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7)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아얏.”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안나도, 니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그 둘째 딸이었구나. 아무리 두 번째 부인과 원치 않은 결혼을 했고, 원하지 않은 자식을 얻었다고는 해도. 그렇게 모질게 대할 필요까진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식인데…”
“…뭐라고 했길래? 대체?”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부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래서 더 끔찍한 말. 잠깐 들었는데, 와. 세상에…듣다 못 한 교수하고 학생들에, 부하들까지 달려들어서 간신히 떼어놓더라고. 기사단장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어.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욕에 저주를 퍼부었어. 이교도한테도 안 할 욕을…”
“세상에.”
안나가 얼빠진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난 몰랐어. 나는…나는 그저…”
“여보. 여보. 잠깐만.” 니키가 황급히 일어섰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남의 집 가정사까지 전부 알 수는 없어. 당신 잘못 아니야. 그런 줄 알았다면 안 보냈을 것 아냐.”
“그랬지. 당연히…당연히 그랬지…아. 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그냥…그냥 난, 오래간만에 아버지를 보면 반가울 거라고 생각해서…”
“여보. 백혈기사단국이 보통 귀족이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알았겠지. 하지만 제국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귀족 집단이잖아. 불만이 있으면 입이 아니라 칼로 푸는 사람들인데.”
“머뭇거릴 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여보. 여보. 안나.”
니키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제발. 안나. 당신도 사람이야. 신이 아니라고. 어떻게 항상 맞는 선택만 하겠어. 정답만 골라 가는 인생은 없어. 알잖아. 당신도.”
“후회가 남잖아.”
“…그건 그렇지.”
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니키는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큼. 뭐. 그건 그렇고. 당신은 이야기 잘 끝났어?”
안나는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했다.
“응. 수락했어. 천만다행이야. 퇴직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어느 호숫가로 향하는 마차에 타고 있었을걸.”
제국 보안국은 평범한 집단이 아니다. 세상 어느 곳보다도 정보를 먼저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 말은, 사리사욕을 챙기기 좋은 정보를 얻고 바로 퇴직해버린 다음 국익을 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보안국 퇴직자들은, 맡았던 임무의 경중과 지위를 고려하여 육 개월에서 일 년 동안 제국의 모처에서 ‘요양’ 생활한다. 반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머릿속의 지식은 낡은 것이 될 테니까. 심지어 그 기간에는 편지와 면회도 모두 감시받아야 한다.
바로 그렇기에, 비밀 인가 취급증을 제출하지 않은 가짜 퇴직은 훌륭한 신분 세탁이 된다. 대외적으로는 퇴직자로 알려져 있고, 제국 ‘모처’에서 감금 생활 중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그…안나. 당신이 뽑은 그 친구, 알아봤는데. 이력이 좀 이상하던데.”
“이상해?” 호기심을 보이는 안나를 보고, 니키는 안도했다. 안나가 릴리 생각을 그만두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테니까.
“뭐가 이상한데? 제국 아카데미 최초의 평민 출신이라는 거, 아니면 내 제자였다는 거?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입학 성적은 최우수였지만 1학년과 2학년 때는 간신히 퇴학을 면할 정도였지만, 3학년과 4학년 때는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은 거?”
“좋은 학생이 곧 좋은 요원이 되는 건 아니지.” 니키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고과 평가는 좋더라고. 교차 검증 보고서도 나쁘지 않았고. 보안국 요원이잖아. 오해는 하지 마. 차라리, 난 이런 은밀한 일은 근위국에서 담당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 싶었거든.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카인 요원에게 근위국 자원을 할당하기까지 했지.”
“그랬었지.”
“단순히 이 친구 자격 조건이 좋아서 한 말은 아닐 거 아냐. 그렇게 이 친구에게 기대감이 큰 이유가 있어? 물론 과장 정도 되면, 실력은 좋긴 하지만. 과장이 이 친구 한 명인 건 아니잖아. 왜 이 친구여야 했어?”
“경력 이야기부터. 뭐가 이상했는데?”
“4년 전에 베네루치아로 가서, 2년 전에 돌아왔잖아. 맞지? 단돌로 가문 스캔들. 동부 장사꾼들 여섯 개 길드 연합이 한순간에 무너진 그 사건. 그게 이 친구가 한 일이던데?”
“그랬지.”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니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여섯 길드가 다시 힘을 합쳤다면, 전쟁이 분명히 또 일어났을 거거든.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동부는 지금 내전 위기까지 가고 있잖아. 이 정도의 일을 했는데 왜 아직도 과장이야?”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애초 카인이 부여받았던 임무는 그게 아니었어. 베네루치아 도제의 외동딸을 포섭해서 망명까지 이끄는 게 그의 임무였어. 하지만 실패했지. 실패의 여파가 단돌로 스캔들로 이어졌고. 분명히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얻어걸린 행운이야."
안나는 냉정했다. 사랑하는 제자라고 해도, 평가는 정확해야 한다.
“그런 행운은 반드시 사람을 망쳐. 자기가 받아야 할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은 사람은, 다시는 땅을 밟지 못해. 그리고…카인 본인이 육 개월 휴직을 청했고. 지팡이 쓰는 기술을 그때 배운 거야.”
“왜 그랬을까?”
안나는 대답해주었다. 니키가 입을 벌렸다.
“맙소사.”
제국의 재상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세상에. 맙소사…대단한 친구네.”
“그래. 서글프게도 대단하지. 하지만 내가 그를 뽑은 이유가 제국에의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야. 왜 근위국 사람을 쓰지 않았냐고 물었지? 근위국은 훌륭해. 기계에 가깝게 일하고, 완벽하지. 하지만…”
안나는 책상을 두드렸다. 교황이 보낸 편지가 든 책상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전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어. 뭐가 감히 제국의 용사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 일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
근위국도 보안국도 했던 일이 아니고, 교황조차도 일을 처리하지 못했으며, 제국의 힘만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카인은 할 수 있어. 카인이 못 하면, 세상 누구도 못 해.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래. 왜냐하면…”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안나는 말을 삼켰다. 지금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알았다. 아끼는 제자에게 못 할 말이라는 것도, 그게 얼마나 아픈 말인지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앞에 없다고 해도, 감히 할 수 없는. 남의 일이기에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말.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 한계를 뚫는 사람이니까. 그는 늘 그래왔어. 평민 출신이지만 대학에 왔고, 1학년과 2학년 때 꽤 고생했지만 적절한 지원이 주어지자 당장 최상위권으로 뛰어올랐고. 칼을 못 쓰게 되자, 어설프게나마 배운 지팡이 기술로 괴츠까지 잡아냈지.”
니키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벽하고 철두철미한, 완전무결한 근위국 병사는 아니지. 그렇지만 유연해. 꺾이고 꺾이면서도 기어코 이를 악물고 일어서지. 지치고, 닳아버렸지만, 마지막 한 번은. 이번 마지막 한 번은 버텨낼 거야.”
입술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안나는 말을 이어갔다. 입술보다 가슴이 더 아파왔으니까.
“니키. 똑똑하다는 것과 역경을 잘 이겨낸다는 건 분명 달라. 지혜롭고 똑똑하다면 위기를 잘 겪지는 않겠지.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래?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때로는 억울하게 날개를 뽑히곤 하잖아. 용사들이 쓰러져 가는 것처럼, 뭔지도 모를 것이 제국의 땅을 거니는 것처럼.
이 일은 어려워. 이전에 없었던 일이고,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해. 풀 수 없을 가능성이 더 높아. 그래서 나는 안전한 실패보다는, 위험하게나마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패를 꺼냈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줄 거야. 화려하게 실패해도, 최소한…최소한 뭔가는 꺼내올 테니까. 그 아이는 그래. 그 아이는.”
니키의 눈에, 안나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보다 젊고, 길들지 않았던 시절의 안나. 자신과 이마를 맞대고, 같이 황제가 되자고 속삭이던 시절의 안나.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안나는, 그때보다 자신감은 줄었을지언정, 훨씬 지혜로워졌다. 무수한 실패가 그녀를 꺾어놓았지만, 대신 그녀는 다른 길을 찾아냈다. 그늘진 곳에서 자라나는 식물이 기어코 빛을 찾아 나아가듯이 그녀도 그러했다.
어쩌면.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라는 별명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그 시절의 안나에 대한 설명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아내를 배신한 남편, 니키 브리엔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안나의 보는 눈이 없을지라도. 생각한 것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다 불타버린 후에야.
비로소 값지고 값진 것 하나만이 반짝거리지 않던가.
“알았어. 나도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오후에 성배기사단과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교황에게 전할 말 없어?”
“있지. 아주 많이. 나도 많지만, 내 동생도 할 말이 무척 많아. 정말로.”
안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니키는, 안나가 황제와 미리 교감을 나눈 것을 크게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말만 전해줘. 사람을 살리는 수술칼은, 사람을 죽이는 장검보다 작지만,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법. 가장 아끼는 칼을 내어 주었으니, 이것이 황제가 교황에게 보이는 마지막 인내라고.”
니키는 안나가 격노하는 것을 보았다. 조소하는 태양마저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구름 뒤에 마저 숨는 것도 보았다.
남매는, 한때 크게 싸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남매다. 차이가 커 보이는 이유는,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 남매에게는 세상 누구보다도 교황을 증오할 명분이 충분하다.
독수리가 가끔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겠지만, 닭은 독수리만큼 높이 날 수 없다. 제국이 지금은 잠시 몸을 낮추었을지언정, 우습게 여기는 이는 허공에서 몸이 찢겨나가리라.
‘황제의 뜻이니, 그리되리라.’
제국의 재상은 다시금 각오했다.
* * * * *
건물을 나오고, 카인은 지팡이를 바닥에 두어 번 내리쳤다.
딱. 딱. 얼굴을 풀기 위해서였다.
심각한 사건을 맡았다고 해서 세상 짐 다 짊어진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비장한 사람처럼 놀림 받기 쉬운 사람은 없다. 그 말은 눈에 뜨이기 쉽다는 소리며, 보안국 요원이라면 그런 주목은 피해야 마땅하다.
카인은 교정을 돌아다녔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릴리를 찾아서였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모르는 척하며 서류 가방을 버리고 가버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한 일이다.
하필 점심시간이 지난 후라, 배가 고팠다. 밥을 잘 먹어야 일도 잘한다는 건 불변의 이치. 버네이스가 기다릴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인은 버네이스를 잘 안다. 자기 밥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 먹는 사람이다.
그리고 국장도 사무실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동쪽 문에서 술 취한 마부인 척하며 모자 뒤집어쓰고 자고 있을 테다.
‘뻔하지 뭐. 그나저나 대체 어디 간 거야?’
옆으로 대학생 무리가 지나갔다. 그 나이답지 않게 꽤 심각해 보였다. 카인의 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울음을 참으며 달려가던, 키가 크고 예쁜 금발 머리 여자.’
‘울었다고?’
자기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카인은 의아했다. 문득 릴리가 결투 신청하느라 고드프리의 발치에 던졌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다행히 그것은 곱게 접힌 채 그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흙이 살짝 묻어 있긴 했지만, 적당히 털어내자 나름 말끔해졌다.
측백나무관으로 걷다 보니 옛 추억이 떠올랐다.
대학교에는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얌전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학교 안의 호젓한 곳을 잘도 찾아낸다. 마치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초대장이라도 발송된 것처럼.
카인도 그런 학생이었고, 다행히 교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미술관 뒤편의 작은 공원이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멋진 기둥이 많이 세워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시간을 가지려는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그리고 혼자 훌쩍거리며 울음 참는 여자가 숨기에도 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