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희망퇴직 (1)
로렌츠 백작령 사건으로부터 이 주일 후. 제국 남부 소도시, 막시부르크.
별 볼 일 없는 도시라고 해도 햇살은 찾아온다.
흙바닥 길에 움푹 팬 바퀴 자국을 따라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지나간다 해도,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딸꾹거리며 손가락으로 이를 쑤신다고 해도,
또 어느 식당 나무 문 너머로 사람이 하나 튕겨 나온다 할지라도.
제국에 공평하게 찾아오는 건 햇살뿐이다. 질서도 규칙은 아니다.
2m 밖으로 굴러간 남자는 누가 봐도 노인이었다.
아이고, 세상에 하며 주변 행인들이 달려들었지만, 노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일제히 손을 놓고 물러났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늙은이의 발치에 장갑이 하나 뚝 떨어졌다.
“결투를 신청하노라.”
장갑을 내던진 사내는 키가 2m는 넘어 보이는 거한이다. 밤송이처럼 자라난 수염이 빼곡하다. 작다 못해 살에 파묻히다시피 한 작은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노인의 허벅지에 댄다면, 불행한 노인은 침대를 끼고 살아야 할 정도의 근육질 덩치였다.
“사, 살려주시오.”
“결투를 받아들이겠는가?”
노인은 턱을 덜덜 떨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 누구도 노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수전노. 돈벌레. 죽을 때도 돈과 함께 묻힐 지독한 노인으로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행인들은 분개했다. 노인이 한번 사기에 된통 걸리거나 집에 불이 나거나 하는 온건한 방식을 기대했지, 날강도 기사에게 맞아 죽는 식의 결말은 아니었다.
“이봐. 할아범.” 거한이 몸을 굽혔다. “당신이 내 발을 먼저 밟고 가지 않았소. 사과하라고 했더니 무시하고 가버렸지. 이건 제국 기사인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바요. 그래서 결투를 신청하겠다는데, 그게 문제라도 되오?”
거한이 왼팔의 어깨받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분명히 제국 기사를 뜻하는 백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보이는 각도에 따라 테두리의 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분명한 진품이었다.
물론, 어깨받이 자체를 훔쳐 착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막시부르크 촌구석 사람들이 그런 의심까지 할 수야 없다.
“사, 사과했잖소! 몆 번이나 허리까지 굽혀 사과했는데도 나를 내던져서…!”
“나는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지 빈말을 말하지 않았소만.”
“내 재산의 전부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소!”
“내 발을 망치려 들었는데 내가 그 정도는 받아야지.” 거한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것 봐. 나는 전쟁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야. 그런데 발을 다치면 무슨 재주로 싸우겠나?”
노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
“응?”
“반 주겠소. 절반. 그 이상은…”
거한이 이를 갈며 노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끅…”
“남자답게 붙자고. 남자답게. 네까짓 놈의 돈 필요 없어. 그냥 여기서 결판을 보자. 제국의 결투법령에 따라서, 너는 대신 싸워줄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네가 원한다면 나는 상자 안에 들어가서 두 팔만 내놓은 채 싸우는 손해 역시 감수할 수 있다.”
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상대는 ‘괴츠’다. 악독한 기사. 기사라는 이름의 개망나니. 돈을 준다면 깡패 밑에라도 기어들어가는 돈에 미친 놈.
하지만 가장 악독한 짓은 바로 이런 식의 ‘결투’ 였다. 오래 전부터 눈여겨 본 이에게 시비를 건다. 지금처럼, 노인이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발을 슬쩍 내밀어 일부러 발을 밟히는 경우다.
그 다음 자신이 기사라는 것을 들먹여 배상을 요구한다. 배상금을 내놓으면 합의라 칭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욕당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결투를 청했다.
결투 중에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괴츠를 꺾을 수 있는 기사는 수도에서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강도짓을 하면 괴츠 자신에게도 피해가 갈 것임을 알았던 그는, 평판이 나쁘고, 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 힘이 약한 이들을 물색했다.
이 노인 같은 경우가 그렇다. 누구도 그를 대신해 싸워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돈…돈을 주겠소!”
노인이 소리쳤다.
“사 분의 일, 내 재산의 사 분의 일이오! 자식과 아내가 돌림병으로 죽고 알뜰살뜰하게 끌어모은 돈이라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삼 분의 일을 주겠소!”
기사 괴츠가 팔짱을 끼었다. “셋 셀 때까지 명확한 뜻을 밝히지 않으면, 결투를 승인한 것으로 보겠다.”
“절반! 절반을 주겠소!”
“둘.”
괴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했다.
평생 동정한 적 없는 노인의 편을 들을 것인가, 그 노인이 대낮에 합법적으로 맞아 죽는 걸 그저 지켜 볼 것인가?
저 노인이 누군가의 손에 맞아 죽을 정도로 나쁜 인간이었던가?
“하나!”
괴츠의 손이 노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때였다.
“내가 하지.”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괴츠의 안 그래도 작은 눈이 가늘어졌다.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보는 놈이었다. 물론, 괴츠도 이곳에서는 이방인이지만, 이 주일에 가까운 사전 조사 동안 괴츠는 부하들과 함께 이 마을에 대한 기초 조사를 끝낸 후였다.
이 노인이 모두로부터 미움받는다는 것도 알았고, 이런 별로 볼일이 없는 마을에 강자가 없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뜬금없이 처음 보는 무인이 걸어 나온 것이다. 날강도 기사라고는 해도 전쟁터에서 밥을 벌어먹는 재주가 있던 괴츠다. 걸음걸이. 복장. 자세. 거기에 무장까지 갖춘 걸 보면 안다.
가슴, 배를 보호하는 브레스트 플레이트. 어깨받이가 없는 걸 보니, 자유로운 팔의 움직임을 선호하는 놈일 듯싶었다.
턱받이가 달린 셀릿 투구. 투구라고는 하지만 속 깊은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길쭉한 눈구멍을 뚫어 놓은 모양새다.
안쪽에는 갈색 가죽 상하의를 입었는데, 무두장이 집 장남이었던 괴츠는 그 가죽이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잘 찢어지지 않는 물소 가죽으로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즉. 더럽게 희귀하고 비싸다.
허리춤의 검은 흔해빠진 표준 제국검이다.
두 손으로 쥐기엔 약간 짧고 한 손으로 쥐기엔 조금 긴 애매하게 긴 손잡이. 끄트머리의 둥근 폼멜. 다만 균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잡힌 몸체.
괴츠 자신의 검과 같은 종류다. 그렇기에 괴츠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놈의 오른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지팡이다.
누가 봐도 지팡이였다. 종자가 훈련할 때 쓰는 육척봉도 아니었고 창 훈련용으로 쓰는 스태프 종류도 아니었다.
다리 아픈 노인이 쓸 법한 90cm에서 1m 사이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다. 쇠로 띠를 두르긴 했지만.
“다리도 멀쩡한 놈이 지팡이는 왜 짚고 다녀?”
괴츠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의 결투법령에 따라서.” 사내는 읊조렸다. “너는 대신 싸워줄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네가 원한다면 나는 상자 안에 들어가서라도 싸워줄 수 있다.”
원문은 이것보다 길고 복잡하지만, 괴츠는 이를 악물었다. 저 앞의 놈은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감히, 괴츠를.
“하지만 네 사지는 멀쩡해 보이고, 난 상자 안에 들어가는 건 안 좋아하거든. 술통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해. 그러니까 페널티를 짊어지겠다.”
“무슨 페널티?”
딱.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린다.
“지팡이로 싸워주마.”
“미친놈이냐?”
괴츠는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칼이나 뽑아. 검 대 검으로 겨룬다.”
“지팡이.”
“미친놈은 결투법 적용 대상 아닌 거 알지?”
“지팡이.”
“별 병신 같은…”
"지팡이."
괴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이런 미친놈이 하나씩 있다. 이런 놈은 때려 잡아봤자 맛도 안 나고 가져갈 것도 없다. 운수 더럽게 걸렸네, 생각할 즈음.
“겁나냐?”
지팡이 사내가 대뜸 물어왔다. 괴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하긴 겁날 만도 하겠다. 노인네가 발 한번 밟았다고 발등 부러질 걸 걱정할 정도라면, 네놈의 뼈는 땅에 누워 계실 너희 부모님 것 보다도 허약하단 소리 아니냐.”
“너 지금 뭐라고…”
“귀까지 먹은 걸 보니 이미 갈 때는 지났군. 안되었지만 막시부르크는 가난한 도시다. 무료 급식소는 적어도 엥겔부르크는 가야 할 거라고. 네가 거기까지 걸어갈 수나 있다면 말이겠지만.”
“이 개새끼가!”
괴츠가 분노했다. 하지만 사내는 지팡이로 땅을 짚을 뿐이다.
“가축은 제국법 결투 적용 대상 아니다. 개도 마찬가지지.”
“칼 뽑아! 아니, 지팡이라도 상관 없다. 좋아, 받아 주마! 오늘 네 놈의 해골에 오줌을 싸 줄 테니까!”
“어허. 기다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괴츠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지팡이 사내가 노인을 가리켰다.
"아직 날 고용하지 않으셨잖아. 그러니까 착하게 앉아서 기다려. 사람 물지 말고?"
개가 되어버린 괴츠는 광분했지만, 행인과 노인 모두가 괴츠를 보며 두려워하지만, 지팡이 사내는 태연하다.
“영감. 사시겠소, 안 사시겠소?”
"당신, 이길 수는 있소?"
노인이 침을 삼켰다. 지팡이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감님. 계산 좀 해 봐요. 내가 물러나면 당신은 저 날강도 기사한테 죽어요. 전 재산을 바치고 살아남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대신 굶어 죽으시겠죠. 대신에 저를 고용하면, 영감님은 적어도 재산 절반과 목숨은 건진다 이 말입니다. 제가 죽든 이기든. 계산이 안 되십니까?"
노인은 이해했다. 지팡이 사내가 허리춤의 가방에서 돌돌 말린 서류와 잉크병, 깃털 펜을 꺼냈다.
“거기 서명하시고. 액수 정확하게 적으십쇼. 글 읽을 줄 모르시면 그냥 잉크병에 손가락 넣고 지장 찍으셔도…”
“읽을 줄 아오!”
“그러면 액수 정확하게 쓰세요.”
구시렁거리던 노인이 서류를 읽어나갔다. 읽어나가던 노인이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충격을 받은 노인이 얼빠진 눈으로 지팡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가 입가에 손가락을 대었다.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서명했다.
“계약 완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팡이 사내가 투구를 벗어 던졌다. 철컹. 허리춤의 검집까지 풀어버렸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호리호리한 얼굴이 드러났다. 미남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매는 또렷하다. 사냥매의 눈이다.
지팡이 사내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 통 뛰었다. 괴츠가 목을 우두둑, 꺾었다. 두 사람은 길가 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지팡이 사내가 조금 강단 있어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저기. 죄송한데, 돌멩이 하나만 던져 주십시오. 뭔지 아시죠?”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약돌을 집어 올렸다. 법령에도 적혀 있지만, 문학이나 노래에도 자주 나오는 상식이기도 하다.
결투는 공증인이 있어야 한다. 길 가던 행인도 무방하다. 그리고 행인 중 한 명이 공정한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조약돌을 결투자 사이에 던지는데, 바닥에 돌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결투는 시작된다.
지팡이 사내와 괴츠가 20미터 간격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약돌이 살짝 떠오르다가.
톡.
뜻밖에도 괴츠는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 칼을 비스듬히 앞에 내민 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지팡이를 들고 있고, 자신은 표준 양손검을 들고 있으니 먼저 덤벼들 이유가 없다.
반면 상대는 그냥 지팡이를 짚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진 않았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왼손으로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으니.
“그런 소녀 가슴으로 잘도 살아오셨군. 전쟁터에서 시체 매 노릇이나 하고 살아왔던 거 아냐? 덩칫값도 못 하는 놈이로군.”
행인들이 피식거렸다. 괴츠의 이마에서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그는 자제했다. 방심하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이런 도발에는 익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른손과 허리, 양 허벅지의 근육이 울부짖는 것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당장 뛰쳐나가서 저 오만불손한 놈의 목을 쳐버리자고.
오른손. 허리. 허벅지. 지팡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안간 달려들었다. 정직하다 못해 멍청하다 싶을 정도의 각도였다.
괴츠의 정면.
똑바로.
괴츠가 고함을 지르며 허공을 가로 베었다. 무게중심을 몸에 둔 안정적인 베기다. 일격보다 견제에 중심을 둔 것이다.
지팡이 사내놈은 몸을 속여 검을 피해냈다. 예상한 대로다. 투구를 벗고 검집까지 풀어내며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괴츠는 자유로운 왼손의 주먹을 내질렀다.
전쟁터에서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다. 오른손의 검에 시선을 붙들게 한 다음, 왼손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기술.
“뒤져라!”
뭔가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괴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팡이 사내놈의 얼굴을 향해 뻗었는데. 놈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면상을 향해 날아가야 했던 것이, 놈의 귓불 옆을 스쳤다.
‘읽혔다고?’
놀란 괴츠가 고개를 숙였다. 지팡이 사내가 아래에서 팔을 쳐올렸다. 지팡이의 첨단이 턱을 향했다. 괴츠는 턱을 끌어당겼다.
빠각.
체구 덕분인지. 고통에 익숙해진 몸 덕분인지. 괴츠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대신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뒤로 뛰었다.
“정타로 들어갔는데.”
지팡이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턱을 긁적거렸다.
“더 맞자.”
괴츠의 양쪽 무릎이 꺾이는데 일 초. 무릎을 꿇으며 몸이 수그러드는 데 일 초. 빡, 소리와 함께 이마가 깨지는 데 일 초, 턱으로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데 일 초가 걸렸다.
괴츠가 뒤로 넘어졌다. 지팡이 끄트머리에 맞은 목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꺽, 으끅 소리가 고작이다.
“망나니 기사 괴츠 폰 베어링겐. 제국 내란 방지법에 따라 네놈을 체포한다. 법령에 따라 네놈의 모든 재산은 압류될 것이며, 네놈의 부하들도 재판받게 될 것이다.”
“네…네놈 뭔데…제국 기사를...”
괴츠는 고개를 들으려 애썼다. 지팡이 사내가 칼집을 들어 보였다. 제국 기사인 괴츠는 그 칼집의 문양을 알아보았다.
한 마리는 숨을 거두고, 한 마리는 고개를 쳐든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방패. 그 아래 그려진 횃불.
보안국의 문양이다.
“공무원이다.”
마지막 순간, 괴츠는 옆 건물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을 등진 두건을 쓴 부하가 보였다.
“쳇.”
다행히 괴츠는, 부하가 손가락을 질겅거리는 것까지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