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4화 (5/47)

제 4화

희망퇴직 (4)

이틀 동안 카인은 꽤 바쁘게 지냈다.

간부회의에 끌려가 일 처리를 대체 어떻게 하느냐며 공개 질의도 받아야 했고, 진술서도 마저 써 내려가야 했으며, 보안국 건물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는 법학 교수들, 그리고 대학원생들과 면담 날짜도 잡아야 했다.

법학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은 카인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어했다. 이유가 있다.

보안국은 제국에 봉사하기 위한 기관이며, 황제의 지휘를 받는다. 황제의 권력에 따라 보안국의 권력도 제멋대로 요동친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제후를 비롯한 귀족들은 보안국에 대해 양가감정을 품었다.

보안국의 막강한 권력 즉 제국 전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한은 탐내었지만, 그 권한을 이용해 자신들을 염탐하는 건 싫어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보안국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길들이려’ 했다. 가장 우아하고 고상한 방법은 바로 고소였다.

고소의 내용은 쪼잔하면서도 참신했고, 황당하면서도 ‘리걸 마인드legal mind’로는 말이 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보안국에 걸려오는 소송은 법률상 논쟁이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논쟁의 여지를 다툴 수 있다는 건 곧 좋은 논문거리라는 뜻.

한 달 정도를 기다리면 평범한 논문 하나를, 석 달을 기다리면 학회에 보고할 만한 논문 하나를, 여섯 달을 기다리면 졸업 논문 하나를 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과장 하나도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보안국 덕분에 제국의 법, 행정, 정치학 교수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생들에게는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적어도 창작의 고통이나 소재의 빈곤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금광이 저기 있으니 숟가락만 들고 가면 되니까.

제국의 법률은 나날이 세련되었고, 정치 이론은 발전해 나갔으며, 행정 쪽은 해마다 교과서를 통째로 바꾸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쇄업자들도 보안국의 혜택을 보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법률서와 교과서는 나날이 두꺼워졌으니까.

덕분에 카인은 자신에게 쏟아진 온갖 고소사건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기계적인 절차만 따라가면 되니까.

진술서를 써서 총무과에 제출하면, 총무과에서는 민감한 부분이나 지명 혹은 인명을 싹싹 지운 다음, 문밖에 서 있는 대학원생에게 건네줄 것이다.

그러면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럴싸한 법률 자문 회신이 도착한다. 그걸 그대로 제국 법원에 제출하면 소송은 끝난다.

특히 이번 건은 연륜 있는 교수들마저 관심을 보인다. 제국의 형사결투법은 법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득인가, 손해인가? 형사결투법을 악용한 기사들에 내려진 제국 내란죄 적용은 타당한가? 등등.

퇴직한다면, 꿈도 꿀 수 없는 혜택이다. 어차피 보안국은 퇴직하겠다고 해서 바로 퇴직할 수 있는 기관도 아니다.

퇴직한 요원이 생생한 정보를 들고 외국이나 다른 귀족에게 붙는 걸 피하고자, 일 년 동안은 제국 모처의 ‘안전가옥’에 출근해야 한다. 알고 있는 정보가 구식이 될 때까지. 물론 다른 용도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소송은 여섯 달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카인에게는 무혐의가 내려질 것이고, 괴츠는 풀려날 것이며, 돈은 많지만, 평판 나쁜 이들은 합법적으로 돈을 뜯길 터다. 법률가들은 행복해하고, 새 논문이 쏟아질 것이며, 인쇄업자들은 나날이 호황을 맞이할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지금 쓰는 진술서를 제대로 마무리해야 한다. 제국 보안국 4과 사무실에서, 카인은 글쓰기에 집중했다. 진술서는 아직도 백지였고 그는 이름자조차 쓰지 못했다.

쓸 수가 없었다. 펜을 대려고만 하면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결국, 카인은 한숨을 내쉬며 잉크병에 펜을 집어넣었다. 의자에 몸을 젖히고 선잠에 빠져들었다.

5분이나 잤을까.

“제국보안국 4과, 카인 과장 맞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굵고 묵직한 중저음이다. 카인은 답했다.

“응.”

“너를 즉결심판에 부친다.”

아까 목소리와 똑같았는데 억양이 미묘하게 달랐다. 백구두와 흰 구두 정도의 차이다. 카인은 무심하게 답했다.

“왜.”

“왜기는 왜야, 보너스를 받았으면 한 잔 사셔야지!”

으악 소리 한 번 낼 틈이 없었다. 우락부락한 남자 두 명이 카인의 몸을 잡아끌고 껴안았다.

“아이고, 형님! 괴츠놈 잡았다면서요! 역시 우리 형님이야!”

“이게 얼마 만입니까, 형님! 살 더 빠졌네! 형님! 벌금은 맥주 한 배럴에 돼지 넓적다리 구이 다섯 접시 정도로 봐드릴께!”

똑같은 목소리가 앞뒤에서 들리는 바람에, 카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거 놔, 이 새끼들아! 어지러워!”

역효과였다. 남자들은 카인을 더 격하게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형님이 드실 게 없어서 나이를 잡수셨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아우야? 얼마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우습게 받아넘기셨는데!”

“그러게 말이다, 아우야! 나이는 자고로 술로 씻어내는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왜 네 아우냐?”

“내가 할 소린데?”

두 사내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카인이 팔꿈치로 녀석들의 명치를 쓰다듬은 탓이다. 물론 사내들의 두툼한 근육에는 조금의 타격도 가지 않았겠지만, 쌍둥이 형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엄살을 부려댔다.

카인은 왼쪽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밀짚 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통통한 얼굴.

“뵘.”

오른쪽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밀짚 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통통한 얼굴.

“봄.”

뵘과 봄. 쌍둥이 요원이다. 중부 미르덴부르크가 고향으로, 질 좋은 석탄광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둘 중 누가 형인지는 모른다. 서로서로 형이라고 우겨대니까.

“언제 왔냐?”

“방금!” 뵘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북부에서 막 돌아왔지. 아이고, 고산지대에서 얼어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덜덜 떨면서 본청 돌아왔더니 와, 다들 형님 이야기데?”

“괴츠놈 잡은 이야기나 해 봐요! 뭐로 잡았어요? 검? 지팡이?”

카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형제를 바라보았다.

“숫돌이가 아무 말 안 하던?”

뵘과 봄이 눈을 마주치며 피식거렸다.

“숫돌이를 아직도 몰라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라면서 입 딱 다물던데요.”

“살짝 떠봤는데 ‘작전 책임자가 과장님이니, 저에게 듣는 것보다 과장님에게 듣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라더라니까. 무슨 애가 황궁 성벽보다 입이 무겁다니까.”

카인은 내심 기특하게 여겼다. 제국 요원의 미덕은 침묵이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릴리 요원의 침묵은 거의 함구증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어쩌면 백혈기사단장 특유의 가정교육법인지도 모른다. 상사에게 절대복종. 상명하복 정신. ‘그렇다고 애를 태엽 기계처럼 키울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건 그렇고. 형님. 숫돌이한테도 밥 한번 안 샀다면서요?”

뵘이 힐난했다.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누구한테 밥을 사.”

“아니, 형님. 거 너무하네. 숫돌이가 형님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잖아요? 아까 숫돌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딱, 차렷 자세하고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라면서 헤실거렸다고요. 이렇게…”

“아으, 야. 좀. 표정까지 따라 할 건 없잖아.”

봄이 뵘에게 주먹을 날렸다. 당연히 뵘은 가뿐하게 피했다. 하지만 봄 역시, 은근한 어투로 떠보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형님. 우리 숫돌이가 어때서 그래요? 집안도 빵빵하지, 가슴도 빵빵하지, 엉덩이도 빵빵하지. 뭐가 문제에요?”

“볼살도 좀 빵빵하잖아.”

뵘이 맞장구를 쳤다. 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야, 저거 다 젖살이야. 스물두 살, 아무리 안 되어도 다섯 살이면 다 빠져. 쟤 지금 스무 살이잖아. 형님, 혹시 형님보다 키 큰 여자 싫어해요?”

“아니.”

“그럼 형님보다 나이 어린 여자 싫어해요? 여덟 살 차이가 부담스러워?”

“아니.”

“아니, 그럼 뭐가 문젭니까?”

“너희의 그 파멸적인 언어감각.” 카인이 팔짱을 끼었다. 뵘과 봄이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아니, 왜요. 이거 북부 애들한테 되게 잘 먹히던데? 제국에서 10년 전에 유행했던 개그가 거기서 잘 먹힌다니까? 우리도 사전 교육 다 받고 간 거라고요.”

‘침투 임무였겠지.’ 카인은 생각했다.

북부 공화국들이 연합의 낌새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최근에 들려왔었다. 뵘과 봄은 아마 공화국에 연줄을 만들러 갔을 것이다. 정보원을 모으고, 친교를 맺고…한 달짜리 임무니, 크게 부담스러울 일도 없다.

“형님. 그림 나오잖아요? 제국 개국공신이자 검술명가인 백혈기사단국 수장의 둘째 딸과, 앞길 창창한 제국 보안국 엘리트의 혼인.”

“미친놈.”

“거. 애가 좋다고 할 때 빨리 장가들어요. 숫돌이 같은 애 드물어요. 입도 무겁고. 고집도 세고. 그러면서도 요령 안 부리고. 속은 깊고 뜨겁죠. 저런 애가 마음 돌려먹으면, 와. 뒤도 안 돌아봅니다. 내가 저런 여자에게 차여봐서 잘 알아요.”

“미친놈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인은 서랍을 드르륵 하고 열어젖혔다. 화폐가 든 지갑을 들어 올렸다.

“너희 말투는 아무래도 술과 고기로 다스려야겠다. 야, 뵘, 어디 가!”

뵘이 냉큼 달려나갔다. 봄이 히죽거렸다.

“두 달 만에 부서 회식인데 숫돌이도 데려와야죠. 당연하잖아요, 형님?”

말릴까. 하다 카인은 별말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퇴직 이야기는 맨정신으로 하기엔 뭣하다. 적당히 취하고, 적당히 배불리 먹인 다음에 말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 * * * *

번화가 식당들은 방음이 잘 되는 편이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단골들의 취향을 맞춰서 그런 것은 아니고, 원래 요새와 무기고 혹은 화약고로 쓰였던 곳에 자리 잡은 탓이다.

벽은 두껍고, 천장은 낮지만, 화덕과 계속해서 들어오는 손님들 덕분에 열기를 후끈하다. 4인실을 차지하고 앉은 4과 사람들에게도 온기가 들어올 정도다.

“그러니까, 우편마차에서 문제의 편지를 뜯었어요. 살금살금. 몰래.”

뵘이 잘 익혀진 돼지고기 넓적다리를 집어 들었다. 흑맥주와 함께 익힌 것으로, 잡내는 가열된 알코올과 함께 날리고 흑맥주 특유의 알싸한 맛으로 느끼함을 잡은 요리다.

“그런데 안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아세요? ‘이 편지 안에 벼룩이 한 마리 들어 있어. 만약에 벼룩이 없다면 그건 누가 열어봤다는 뜻이야.’ 미치는 줄 알았어요. 희미한 달빛에 개봉한 거라서 벼룩이 있기나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옷 죄다 벗고 다 뒤졌는데 벼룩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짚단 뒤져서 한 마리 잡아넣었죠. 근질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푸훗.”

처음으로, 숫돌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짓던 그녀다. 봄이 히죽거렸다.

“야. 웃기지? 더 웃긴 거 알려줄까? 너도 내년이면 웃통 까고 벼룩 잡고 다닐걸? 물론 그게 북부일지 동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 어쩌면 서부나 남부일지도 모르고.”

“내후년이야.” 카인이 정정해주었다. “숫돌이 온 지 육 개월밖에 안 지났어. 외국 파견 임무는 적어도 일 년은 굴러야 해. 그전까진 제국 내 임무 수행하고.”

“그러고 보니 이번이 숫돌이 첫 임무였죠? 수습이긴 했지만. 어땠어요?”

무심결에 대답하려면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숫돌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 잘했어.”

자기도 모르게 카인은 중얼거렸다. 숫돌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뵘과 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이, 형님. 재미없게 왜 이러시나? 야. 숫돌아. 네가 말해 봐. 너 솔직히 잘 한 거 같아, 못 한거 같아? 객관적으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뵘이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겸손의 뜻이야?”

“아닙니다. 저는 괴츠 체포 작전에서 크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과장님께서 다 하셨고, 제 임무는 감시가 전부였습니다.”

“그래. 부족하긴 했지. 이발하고 면도는 잘 못 하던데.”

카인이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숫돌이는 이제 귀까지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어우, 야, 야! 무슨 애가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 농담하신 거잖아. 풀어. 풀어. 한잔해. 자, 4과를 위해 건배!”

뵘이 선창하자 봄이 잔을 들었다. 카인과 숫돌이도 잔을 맞춰주었다. 카인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언제 말을 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그건 그렇고. 숫돌아. 그…말이다.”

뵘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숫돌이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카인은 다시 불안해졌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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