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4)
교정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아무 데나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진지한 얼굴로 열띤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보인다.
다른 건 근위대다. 길거리에서처럼, 황실의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외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학생들의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속도를 늦추기까지 했다.
캠퍼스는 오로지 교수와 학생들의 공간이며,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대원칙 때문이다. 황제 본인이 오더라도 이러한 원칙은 지켜졌다. 제국이 지성과 젊음에 바치는 존중이기도 하다.
마차가 본관 정문에 멈췄다.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원이 마차 문을 열었다. 문가 쪽에 앉았던 릴리가 먼저 내렸고, 지팡이를 챙겨 든 카인, 마지막이 안나였다.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안나를 위한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
“두 사람 모두 오래간만이지?”
“예.” “그렇습니다.”
카인도 잠시 옛 기억에 빠져들었다.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교수들은 여전히 나이 들었지만, 정력적이고, 학생들은 어려 보이지만 활기에 넘쳤다.
이유 모를 억울함이 카인의 마음에서 울컥거렸다.
카인은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잠깐, 카인은 학생들이 어린 것이지 내가 나이 든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어린 날의 카인은 되찾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카인은 삶에 찌든 보안국 요원. 그뿐이다.
“참. 릴리?”
“네.”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말이지…백혈기사단장이 이곳에 와 있단다. 측백나무 관 건너 대회의실이야.”
릴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버님, 말씀이십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오래간만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니?” 안나는 부채를 펼쳤다. 자줏빛 천이 펄럭거린다. “딸의 얼굴을 보면 단장도 기뻐할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릴리는 동요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마치 몰래 데이트를 즐기다 발각된 연인처럼 말이다.
“잠시 시간이 있으니, 뵙고 오렴. 다 끝나고 나면 로비에서 기다려도 좋고, 아니면…오래간만에 교정을 산책하는 것도 좋겠구나.”
안나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릴리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갔다.
그 때문에 카인은, 릴리가 자기 서류 가방을 들고 가버리는 걸 말리지도 빼앗지도 못했다.
“그래…옛날 생각나는구나. 카인. 그렇지?”
“네.”
“아주 잠깐, 옛날 기분을 더 내어보고 싶은데. 어떠니?”
안나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세상 더 없이 푸근해 보였다.
기이한 일이다. 카인은 자신의 나이 듦이 억울했는데,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안나는 더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좋습니다.”
* * * * *
다른 교수들처럼, 안나도 개인 연구실과 개인 서재가 있다. 개인 연구실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서재는 장서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로 거대했다. 방 한 칸 규모가 아니라 거대한 홀이었다.
책장이 빼곡했고, 학위를 받으려는 학생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책을 정리하고, 낡은 양피지의 먼지를 털어내며 새 양피지에 본문을 옮겨 적었다. 책을 다시 고치는 학생과, 가죽 표지를 교체하는 이들도 보였다.
조교 생활. 카인 역시도 했던 일이다.
일단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학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제국 아카데미는 등록금도 학비도 전액 무료로 운영되니까.
문제는 생활비와 학용품, 잘 보지도 않는 교과서 구입비였다.
수도의 물가는 비싼 편이었고,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은 많았다. 종일 일해도 밥 한 끼 먹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카인처럼 집안 몰래 빠져나온 부류에는 배고픈 나날들이었다.
안나는 그런 학생들을 가만 넘기지 않았다.
“잡일은 당장 그만두거라. 제국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 그럴 힘과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내 도서관을 관리해주렴. 책은 많은데 손은 부족하거든.”
딸랑. 딸랑.
안나는 종을 흔들었다. 추억 속의 종이었다. 저 종이 울리면, 누구나 예외 없이 교수연구실에 모여야 했다. 앳되고도 앳된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점심시간이죠? 오늘은 일찍 퇴근들 하세요. 바구니에 오늘 수당 넣어놨으니 집어 가는 거 잊지 말고.”
“수고하셨습니다!”
빨랫줄의 참새 떼처럼 학생들이 포로로, 날아갔다. 그제야, 안나는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카인은 책상 맞은편의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지팡이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신없지?”
“그래도 활기차서 좋습니다.”
“너도 저랬어.”
안나는 부드럽게 옛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더 믿어지지 않는구나. 왜 그만두려고 하니?”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카인은 멈칫하며, 존경하는 스승을 바라보았다. 안나가 정말로 옛 추억을 뒤적거리고자 부른 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옛 기억’을 말한다. 학생과 면담할 때면, 안나는 여러 번 강조했었다.
강의실 안의 일은 밖에서 말하지 말 것. 교수연구실에서의 대화는 다른 곳에서 말하지 말 것. 안의 일은, 안에서 끝낼 것.
‘비밀 대화를 나누자는 거였구나.’
안나는 전략가였다. 카인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허를 찌르고 들어왔으니. 카인은 시간을 벌려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지. 알아야 하고말고. 버네이스 국장으로부터 너에 대한 보고를 지속해서 받고 있었단다. 평가가 좋던데, 버네이스는 너를 걱정했었다. 의욕이 너무 없다고. 갑작스럽게, 퇴직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을 땐 내 눈을 의심했다.”
그 투덜거리는 노인네가 그런 말을 적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마침 보안국에 볼일이 있기도 했고. 너를 거기서 본 게 나의 행운이었어. 릴리까지 같이 있다니 더더욱. 하늘이 제국을 버리지 않았음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의아한 일이다. 안나는 이유 없는 칭찬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수식은 낯설었다.
길 가다 만난 우연이 그 정도로 거창한 일이었던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버네이스는 네 상사고, 릴리는 네 부하지. 내가 알기로 릴리는 올곧아.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이 염려스러웠지만, 그 아이는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을 아이지. 너에 대해…”
안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한참 웃고 난 다음에야 카인을 마주 보았다.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건, 보안국에서의 네 모습이었어. 어떤 사람은, 윗사람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아랫사람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단다. 동료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또 다르지.”
역시나. 릴리와 아무 의미 없는 수다를 떨고 있었던 건 아니었던 셈이다.
안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했을까. 무엇을 보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카인은 알 수 없었다.
“어떤 나무는 자라다가 휘어버린단다. 어떤 나무는 이유 없이 죽어버리고, 또 어떤 나무는 뒤틀리곤 해. 하지만 넌 그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던, 학생 시절의…카이로스. 그대로였어.”
카이로스. 카인의 본명이다. 그 자신도 잊고 있던 본명이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던 이름.
“교수님.”
카이로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카이로스. 네 결정에 관해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으마. 퇴직 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은 이미 여러 번 들었을 테고, 그런데도 네가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 건, 이미 결심이 섰다는 의미일 테니.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하마.”
“교수님.”
카이로스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안나의 생각과 의도는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카인 아니 카이로스는 일방적으로 벗겨지기만 했다.
심지어 보안국 요원으로의 남은 정체성마저.
카인을 들추고 카이로스를 꺼내려 했다.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치부를 감추는 마지막 넝마마저 걷으려 한다.
카이로스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하고자 하면 하실 수 있습니다. 명령하시고자 한다면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저에게 명령하셨다면, 저는 따랐을 겁니다.”
“카이로스.”
안나의 음성은 차분했다. 카이로스가 흥분을 조금 식힐 만큼.
“카이로스. 그건 황제의 일이란다.”
안나가 일어섰다. 카이로스를 등지고 창가를 향해 섰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에게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황제는 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답을 정하는 사람이지. 가는 길은 그 자체로 답이고, 결정은 결정이기에 옳은 것이 된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답을 알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저했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순간, 나는 이미 황제의 자격이 없었던 거야. 홀로서기를 마음 먹었었다면, 추락할지언정 끝까지 홀로 걸어야 했었는데.”
천재라 불린 여인이다.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카이로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카이로스는 감히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스스로 태양이 되고자 했던 이에게,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 그게 황제의 길이란다. 스스로 답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목적이 되어야 하지. 모든 이가 삶의 의문을 표할 때, 그 답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언제나 정답이어야 해. 틀림은 있을 수 없어. 황제를 모시는 이들은, 오답마저도 정답으로 바꾸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니까. 자신이 틀렸는지도 모르는 채 평생을 옳다 믿으며 살 수 없다면, 황제의 월계관은 교수대의 밧줄이 되어버리지. 난 황제가 무엇인지 안다고 믿었지만..."
하늘을 바라보던 안나가, 다시 카이로스에게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찬란한 태양이 구름 속에서 숨을 쉬듯이.
“아카데미는 나의 새로운 꿈이고, 새로운 제국의 미래였어. 신분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라면 누구나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제국. 하지만 기대만큼 성과가 도통 나오질 않았지. 네가 입학하기 전까진, 난 다시 유학을 가야 하나 고민했었다. 카이로스. 네가 나를 바꿔주었어.”
“…왜 저였습니까?”
“최초의 평민 출신 입학생이었으니까. 나는 거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내가 얼마나 웃음지었는지 몰라.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렇게 웃진 않았었어. 드디어, 제국이 나의 몸부림에 답해주는구나. 제국이 내 뜻을 받아 주는구나...네가 입학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졸업해서 보안국에 자리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었다.”
“저는…교수님. 교수님. 저는…” 카이로스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몰랐다.
“전 몰랐습니다.”
“조약돌은…”
안나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은 모른단다. 자기가 수면에 어떤 파문을 내었는지 모르지. 그저 제 본성대로, 바닥을 향해 가라앉을 뿐이란다. 조약돌이 바라는 건, 그저 고요한 바닥에 가라앉아 안정을 취하는 것뿐이니까.
카이로스. 너는 내 최초의 조약돌이었다.
네 뒤로 더 많은 학생이 들어왔고, 너의 사례를 보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어. 네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내지 않았다면, 나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방금 나간 그 스물두 명의 총명한 학생들은 모두 평민 출신들이야. 너처럼. 네가 시행착오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아카데미와 수도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겠지. 네가 길을 보여준 덕분에, 나는 그 아이들을 돌보는 법에 대해 익혔어.
그러니 네 앞날이 기대되고 관심 가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공허했습니다.”
카이로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카인이 벗겨진 자리에 남은 건, 옛 스승을 찾아온 제자였다.
“제국에 헌신했다고 생각했는데, 제국은 나날이 나빠지기만 합니다. 정말, 정말 제 모든 것을…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생각했는데도 제국은 뒷걸음질을 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허공에서 달리는 것처럼요. 제가 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하다고...그렇게 꺾여갔습니다.”
“괴츠 폰 베어링겐처럼?”
숨바꼭질은 끝났다. 안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카이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니.”
카이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안나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토록 괴로웠다면 왜 말을 하지 않았니. 왜 혼자 속으로 삭이기만 했었니. 하다못해. 나에게라도…나는 너를 보며 행복했는데. 네가 곪아가는 것도 모르고…내가 너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구나...”
죄송합니다. 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안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래도, 이런 말을 들려줄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괴츠는 다시는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할 테다. 그것이 너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된다면…”
“…네?”
카이로스가 무릎을 움켜쥐었다. 안나는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어주었다.
“성배기사단의 손에 인수되었어. 이단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을 거다. 늦어도 한 달 후에는, 교황이 칙령을 발표할 거야. 결투 재판을 벌이거나, 해당 행위를 용인하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는 내용이란다. 괴츠가 어떤 답을 하든, 그는 화형대에서 불타오르겠지. 교황이 정한 바이니, 이루어질 것이다.”
성배기사단.
잊고 있던, 잠시 벗어 던졌던 카인이 돌아왔다. 교황의 친위부대인 성배기사단이 보안국 건물에 들렀던 이유는 바로 괴츠 때문이었다.
남은 퍼즐들이 하나하나 맞춰져 갔다. 날강도 기사들은 더는 결투 재판을 벌이지 못할 것이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이들은 이제 배를 곯다 스러질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했다. 교황이 그런 커다란 선물을 선뜻 제국에 내어주다니. 더구나, 결투법은 교회의 법이 아니라 세속의 법이다.
황제가, 교황이 속세 제국법률에 간섭하는 것을 용인한 셈이나 다름없다.
“교수님.” 카인은 숨을 골랐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법무 대신이 괴츠를 풀어달라 요청하였었습니다.”
“그래.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거든. 버네이스가 시간을 잘 끌어주었다. 조만간 법무 대신은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 재무국에서 움직이고 있거든.”
카인의 등줄기를 따라 찌릿한 전기가 흘렀다. 릴리가 난감해하던 보고서가 떠올라서였다.
『새 병사 고용과 무기 구매에는 돈을 많이 썼는데 부대 유지비는 줄여서…순찰 경비대를 늘려야 했다지만, 정작 타란토에는 산적이 많이 없습니다…』
『날강도 기사 때문이지?』
『네. 괴츠와 같은 이들이 산적들을 자기 쪽으로…산적들이 상비군 혹은 기사들의 휘하에 들어가는 일이…』
『법무 대신께서 물증이 없으면 풀어주랍니다. 즉시…백 명의 귀족들이 탄원서를…괴츠를 붙잡을 명분이 하나도…』
『법무 대신은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 재무국에서 움직이고 있거든.』
“보에몽 1세가 비자금을 조성해 법무 대신을 매수했군요. 날강도 괴츠는 보에몽의 수하나 다름없었고요.”
“타란토 왕국뿐만이 아니란다. 카인.”
교수와 학생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제국의 누이와 퇴직을 앞둔 보안국의 과장이었다.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모든 선제후의 영토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단다. 병사들이 해야 하는 질서 유지를 날강도 기사들이 하고 있고, 대신 선제후들은 그들을 용병처럼 고용하고 있지. 영지 안에 작은 영지를 꾸리는 것처럼.”
그제야 카인은 결투 재판의 진짜 의미를 이해했다. 교황이 결투 재판의 당사자도, 그걸 용인한 자도 이단으로 규정해버리면, 선제후는 날강도 기사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이미 명예도 없는 도적 떼에 가까운 이들은, 당연히 선제후의 영토를 공격할 터. 귀족들의 발목은 묶일 것이고, 위세는 급격하게 수그러들 것이다.
하지만 제국에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다. 교황의 손을 빌려야 했다는 건 분명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
교황이 세속의 법에 간섭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것은, 제국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기를 이겨 나갈 수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제국은 그 모든 값을 치를 생각이다. 그렇다면. 안나는 왜 자신을 릴리와 함께 여기로 데려왔는가.
릴리의 아버지인, 백혈기사단장은 왜 캠퍼스에 있고.
안나는 이 모든 것을 선뜻 알려주는가.
카인은 문득, 릴리가 분석하고 있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괴츠가 터를 잡은 선제후의 영토에 대한 보고서.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