어린애 같았다.

“제가 여자로 보이시기는 합니까?”

유치했다. 아니, 라고 했다간 ‘그러면 오늘 밤에 같이 자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나올 거고, 응, 이라고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함정을 지나치게 정성스럽게 판 다음, 기둥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애 같았다. 결국 카인은 책을 내려놓았다.

“일곱 용사 이야기 알지?”

안 넘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예측했고, 그래서 말 돌릴 거라는 것도 알았지만,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맥락 없는 화제전환에 릴리는 그만 깜빡 넘어가 버렸다.

“알고 있습니다. 제국, 아니 제국인이 아니어도 알 만한 이야기 아닙니까. 10년 전에,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동부 상인 연합국과 제국 사이의 황무지에서 마왕이 나타났고, 일곱 용사가 마왕을 무찔렀다는 이야기.”

실상은 좀 더 복잡하지만, 릴리가 말한 내용이 평범한 제국인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음. 일곱 용사의 신분은 모두 달랐다고 했습니다. 배경도 달랐고 나이, 경력, 심지어 제국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만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왕을 무찔렀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제국의 신민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을 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 일곱 용사 중 두 명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했어. 살아는 있는데, 말 그대로 살아만 있는 상황이야. 지독하게 당했더라고. 우리는 누가, 왜, 뭐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보러 가는 길이야.”

“누가 당했습니까?”

“첫 번째는 절제의 사도, 아리우스 수도원장. 살아 있다고는 하는데 교황이 어디에 잘 숨겨놨는지 위치는 몰라. 그래서 우리는 지금 두 번째로 공격당한, 순결의 기사 윌리엄 대주교를 만나러 가는 길이고. 마리푸르트에 마차 반납하고 짐 챙긴 다음, 말로 갈아타서 오트란토 봉쇄수도원까지 갈 거야. 제국의 용사가 당한 사건이니만큼, 교황도 이 사건에 참여한다고 했어. 썩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지.”

릴리 역시도 동의했다.

백혈기사단이 아무리 세속 권력에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종교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더구나 백혈기사단은 황제보다 교황과 더 악연이 깊다. 성배기사단과 백혈기사단 사이의 무력충돌 사건은 아직도 유명하니까.

“누가, 대체 왜. 10년 전의 영웅들을 굳이 찾아가서 공격하는 걸까. 그래야 할 이유는 뭐고. 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공격당한 사람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아리우스는 몰라도, 윌리엄 대주교 일행은 50명이 넘었어. 심지어 30명은 잘 무장하고 훈련된 병사들이고. 그…어떻게 당했는지 스케치를 봤는데. 마차 바퀴에 깔린 짐승 같았어.”

릴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바퀴에 깔린 짐승 같았다.'라고 하셨습니까?”

“응.”

“저. 스케치에, 혹시 베이거나 잘려 나가거나 아니면 관통당한 흔적은, 혹시 없었습니까?”

카인은 놀라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스케치의 기괴함에 놀라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이다.

오히려 릴리가 카인에게 묻는 말이, 안나와의 자리에서 떠올려야 했던 당연한 것들이었는데도. 하긴 안나도. 카인도, 분노하긴 했었다.

“세부적인 모습은 기억이 안 나.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충격적이었거든. 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 적어도 내가 봤을 땐.”

“그렇다면, 둔기로군요.”

릴리는 바로 대답했다. 검술 명가 둘째 딸 이름값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했다. 더듬거리고 놀라워하면서도, 카인은 피해 상황에 대해 릴리에게 들려주었다.

윌리엄 대주교, 자비기사단 소속 창병 30명. 하인과 고용인 포함 17명, 교구 사제 두 명과 수도사 한 명, 수녀 두 명이, 말 그대로 짓뭉개져진 채 살아 있노라고. 다만, 대주교의 모습은 좀 더 지독하다고.

“…좀 끔찍한 이야기인데. 윌리엄 대주교는, 갈비뼈가 몸을 뚫고 나와 있었어. 그것도 둔기일까?”

“그럴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릴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상 훈련할 때, 말에서 잘못 떨어지면 드물게 생기는 일입니다. 부러진 갈비뼈가 살을 찢고 나오는 경우입니다. 다만 폐를 찢을 경우, 치명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어찌어찌 살아난다고 해도, 폐가 제 기능을 못 하면, 몸이 천천히 굳습니다. 산 채로…몸에 갇히는 셈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상합니다. 영웅 윌리엄과 창병 30명은 그렇다 쳐도. 하인과 고용인, 사제, 수도사, 수녀들까지 공격할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 모두를 살려놓고, 둔기로만 공격했다는 건…”

릴리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릴리. 네 생각은 어때? 이게 대체 뭐인 것 같아? 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뭔지 모를 놈이, 왜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릴리는 뭔가 집히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카인은 릴리의 대답을, 그리고 반응을 마음 속에 기억했다.

무언가를 보기 전에 지레짐작하는 건 위험하지만, 이 경우는 선입견이 아니라 가설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가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보는 것보다, 최소한 무언가를 보아야겠다 마음먹고 본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다.

그리고 하루하고도 반나절 후,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서, 카인과 릴리는 가설을 검증했다.

잔혹한 증명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서두의 책은,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안나 콤모두스 교수(황제의 누나)가 제국 신민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보고서를 썼다는 뜻입니다. 카인과 릴리가 모험을 떠나는 현 시점에는 없는 책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안나가 쓴 '미래의' 보고서를 미리 '앞당겨서' 인용한 것입니다.

작중 우편국의 마차와 마부는 사실 보안국 소속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우편 체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기는 한데, 기회가 되면 본문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어 보겠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은 중세를 선택적으로 고증하고 있습니다. 진짜 같은 중세를 중시했다면 작중에 거의 다 근육을 뽐내는 거친 남자들만 나올 텐데, 전 그런 글은 별로 안 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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