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11화 (12/47)

제 11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6)

햇살이 집어 던져진 시체처럼 책상 위에 떨어졌다. 책상이 먼지를 피워올리며 항의하자, 태양은 야유하며 더 많은 빛을 집어 던졌다. 새벽과 함께 사라지지 못한 악몽의 페이지들이 책상 위에서 제 몸을 펄럭거렸다. 기이하게 번뜩거리는 편린들이 빛줄기 아래에서 합창한다.

- 보라. 너희가 편히 먹고 마시고 잠이 들었을 때, 너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오늘밤 네가 이렇게 고통받을 때도, 이웃은 평안 속에 고요히 잠드리라. 어제의 너처럼.

귀에 담는 것조차 불경하다는 듯, 안나는 서류와 스케치를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거칠게 열어젖힌 서랍에 집어넣고 탁,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그래. 어떤 것 같으냐.”

가장 밝은 햇살이 지나치는 곳. 그렇기에 너무나 어둡게만 느껴지는 암흑에서 안나가 물었다. 카인은 직감에 따라 답했다.

“과시 섞인 경고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죽여 전시하는 대신 무력화시켜 살려놨고, 그러면서도 최대한 거칠게 다뤘습니다. 마치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개미를 찍어 눌러 터트리는 대신 섬세하게 더듬이만 뽑아내는 것처럼. 첫인상은 그렇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이한 것도 도를 넘으면 허무맹랑한 상상이나 허구로 치부되는 것처럼, 바늘 끄트머리만큼의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설이나 괴담 혹은 옛사람들의 그림이라 하면 더 어울릴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잘 다룰 수 있는 현실적인 의문들로 돌아왔다.

“그림과 보고서를 작성한 쪽은 근위국입니까?”

“아니. 교황이 보냈다.”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 희생자인 아리우스 수도원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윌리엄 대주교와 그 하수인들에 대해서는 알려주더구나. 로렌츠 백작령 동쪽에 위치한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이다. 본래는 교황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곳이어야 하건만…교황도 경황이 없었던 거지. 그만큼 급하다는 뜻일 거다.”

하긴, 이런 환자들을 평범한 병원에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리우스 수도원장 역시 다른 수도원에서 돌보고 있을 터다.

“교황 쪽에서도 조사관을 보내겠다고 했다. 다만 세속의 권력만큼이나 교회의 권력도 칡과 등나무만큼이나 서로 얽혀 있는지라 인선에 애를 먹는 것 같더구나. 준비되면 그쪽에서도 보내겠지만…솔직히 회의적이야.

그들에게 진작 그런 역량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교황이 파견하는 사람은 조력자라기보다는 감시자일 확률이 높겠지.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겠지만, 네가 무엇을 보고 듣는지 정도는 보고할 교황의 귀 말이다.”

유념해야 할 이야기였다. 동시에 이게 얼마나 막연한 일인지도. 하지만 일단 부딪혀 보아야 한다. 어깨로 밀어보기 전에는, 허무하게 열리는 문인지 굳건한 벽인지 알 수 없는 법 아닌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스케치와, 황당무계한 편지로 할 수 있다, 없다를 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카인은 숙련된 보안국 요원이다.

“알겠습니다. 오트란토 수도원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 * * *

안나는 카인이 따라야 할 대략적인 지침에 대해 알려주었다.

모든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이유는, 세부 사항은 아카데미 동쪽 입구에서 대기 중인 버네이스 보안국장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나는 보안국장이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을 직접 설명했다.

첫 번째는 보안국의 정보 자원과 금융 지원뿐만 아니라, 근위국의 자원 역시도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보안국과 근위국은 여러모로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헌신의 대상이다. 보안국은 제국을 위해 일하지만 근위국은 오로지 황제와 황실 가문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까 안나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지원을 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는 정기 보고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이 사건은 버네이스 국장이 아니라 안나 본인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했다.

안나가 제국 각지의 근위국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이유기도 하다. 일단 보고서가 도착하면, 근위대는 밤낮없이 말을 달려 안나에게 최대한 빨리 전달할 것이다.

당연히 보고서는 암호로 작성한다. 비즈네르 암호 방식을 따르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암호키는 각 용사의 별칭을 따르기로 했다. 순결의 기사 윌리엄에 대한 보고서 암호키는 ‘순결’이 되는 셈이다.

세 번째는 카인의 정확한 업무 범위에 대한 설명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거라. 너의 결정은 곧 나의 결정이니까. 네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그렇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다. 동료를 더 뽑아도 좋고, 원한다면 언제든 버려도 좋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진상을 파악하는 일임을 기억하거라. 다만…”

안나는 망설였다. 또 죄를 짓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아주 잠시. 잠시였다.

“적어도 오트란토 수도원까지는 릴리와 동행하거라.”

“릴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단순히 네 부하여서 하는 말은 아니야. 그것보다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다. 우리가 너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만, 과도한 부담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아. 예를 들면, 나머지 다섯 용사에 대한 보호.”

카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도착했을 때, 안나는 릴리의 아버지, 백혈기사단장이 캠퍼스에 와 있다고 했었다.

“백혈기사단이 용사들을 호위합니까?”

“전담은 아니야. 변장한 채로 주변에 머물며 경계할 거다. 일종의 비밀 경호처럼. 용사들을 주로 호위하는 건 교황의 성배기사단과 이단심문소 쪽 사람들이고.

기사단원들은 기척을 숨기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네가 릴리와 함께라면 골목길에서 기습하는 일은 없겠지. 물론, 그 역시 네 판단에 따르마. 학생 때의 릴리는 내가 더 잘 알지만, 보안국 요원으로의 릴리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아니까.”

안나는 다른 서랍에서 밀봉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사안들은 여기 적어 놓았다. 따라야 할 절차들, 해야 할 일. 근위국 접선 요령 등. 이건 버네이스조차도 몰라야 해. 조사 과정에서 동행인들이 정보의 일부를 알아가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근위국 접선책과 보고서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카인은 이해했다. 근위국 지부가 제국 곳곳에 은폐되어 있다는 건 보안국 과장인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다. 국장급, 혹은 그 윗선이어야 알 만한 정보다.

그러자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왜 하필 저여야 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너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네 고향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니까.”

카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에게, 심지어 안나에게조차도, 그는 ‘과수원집 자유농의 장남’ 으로 알려져 있다. 보안국의 다른 요원들은 귀족 자제분이고, 귀족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히기 마련. 안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예외인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릴리를 데려가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야. 백혈기사단국은 제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무장독립집단이지. 검의 수도원이라고 해야 할까…기사단 안에서 파벌이 갈려 서로 다툴지언정, 외부의 귀족들과 깊은 관련은 없으니. 오히려 믿을 만하지.”

“선제후들이 이 사건과 관련 있으리라 보십니까?”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지. 하지만, 조금 섣부른 전망이긴 하지만…그럴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진 않아. 저들이 정말 그럴 수 있었다면 다른 선제후나 제국 수도에 이 강대한 힘을 썼을 테니까. 건드릴 이유가 없는 제국의 용사들을 해하는 대신 말이다.

하지만, 선제후와 공작, 하다못해 이름 없는 시골 자작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이런 불행을 자신의 이득으로 삼겠지. 나는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은 거다.”

볼 것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지, 햇살이 구름 뒤로 기척을 가렸다. 두 사람을 가로막던 빛이 사라지자, 그늘이 다시금 드러나 두 사람을 이어주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꺼내준 서류들을 챙기러 손을 뻗었다. 안나의 희고, 가녀린 손이 카인의 손등을 살짝 덮었다. 부드럽지만, 뜨거웠다.

하지만 입은, 목은, 머뭇거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이리라. 하지만 그 숱한 말 가운데 나온 말은 하나뿐이었다.

“몸조심하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한참 후에야 카인은 지팡이를 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 카인이 문고리를 붙잡았을 때.

“카인. 지팡이는…”

안나는 겨우 용기를 끌어모았다. 언제나처럼, 본론은 꺼내지 못했다.

“지팡이는, 손에 잘 맞니?”

“네. 생각보다 잘 맞습니다. 편하기도 하고요.”

“그래? 어떤 점에서?”

“마구 휘둘러도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안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카인은 인사를 건넨 후 방을 나갔다.

“하아…”

조금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태양이 옛 제자가 있던 자리를 비췄다.

문득, 안나는 자기 방이 너무 넓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도.

넓은 공간을 채운 것은 공허였고, 공허를 바라본 안나는 배가 고팠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늘인 안나는 아얏, 하며 손가락을 입가에 대었다. 깨문 자리가 다시 벌어져 피가 흘렀다.

똑. 똑똑똑. 똑. 똑.

노크 소리다. 안나가 익히 아는 노크 소리. 저런 노크를 하는 사람은 제국에서 하나뿐이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풍채 좋은 남자가 들어왔다. 근육질이었다가 운동을 놔버린 사람들처럼 그도 적당한 살집과 둔중한 무게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젊은 시절의 몸으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새치가 조금 희끗거리는 지금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움푹 들어간 눈으로 아내의 앞에 앉는 것이 고작이다.

“입술은 왜 그래?”

“깨물었어. 아니, 일어서지 마. 의무실에 연고가 있을 거야. 내가 이따가 갈게. 일어서지 말래도.”

“흉터 지면 어쩌려고.”

전직 제국 총사령관, 현 제국 재상, 총사령관이었을 때나 재상일 때나 안나의 남편. 니키 브리엔은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안나는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잘 된거야?”

“잘 되기는 했어. 내 생각보다 백혈기사단장이 더 많은 병력 파견을 약속했거든. 그런데 사유가 썩 유쾌하진 않아. 기사단이 소란스럽더라고.”

“기사단이? 무슨 일 있대?”

“차기 계승자 건.” 니키가 미간을 문질렀다.

“이해가 안 가. 큰딸은 시집을 갔으니까 논외로 친다고 해도, 둘째 딸에게도 계승 지위를 주면 끝나는 일이란 말이야.”

“여보. 피곤한 건 알겠는데, 지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남매에게 동등한 계승 자격을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면서 그래?”

안나는 짐짓 화난 척을 했다. 당연히 남편의 기운을 조금 살려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니키는 근심이 깊어 보였다.

“당신하고는 또 달라. 적어도 누가 아프지는 않았잖아. 기사단장의 아들 예후가 너무 안 좋더라고.”

“뭐? 나아졌다면서. 근위국 보고로는 그랬는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흘 전부터 열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대. 상처는 도통 아물지를 않고 있고. 문제는, 아들이 유일한 계승자라는 거야. 단장이 차기 계승자 지목을 안 하고 세상을 떠나면, 백혈기사단은 자체 토너먼트로 차기 단장을 뽑잖아. 그리고 백혈기사단장도…걱정스러워. 솔직히 나는 그가 수도까지 왔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아. 그런 몸으로…”

백혈기사단장은 이미 나이가 많다. 평범한 사람보다도. 오로지 아픈 아들이 그의 목숨을 붙들고 있다는 낭설이 들리는 이유기도 하다.

“아무튼 기사단은 소란스럽지. 토너먼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테니까. 백혈기사단장은 그런 사정을 눈치채고선 휘하 기사들을 되는대로 파견 보내려고 하더라고. 불유쾌하다고 했던 이유가 그거야.”

안나는 니키의 말을 이해했다.

차기 단장 자리를 생각할 정도라면, 분명 칼밥 꽤 먹은 기사들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변장한 채로 지루한 호위를 이어가라고 시키다니, 처벌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하필 보호 상대가 마왕을 무찌른 용사들이니 거절한 명분조차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불만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걱정스럽네. 릴리에게 아버지를 만나보라고는 했는데, 어쩐지 반응이 영 안 좋더라니, 설마 그것 때문일까?”

“…어? 뭐라고? 설마 그 여자가 백혈기사단장 딸이었어?”

니키는 꽤 놀란 듯했다. 안나는 남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니키는 알았다는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당신, 그 측백나무관 앞에 커다란 광장 알지? 중앙 도서관하고 중앙 식당 있어서 학생하고 교수들 많이 오가는 곳. 그것도 지금 점심시간인데…거기 한 가운데서, 백혈기사단장이 어떤 키 큰 금발머리 여자에게 욕을 퍼붓고 있더라고. 자기 부하들 보는 앞에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즈네르 암호는,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블레즈 드 비즈네르에 의하여 1586년에 발표된 암호기법입니다. 위키백과의 내용을 댓글로 첨부합니다. 물론 뭔지 몰라도 본문 감상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중세 TM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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