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10화 (11/47)

제 10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5)

안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카인은 목을 가다듬었다.

“릴리가 하필 그 보고서를 분석하고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군요.”

“그래. 계획의 일부였다. 너와 릴리가 그 일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해서였어. 하나 더 말해주자면, 그건 버네이스의 안배였다. 나는 그 정도까지 세부적인 내용은 모르고, 또 시킬 수도 없거든. 너의 퇴직을 말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황제가 아니니까.”

안나의 손가락이 책상을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릴리가 너를 그렇게나 깊이 마음에 품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그 아이를 다른 부서로 보냈을 거야. 네가…같은 아픔을 또 겪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난 그렇게까지 모진 여자는 아니란다.”

카인은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물끄러미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인. 다른 요원들이 왜 괴츠를 섣불리 잡지 못했는지 알려주겠니?”

“보복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사실이다. 출신까지 숨겨야 했던 보안국의 보안 체제는 느슨해졌다. 감출 수 없으니 차라리 파편화된 조각만 보여주겠다는 버네이스의 2차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보에몽 1세 선제후나 법무 대신 같은 이가 ‘누가 괴츠를 체포했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가문의 누가 체포했는지 알면, 그다음으로는 보복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아니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사과나무 집 장남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구도 더 깊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뵘과 봄도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감히 물어볼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았지만.

“아는구나. 그렇다면 버네이스가 왜 너를 바쁘게 굴렸는지도 이해할 것이다. 버네이스는 처음부터 괴츠 체포를 너에게 의뢰할 생각이었어. 너밖에는 잡을 수 있는 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교황과의 거래는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고, 나와 버네이스…그리고 내 남편은 마음 앓이를 심하게 해야 했다. 너무 빨리 괴츠를 체포하면, 우리의 그림이 노출되었을 테니까.”

제국의 재상. 황제의 최측근 보좌관. 니키 브리엔이다. 그 말은, 이 모든 일의 뒤에는 황제가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안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줄은 몰랐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 여자라 그런 것이겠지. 카인. 카이로스…고생 많았다. 정말, 그동안 고생 많았어.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닳아버릴 동안, 그냥 보기만 해서…정말로 미안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제국 보안국에 들어온 순간, 카인은 제국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는 정말 ‘무엇이든’ 했다. 칼 쓰는 재주 대신 지팡이 쓰는 법을 익히긴 했지만,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아쉬운 대로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평민 출신이라 무시당하는 게 싫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달렸었다. 유쾌하고 적극적인 뵘과 봄 같은 부하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릴리는, 엉뚱하지만, 많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싫은 아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검 쓰는 재주 하나만큼은 확실하지 않던가.

그 모든 것이 길이었다. 그 모든 것의 뒤에 스승이 있었고, 제국이 있었고, 황제가 있었다. 태양이 나그네의 길을 바라보듯 황실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잘 짜인 길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는, 우연과 사실을 판단할 수 없는, 온전한 회색.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조차도, 제국은 그를 보고 있었다.

인정받지 못한 길을 걷도록, 제국은 은연중에 길을 안내했다.

제국은 대체 무엇인가. 제국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나의 맹세는 유효한가.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카인은 조금씩 깨어났다.

그의 앞에 태양을 짊어진 여인이 있었다. 태양만큼이나 거대한 꿈을 꾸었지만, 꿈은 한순간에 흘러갔고, 이내 그것은 평생의 짐이 되었다.

“카인. 아쉬운 점이나, 후회스러운 일. 없니? 보안국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그런 것들 말이다.”

“…있습니다.”

“그래.” 안나는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퇴직까지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기왕이면 다 털고 갔으면 좋겠다. 새로운 인생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렴. 네가 어떤 길을 걷든, 항상 너를 기억하고 또 추억하마. 사과나무를 키운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네가 키운 사과라면 정말 맛이 좋을 거야.” 안나는 눈을 감았다. 이미 달콤한 사과 조각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벌써 보고 싶어지는데. 꽃은 하얗고, 벌들은 윙윙거리며 달콤한 꿀을 빨겠지. 시간과 함께 사과는 붉게 익어갈 거고. 수확 철의 너는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찬 표정을 지어 보일까…

나에게는 그저, 상상의 저편이지. 수확의 기쁨.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행복. 내가 원한 대로 살아가는 인생 말이다. 나는, 평생…누군가 그런 삶을 이루는 걸 부러워만 하고 살았거든. 사실은 지금도 그래. 그래서 네가 부럽구나.”

안나가 일어섰다. 악수를 청했다. 카인은 황급히 일어나 스승의 손을 잡았다. 안나의 손은 뜨거웠다. 여전히 그녀는, 안에 열정을 담고 있었다.

“이제, 가도 좋다. 행복해지렴. 늘 행복하게 지내렴. 이곳 일은 다 추억으로 남기고. 걸어가렴. 미련 품지 말고.”

이대로? 이대로 끝이라고? 카인의 손에 땀이 차올랐다. 안나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뿌리쳐야 할까? 자신이 매달리는 것인가? 안나의 손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안나는 이런 상황이 조금은 어색한 듯했다. 카인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의 허리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힘든 일이 많겠지만, 이것만큼은 기억하렴. 너는 이곳에 시험 보고 당당히 합격했어. 무사히 졸업했고, 최고 중의 최고만이 들어올 수 있는 보안국의 일원이었지. 자랑하고 다닐 수는 없는 경력이겠지만, 어디에. 무엇을 하든. 네 역량은 충분하단다. 잊지 말렴.”

카인이 힘들어할 때마다, 안나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카인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웠던 말이었다. 그리고 카인이, 릴리에게 그대로 들려준 말이기도 했다.

어떤 때 들려줬더라.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지 알았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알았다면, 너는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네가 모르는 건, 어디에서 답을 구해야 하는가지.’

그 자신이 했던 말이 메아리치듯 돌아왔다.

카인은 의미를 찾고 싶었다.

보안국에서 자신이 했던 그 모든 일들의 의미.

가치 있는 일이었나. 아니면 그저 고만고만한 일이었다.

답을 찾을 곳은 분명하다.

“하나.”

“응?”

“하나만. 한 사건만 더 하겠습니다.”

안나가 손을 놓고 물러섰다. 카인은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말도 조금 더듬었다.

“교수님. 저는…답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했던 일들의 의미. 그게, 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제가 일으킨 일의 여파가 아니라…”

“조약돌이 호수 바닥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듯이?”

카인은 그런 비유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표현하는 법도 모른다.

“네.”

안나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기도 자세니까. 제국인이라면, 교단의 신자라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안나가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카인이 안나와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기도를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로 신께서 제국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안나의 가슴이 부풀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녀조차도 쉽사리 꺼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말인 듯했다.

“카인. 네가…맡아주었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긴 하다. 사실 너를 염두에 두었던 일인지라…네 퇴직 소식을 듣고 막막했었는데.”

“어떤 일입니까?”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

안나는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거창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담백한 진실이리라.

“이 넓은 제국에서 오로지, 너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제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달린 일이야. 모든 이들의 희망이 달린 일이기도 하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제국의 누구도 너의 고향을 모르지. 네가 네 입으로 발설하기 전까지 말이다.

너 정도의 경력. 너 정도의 지혜. 그리고 내가 잘 아는,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모든 조건에 맞는 이는 너뿐이었다. 카인. 하지만 최종 선택은 너에게 두마. 듣고 나면, 돌아갈 수 없다.”

비밀 인가 취급증을 내려고 했던 때 들었던 말이다. 제출하면 요원으로의 생명은 끝이라고. 릴리가 그걸 들고 도망가버린 건. 고드프리가 그를 도발한 건, 이 모든 것들이…누군가의 설계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듣겠습니다.”

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살짝 묻어나올 정도로 거세게. 안나는 동요를 숨기지 않았다.

“제국보안국 제4과 카인 과장.”

“네.”

“자리에 앉아라.”

카인은 그렇게 했다. 안나가 서랍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교황의 편지, 화가의 스케치, 두툼한 보고서가 가득했다.

“마왕을 무찌른 일곱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어린아이 동화책에도 나오는 이야기니까.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자, 최근 유행을 타는 이야기다. 어려운 상황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가.

‘질서와 법은 수도에 있고, 가까운 곳에는 주먹과 고통뿐. 귀족들은 부패하였고, 마왕은 일어서는데, 백성의 곁에 있는 건 오로지 일곱 영웅뿐이라네.’

“그들 중 두 명이 습격당했다. 한 명이었을 때는 우연이라 여겼지. 교황이 어찌나 깊이 은폐했는지, 근위국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두 명이 되자, 근위국이 사건을 포착했지. 교황은 더는 숨기지 못했고.”

근위국은 보안국의 전신 기관이다. 현재 보안국보다도 훨씬 더 암살과 살인을 연마한, 황제의 단검. 그 권한이 너무나 강하고 악명이 강했기에, 해체 후 근위국으로 편입되었고, 새로 창설된 기관이 보안국이다.

“첫 번째는 절제의 사도, 아리우스 수도원장이다. 교황은 그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지만, 동부의 도시 모처에서 발견되었다고 추정한다. 너도 아는…베네루치아 진주 부두의 함선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말이 좋아 함선이지, 사실은 함선으로 위장한 향락선이다.

“알고 있습니다.”

“역시 이건 근위국의 추정이야. 시간은 석 달 전, 그믐밤으로 보고 있어. 입출항 기록을 보면 말이지.

그리고 얼마 전, 역시 그믐밤에, 로렌츠 백작령 근처에서 순결의 기사, 윌리엄 대주교가 당했지. 로렌츠 백작은 5년 전 동부 분쟁 사건 때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이 불편하고, 그 아내가 정사를 도맡아 하고 있고. 백작부인이 대주교에게 신앙적 고백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아리우스 수도원장과 달리, 대주교의 피해 상황은 분명해. 교황의 기사단인 자비기사단 창병 30명, 하인과 고용인을 포함한 17명, 교구 사제 두 명과 수도사 한 명과 수녀 두 명. 그리고 대주교 본인.”

그믐밤. 일곱 용사.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습격이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베네루치아는 외국이고, 향락선에서 일어난 일이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주교의 일행은 50명이 넘어간다. 더구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카인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짚었다.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격당했다면, 적어도 엇비슷한 군사 집단이 움직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끄럽고, 부주의합니다. 누군가는 도망쳐서 피해 상황을 증언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보안국조차 모르는 일을 근위국이 간신히 눈치챘다는 건, 이것 역시 은폐되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제가 아는 한, 그 정도로 뛰어난 살수 집단은 없습니다.”

“살수 집단의 짓이 아니니까.”

안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카인 과장. 희생자는 없어. 그들 모두 살아 있다.”

“…살아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살아 있어.”

안나가 서류를 펼쳤다. 화가의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카인이 보기엔 하나같이 이상했다.

“짓이겨진 풀? 아니면, 해체된 동물입니까? 혹시, 현장의 스케치입니까?”

“사람이다.”

안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카인 과장. 그들은 모두 사람이야. 눈이 뭉개지고 혀는 뽑혔으며 귀에는 쇳물을 부었다. 온몸의 뼈를 부순 다음 억지로 붙여 놓았는데, 의사의 말로는 설령 다시 부러트린 다음 붙인다고 해도 회복은 장담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으깨진 포도. 내팽개쳐진 가방. 바닥이 깨진 잉크병. 갈려 나간 나무토막. 마차에 치인 채 길바닥에 죽어 나자빠진 개일 수는 있어도,

사람일 리는 없다.

“윌리엄 대주교는, 뜻 모를 말을 웅얼거린다고 했다. 웃거나 울거나인데, 의사들은 그가 세 살 아이처럼 군다고 진단했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갈비뼈가 폐에 날개처럼 박힌 채로…그는 살아 있다."

용사들이.

백성들의 꿈과 희망인 용사들이.

쓰러져가는 제국의 등불인 용사들이.

비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누구의 소행인지.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무엇으로, 이렇게 하였는지 진상을 밝혀라. 그게 너의 임무다. 잔악무도한, 악마 같은 놈이…왜 과거의 용사들을 짓이기는지를.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더 망가져서는 안 돼. 감히. 어떤 놈이...제국의 마지막 결속을 끊으려 하는지...밝혀다오."

안나의 터져버린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참아내고 있었다. 견뎌내고 있었다.

"제국을.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사소한 일상에의 희망을. 네가 지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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