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3)
세상은 넓다. 어디엔가에는 지도책을 펼치고 국경선을 제 마음대로 긋는 것만으로도 일주일 내내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은 역사 수업을 지루해한다. 사실의 무의미한 나열, 암기를 위한 암기, 단조롭고 느긋한 어투의 강사…
거기에 본인이 원해서도 아니고 졸업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면 짜증이 치솟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넓다. 제국 ‘수도’ 아카데미의 ‘제국 역사 개론’ 수업만큼은 언제나 최고의 인기와 평가를 받아 오고 있으니까.
황제의 누나가 직접 가르치는데 강의 평가를 나쁘게 적을 리가 없지 않냐 할 수도 있겠지만, 수도 아카데미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단 한 번이라도 수업에 들어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안나 콤모두스의 수업에 들어온 학생은 세 번 놀란다고 했다.
‘황제의 누나이자 제국의 반역자’라는 살벌한 명성과 달리, 우아하고 가녀린 외모와 겸손하고도 우아한 태도에 한 번.
본인 스스로를 기꺼이 낮추고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점에서 두 번.
자기 수업을 수강한 학생의 이름과 얼굴을 졸업하고 나서도 기억한다는 점에서 세 번이다.
수도 아카데미 졸업생이 우연히 혹은 일부러라도 마주친다면, 안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다음, ‘아우구스티노 안셀, 7년 전 여름 학기 수강생이었지. 미술학부 졸업생이고…올해 안셀 자작령 밀 수확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바쁘고도 풍요로운 날들을 보냈겠구나.’라며 안부를 물을 것이다.
기이를 넘어 기괴할 정도의 기억력과 정보 분석 능력이, 가문 대대로 구전되어 오는 기억술의 힘인지, 안나 본인의 영민함 때문인지에 대해 그녀가 확실한 답을 한 적은 없다. 그저 그녀는 “내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라고만 답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안나와 같은 마차를 탄 카인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 중이다.
안나와 릴리는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중이다. 대부분 안부와 신변잡기, 릴리의 동기 졸업생들에 대한 가십거리들. 덕분에 카인은 두 여자의 시선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릴리의 별명까지도 알고 계셨다.’
아카데미에서는 본명을 썼다. 그리고 카인과 릴리라는 가명은 보안국 입사 후에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안나가 평범한 교수였다면 ‘카인’과 ‘릴리’라는 이름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황실이 보안국 요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카인과 릴리는 직접 ‘지목’ 당했다. 그저 반가워서 옛 제자를 황실 전용 마차에 태웠을까? 카인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는 행동이다.
마차의 목적지를 보니, 그런 심증은 더 확고해졌다.
커튼 사이로 얼핏 보이는 거리는, 황궁이 있는 중심가가 아니었다. 행렬은 구시가지를 지나는 중이다.
‘지금쯤이면 갈림길이 나오겠지.’
곰이 울부짖는 것 같은 거창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성배기사단원들이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기사단 수도 지부가 있는, 수도 대성당 쪽이다.
반면 근위대원들과 안나의 마차는 직진했다. 이 길의 끝에는 아카데미 정문이 나온다.
안나 콤모두스는 여전히 교수다. 강의도 나가고, 전공인 역사학 관련 논문도 쓰며, 역사서 집필에도 몰두한다. 그러니까 안나가 아카데미에 가는 건 출근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카인 자신과 릴리를 굳이 데려가는 이유는…
찰싹.
갑작스럽게, 안나의 부채가 카인의 허벅지를 내리치는 바람에 생각의 고리가 끊겼다.
“그래. 이 표정.” 안나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카인은 조금 맹한 눈으로 안나와 릴리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너 나와 릴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릴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아침 창가에 앉은 새처럼 재잘거렸다.
“첫인상에 대한 대화 중이었습니다. 얼굴과 이름뿐만 아니라 첫 느낌도 기억하면, 보다 기억하기 쉬워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네 첫인상. 독특한 학생이었지. 세상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것 같으면서, 결코 눈은 떼지 않아.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꿈을 꾸는 것 같지.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측하는 사람 특유의 눈이지.
꿈을 꾸는 것처럼, 영혼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래서 한대 톡 때려주고 싶어지는 그런 인상.”
안나가 다시 부채로 카인을 톡, 때렸다. 카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사람이 자기 첫인상을 어떻게 알겠니. 궁금하네. 릴리, 너는 어땠어? 카인을 처음 봤을 때?”
“첫인상 말씀이십니까?” 릴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하지만 미소는 눌리지 않고 더 번져나갔다.
“저도 교수님과 비슷했습니다.”
릴리의 눈은 반짝거렸고, 카인은 조금 불편해졌다.
“그러니까 나를 한 대 치고 싶었다고?”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릴리가 가볍게 말아 쥔 주먹으로 카인의 팔을 때렸다. 때렸다기에는 톡톡 건드리며 미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안나를 웃음짓게 하기엔 충분했다.
“재미있네. 릴리.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학교생활 내내 군인보다도 딱딱하더니, 제법 부드러워졌어. 그래서, 지금은? 첫인상과 비교하면 어때?”
카인은 더더욱 불편해졌다. 안나의 의도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짓궂은 장난인지 아니면 호기심인지.
하지만 릴리가 입을 열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표정 변화는 크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남몰래 많이 웃습니다. 크게 소리 내 웃는 적은 드물지만 작은 미소는 자주 짓습니다.
무심하고 관심 없는 척하며, 말수는 적지만 사실은 뒤편에서 남몰래 챙겨 주실 때가 많습니다. 한 일을 자랑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꼭 필요한 정도만 도와주십니다.
부하들에게는 존경받고, 동료들에게는 사랑과 질투를 받지만, 상사들에게는 인정받는 능력 있는 요원입니다.
또 자신의 위치에서 언제나…”
‘엄마랑 아빠가 왜 좋은지 이유를 백 가지만 대 볼래?’라는 질문을 들은 어린아이 같았다.
안나는 놀라워하다가, 경악하더니, 설마, 설마 하는 기대를 넘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커튼을 열어젖혔고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카인은 그냥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근위대에게 한 대 맞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자기 위치에서 있는 최선을 다하는 타의 모범이십…니…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릴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지 입는 걸 깜빡한 채 길거리에 나온 사람도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진 못할 터였다.
“좀 더워지네. 초여름이라 그런 걸까?” 안나가 연신 옷깃을 여미며 부채를 펄럭거렸다.
“음, 릴리. 항상 좋은 면만 있는 사람은 없어. 오히려 그런 사람은 경계해야 하지. 뒤에 커다란 무언가를 숨기기 마련이니까. 눈에 뭐가 씌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그러니 너의 시각이 균형 잡혀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다시 물으마. 카인에게 아쉬운 점…아니. 아니. 당사자 앞이니 하기가 좀 그렇겠구나. 바라는 점은 없니?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던가, 같이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
릴리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카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있습니다.”
릴리가 카인의 서류 가방을 끌어당겼다.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는 몸으로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뭔데?”
카인은 초조해졌다. ‘그만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릴리는 아마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누나는 ‘왜 그만두려고 하니?’라며 물어올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할 것인가. 서서히 벌어지는 입술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릴리는 전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대련을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대련?” 안나도 카인만큼 의아해했다. “무술과 무술을 겨루는, 그 대련 말하는 거니? 전투 훈련?”
“네. 맞습니다.” 릴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특이하네. 보안국도 어지간한 군사기관만큼 대련과 훈련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카인, 맞니?”
“그렇습니다.”
안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집중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백혈기사단국의 영애와 검을 겨뤄볼 기회를 그냥 날리고 있었다고? 릴리가 나이는 어려도, 기술적으로는 완벽에 가까울 텐데. 적어도 검에 대해서만큼은 네가 릴리에게 배울 점이 많았을 것 아니니.”
카인은 버네이스 국장을 떠올렸다. ‘너 대련 의무 참가 횟수 언제 채울 거야!’ 언제나처럼 고래고래 소리쳤던 기억.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대련 자체를 거의 못 했습니다. 일이 이래저래 많기도 했고…”
“잠깐만. 대련 자체를 하기는 했다는 거구나?”
뵘과는 육척봉으로, 봄과는 레슬링으로, 고드프리와는 박살 난 의자로 겨루었었다. 뵘봄 형제와는 보안국 대련장에서 했고 고드프리와는 뒷골목 술집에서였다. 당연히 후자는 비공식 기록이다. 카인은 다리 찰과상을 입었고 고드프리는 코가 부러졌었다.
“네.”
“검으로?”
“…육척봉과 레슬링으로 했습니다.”
“그러면 작년에는? 검을 썼어?”
황실에 거짓을 고할 수는 없다. 카인은 정직하게 답했다.
“…안 썼습니다. 주먹과 곤봉, 지팡이와 레슬링…”
안나의 입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카인. 너 여전히 검을…”
릴리가 눈치를 보더니 손을 들었다. 안나는 더 말하지 않고,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과장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대련을 제가 요청한 적도 없었고, 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 탓입니다.”
안나의 얼굴이 다시금 미소와 장난기로 젖어 들었다.
“릴리. 난 너의 장점이 솔직함과 대담함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칠 것 없는 올곧은 직진이 네 성격이잖니? 왜 말하지 않았어? 혹시, 입사 후 일정 기간은 대련하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던가? 내가 알기로 그런 규정은 없는데.”
릴리가 고개를 숙였다. 다리를 바짝 오므렸다.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분위기에 취해서…말실수를…”
“정말. 몸만 덜컥 컸지.” 안나가 귀여운 제자의 무릎에 여리고 가느다란 손을 얹었다.
“릴리. 행복해지고 싶니?”
“네?”
“행복해지고 싶냐고 물었어.”
“…네.”
“그러면 행복을 대비하고 맞이할 준비를 하렴.”
황제의 누이. 정당한 황위 계승자. 제국의 반역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수, 두 사람의 스승이 선언했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것만큼이나 행복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단다. 스스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되뇌는 노력. 그걸 해야 해.”
안나는 릴리의 다리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면의 열기를 전해주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릴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표정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릴리. 어떤 사람은, 행복한 결말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보지를 못해. 어떤 사람들은 온종일 실패와 죽음과 좌절과 씁쓸함만을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어. 왜인지 아니?”
“모르겠습니다.”
“남의 일처럼 한 발짝 떨어져 보기만 하거든. 그래서 막상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면 못 견뎌해. 타인의 행복은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본인 자신도 그런 행복이 오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오면 받아들이지 못 하거든.
버거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이게 정말 내 것인지.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지 의심하고 의심하다가 놓쳐버리거나 놔버리지.
하지만 실패와 죽음과 좌절과 씁쓸함은 잘 다룬단다. 종일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이 올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미리 준비하기 때문이야. 오히려, 그런 익숙한 무력감에 안도하는 슬픈 사람들도 있단다.”
어째서인지, 카인은 안나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은 릴리를 보고 있었지만.
“훈련해야 해. 슬픔과 눈물만큼이나 기쁨과 행복을 생각해야 해. 그래야 언제 올지도 모를 행복이 아니라 눈앞의 행복을 붙잡을 수 있단다. 체념하지 마. 스스로 놓아버리지 말라고. 무슨 일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네. 절대로,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릴리가 스승의 손을 꼭 붙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카인을 향해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물론 잠시 후에, 스승의 손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히며 손을 놓았지만.
“초여름은 초여름이야. 그렇지?” 안나가 꿀에 재운 레몬이라도 한 조각 먹은 것처럼, 새콤달콤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 모두가 사랑에 빠져드는 계절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란다.”
릴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하면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가릴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카인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는 것도 모른 채로.
이윽고, 행렬이 아카데미의 정문을 통과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연재분인 안나 콤모두스와 제국 전쟁 / 용사에 대한 부분은 공지 외전으로 통합해 묶어 올렸습니다. 감상에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작중 내용에서 변경되거나 삭제되는 부분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