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13화 (14/47)

제 13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完)

릴리는 기둥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기둥 두께는 한 사람을 넉넉히 가릴 정도로 두꺼웠다. 굳이 옆으로 돌아간다면,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삼키는 릴리가 보이겠지만, 카인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릴리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할 때마다 숨을 들이쉬었다. 눈물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억지로 쌓아놓고 있었다.

카인은 릴리가 등진 기둥 반대편, 태양을 향해 앉았다. 우는 여자를 곁눈질하려는지 햇살이 쏟아졌지만, 눈치 빠른 구름이 적당히 가려주었다.

울음이 조금은 잦아든 것 같았다.

“점심 먹었어?”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잠깐 둘러봤는데, 여기저기 많이 생겼더라. 나 졸업할 때는 없던데. 먹을 것 좀 사 올게. 이것 좀 맡아줘.”

지팡이를 뒤쪽으로 슬쩍 떠민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릴리가 지팡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것도.”

카인은 릴리의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몸은 돌리지 않은 채, 팔만 기둥 뒤쪽으로 돌려서.

“그. 털어낸다고 털었는데, 워낙 희고 깨끗해서 귀퉁이 것들은 잘 안 지워지더라.”

큭, 과 힉, 의 중간 정도 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부끄러웠기에, 카인은 훌쩍 일어섰다. 작은 광장은 후문과 가깝지만, 그쪽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걸리기에 그냥 담장을 뛰어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운동 신경만큼은 좋아졌기에, 학생 시절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잠시 후 카인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건포도와 건과일이 박힌 빵, 쿠키 조금, 도수 낮은 술을 담은 가죽 물통에 치즈 약간.

릴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가린 채였다. 카인은 기둥 옆에 바구니를 가만히 내려놓고, 기둥을 등지고 밝은 쪽을 향해 앉았다.

기둥에 기댄 채로 두 사람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고맙게도, 이곳을 찾은 학생들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다른 곳으로 비켜주었다. 외톨이들에게 비밀 장소가 하나만 있지는 않으니까.

바구니가 다 비자, 조금은 속이 든든해졌다. 아니면 맥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도수 낮은 걸로 달라고 했는데, 카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부터 할 말 때문일까.

“저기. 아까 고마웠다.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 했네.”

“어떤..”

“고드프리.” 카인은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예전에 붙었을 때 발목을 작살내야 했는데. 그래도 나서 준 거. 고맙다.”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니기는.” 카인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을 주워들었다. 이리저리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저는 결투 규칙도 제대로 모르지 않았습니까.”

“모르는 건 배웠으니 된 거고. 네 마음씨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릴리의 말은 느렸다. 혀도 살짝 꼬여 있었다. 도수 낮은 맥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말은 바보처럼 해서 다른 분들 놀라게 하고. 눈치도 없고…행동도 느리고…무능하다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아버님이…” 릴리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아까. 다들…보는 앞에서.”

“네가 뭘 했는데.”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카인은 아까 학생들이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릴리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 들었던 속삭임. 백혈기사단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광장에서 소리쳤다고 했다.

집안의 수치. 멍청한 둔재. 너 같은 걸 자식이라고 키운 내 시간이 한스럽다고.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저주스러운 자식이라고. 그렇게 외쳤었다고 했다.

‘미친 노인네.’

그러니까 기사단장은 오래간만에 자기를 찾아와 인사한 딸한테 대뜸 욕부터 때려 넣은 것이다. 나날이 괴팍해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릴리는 끅, 끅 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카인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자기 안에서 끓는 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 씨.”

결국 카인은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담장에 맞은 돌이 산산이 박살 났다.

“아니야. 네가 왜 눈치가 없어. 무능해? 그리고 뭐, 느려? 느리다는 애가 보안국 과장 서류 가방을 냉큼 훔쳐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끅, 하는 소리 사이로 다시 킥,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돌려드릴 겁니다.”

“네가 이겼다.”

“예?”

“네가 이겼다고. 퇴직, 미루기로 했다.”

흡, 하고 숨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급하게 마셔서인지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다음에 들린 말은,

“거짓말…”

반신반의하는 어투였다.

“거짓말 아냐. 동쪽 입구에 버네이스 국장님이 기다리고 계실걸. 내 생각인데, 지금쯤 무슨 우편마차 마부로 변장한 다음 술 잔뜩 드시고 자고 있을 거다.

그리고 좀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위장 퇴직하고 진짜 퇴직은 비밀 인가 취급증을 내사과에 제출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로 갈려. 다행히도 나는 내사과에 내지 못했고. 뵘과 봄이 말한 것처럼, 위험한 임무를 맡을 땐 퇴직계 쓰는 게 기준 절차 중 하나라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어때. 이래도 거짓말 같아?”

기둥 뒤편에서 릴리가 손을 뻗었다. 카인의 손등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깨고 싶지 않은 꿈을 붙드는 것처럼.

“그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그러면 확인하러 같이 가던가. 거짓말인지. 아닌지. 국장님한테 갔다가, 남부로 가는 거야. 어때.”

“남부, 말씀이십니까?”

“응. 교수님이 일을 하나 부탁하셨거든. 좀, 어려운 일이야. 어두운 일일 것 같고. 가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도 괜찮아. 안 내키면…”

릴리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오른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왼팔로는 카인의 팔짱을 끼었다.

“가고 싶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주었다.

“그러면, 조금 쉬었다가 가자. 술 좀 깨고.”

카인은 햇볕을 받아 따듯한 기둥에 머리를 대었다.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릴리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터였다.

“일 때문에…”

“응?”

“일 때문에, 잠시 머무시는 겁니까?”

일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카인이 찾고 싶었던 건 답이었고, 의미였다.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대한 이해.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한 답.

하지만 그걸 릴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응. 하나만 더 하려고.”

“일 때문이로군요. 저 때문은, 아니고요.”

카인은 침묵했다. 릴리는 카인의 옆으로 더 가까이 붙었다.

“그래도. 그래도, 감사합니다.”

“숫돌아.”

키킥, 하는 웃음.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눈이 퉁퉁 부어 있으리라. 카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비가 올 것 같았다. 어두워지면, 비가 내리면, 적당한 걸로 가려줄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시간을 끌어도 된다.

“그래. 너 때문에 남은 건 아냐. 그렇지만, 네가 내사과 어딘지 모르겠다면서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너와 별관에 갈 일도 없었을걸. 결투법령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고드프리에게 두 번이나 결투 신청을 할 수도 없었을 거고.

그렇게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우리가 교수님 마차에 타는 영광도 못 누렸을 거고. 내가 일 하나를 더 맡을 일도 없었겠지. 이게 다 네가 한 일이야. 이래도 네가 무능해?”

릴리의 손가락이 카인의 손등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잖아.”

어깨와 목이 간질거렸다. 릴리의 금발 머리가 살짝 드리워져서였다. 어쩔까, 하다가. 카인은 어깨를 기울였다.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카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카인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기분 좋음이.

“그래서 더 거짓말 같습니다.”

너무 붙었는데,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뭐 어때, 싶어 카인은 그냥 두기로 했다. 둘 다 지쳤고, 둘 다 취했다. 도수 낮은 술을 달라고 했는데, 그 바보 같은 주인이 주문을 거꾸로 알아들은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대신 나른해졌고, 졸렸다. 비구름이 오고 있는데도.

“고맙습니다.”

“뭐가 그렇게 고마워.”

“있는 대로 봐주셔서. 어깨를 내주셔서. 제 억지를 받아주셔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카인은 속으로 다섯을 세기로 했다. 다섯, 후에는 일어날 것이다.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인은 다섯을 더 헤아렸다.

* * * * *

아니나 다를까, 버네이스 국장은 우편마차 마부석에 발을 올리고 자고 있었다. 간신히, 장대비가 쏟아지기 전 국장을 깨울 수 있었고, 세 사람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너희 기다리다 늙어 뒤지는 줄 알았다.”

버네이스 국장은, 말은 그렇게 해도 포도주 냄새가 확 풍겨왔다.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긴 모양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들었어?”

릴리는 카인을 바라보았고,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재혼하신다면서요.”

“무슨 개소리야. 우리 아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잘못 들었네요. 중혼하신다면서요.”

버네이스와 카인은 낄낄거렸다.

카인이 안나에게 들은 말을 한마디라도 했다간, 당장 버네이스는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안나에게 들은 이야기는 버네이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보안국은 보안국의 일을 할 뿐이며, 그 외의 일에는 눈을 감는다. 그게 원칙이다.

버네이스가 바닥에 놓인 궤짝 두 개를 두드렸다. 아쉬운 대로 천을 깔면 침대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너희 장비하고, 읽을 자료는 여기 넣었다. 내가, 세상에. 국장까지 달고 애들 소풍 준비까지 해야 하다니…가는 길은 알지? 제국 직할령 따라서. 자는 곳, 쉬는 곳, 마부는 보안국 지정된 것만 쓰고.”

“당연히 알죠.”

“대신에, 최종 목적지까지는 네가 몰아야 해. 거긴 제국령이 아니니까.”

보안국 소속 마부에게도 오트란토 수도원으로 간다는 걸 노출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동시에 이게 의미가 있는 움직임인가 싶었다. 수도원에서는 교황의 사람들과도 만나기로 되어 있다. 조사반까지 대동한다면 꽤 큰 규모의 움직임일 텐데, 그렇다면 눈에 뜨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릴리 요원.”

“네.”

버네이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직 수습인 건 알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속성으로 가르치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몸을 빼. 요원은 몸을 잠시 빼고, 숨을 돌린 다음, 다시 매섭게 몰아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그 판단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어. 준비를 충분히 해도, 위기를 다 못 이겨내는 게 요원이야. 하물며 준비가 안 되었는데 무모하게 달려든다? 아무 의미 없어. 검사니까 내 말을 잘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릴리의 얼굴에 각오가 떠올랐다. 버네이스는 손을 내밀었다. 릴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가방 달라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릴리는 푹 고개를 숙이고 카인의 서류 가방을 건네주었다. 버네이스는 가방을 열고 서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이건 왜 또 쓰다 말았어?”

“바빠서요.”

“어설픈 놈…여기. 잉크와 펜이다. 불러주는 대로 적어. 넌 인마, 과장이나 되는 놈이 퇴직 보안 서약서도 못 외우고 뭐 했어?”

그 서약서를 눈감고도 쓸 수 있으려면 최소한 부장급은 되어야 할 것이다. 카인은 히죽 웃으면서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 거친 나무판자 위에 적었던 지라 위쪽과는 잉크의 번짐이 달랐지만, 유의해서 보지 않는다면 눈치챌 수준은 아니었다.

굵은 빗방울이 마차의 벽을 때렸다. 가방을 챙겨 든 버네이스가 문을 열고 뛰어 골목길 사이를 달려갔다.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마부석에 올라탔다. 보안국 직원일 것이다.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창밖으로 번개가 반짝거렸다.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마부는 되려 속도를 높였다. 두 마리 말이 히힝, 하며 달렸다. 말들도 비를 맞기는 싫을 테니까 말이다.

“저, 그런데 무슨 일하러 갑니까?”

릴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카인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머리가 무거워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좀 자라.”

“네?”

“첫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꽤 가야 하는데, 둘 다 자고 있으면 위험해. 우편 마차로 위장하고 있으니 노상강도가 덮칠 위험도 크다. 그러니까 번갈아 가면서 자야 한다고. 푹 자는 건 숙소에서. 알았지? 첫 도시만 넘어가면, 제국 중앙 도로를 탈 거니까 좀 낫겠지만...”

의아해하면서도, 릴리는 둘둘 말린 침낭을 펼쳤다. 양모 가죽으로 된 것이라 꽤 푹신했다. 이내 릴리는 잠에 빠져들었다. 길은 덜컹거리고, 바퀴는 튀어 오르는 데다, 오래 타면 온몸에 멍이 드는 것으로 유명한 마차지만, 육 개월 동안의 수습 생활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릴리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 카인은 품 안에서 안나의 서류를 꺼냈다.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촛불 혹은 열에 가까이 대야 내용이 드러나는 잉크로 적힌 모양이다.

피곤했지만. 잠들 수는 없다.

버네이스가 준비한 상자를 열자, 용사에 대한 전문적인 책자들도 보였다. 그중에는 용사들 본인이 직접 자신들의 모험에 대해 적은 것도 있었다.

계속해서 마차를 달린다고 해도 일주일은 족히 가야 하는 거리다. 그리고 책은 언제든 읽을 수 있다. 릴리가 불편한 듯 몸을 꿈지럭거렸다. 카인은 모포 하나를 펼쳐 덮어주었다.

‘계속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릴리는 곧다. 그리고 곧은 것은 버티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굽히는 것에는 관대해도, 버티는 것에는 얼마든지 모질게 대할 수 있다.

어쩌면 릴리도 닳고 닳아져서,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질 때까지 서서 버티다가, 이윽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돌려보내야 할 거다.

일주일 후, 그들은 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집을 든 그림자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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