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0화 (1/47)

제 0화

깊은 잠

달이 실눈조차 감아버린 밤은 시끄러웠다.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으나 들리는 것은 많았다. 방 안에 꼼짝없이 갇힌 사내가 복도의 상황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저,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고…저희를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옵시고…”

떨리는 손으로 기도를 올려보지만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다.

복도에서 구령 소리가 들리고, 경비병들이 집결한다.

함성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올라가다가 뚝 끊어진다. 벼랑에서 떨어지며 비명 지르는 이들처럼 그들 역시도.

쿵. 쿵. 쿵.

그리고 나면 둔중한 쇳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다.

망자를 묻을 때마다 울리는 종 말이다.

쿵. 쿵. 쿵.

오금이 저려오지만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관성 덕분이다.

군인들이 지루한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이성이 마비되는 그 순간에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대주교 역시 그리하였다. 기도가 그에게 힘을 주었다. 뚱뚱한 몸을 질질 끌며 촛불에 불을 붙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벽장을, 자꾸만 미끄러지는 고리를 잡아당긴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양초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축성되지 않은 것들이다.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으며 대주교는 눈을 감고 축복을 내린다.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꾀죄죄한 평민의 아이가 내민 나무 조각상에도 축복을 내려준 적이 있다. 역병 때문에 피딱지로 뒤덮인 아이였다.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그래도 대주교는 웃으며 기도해주었었다.

눈이 호수보다도 푸르고 맑은 귀족 영애에게도 축복을 내렸었다. 실팍한 가슴이 건방질 정도로 까불거려서 눈총을 줄까 하다 겨우 참았었다. 금발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월귤 향이 피어올랐었다.

전사에게도. 이단 심문관들에게도. 사제와 수녀와 수도자들에게도 수없이 했던 축성이다.

이번에도 관성이 그의 입술을 움직여주었다. 대주교의 몸은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방의 곳곳에 촛불을 세웠고, 재빠르게 불을 붙여 나갔다.

그러나 부족하다. 대주교의 방은 그의 권위만큼이나 넓고 높다. 그래서 대주교는 커다란 거울을 깨트렸다.

교황에게 하사받은 물품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접어 두고, 허둥지둥 옷장을 열어 옷을 있는 대로 끄집어냈다. 깨진 거울을 감싸 구석을 비췄다.

마지막 거울을 놓기가 무섭게, 문틈 아래에서 검은 연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그림자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빛을 뚫지 못했다.

발소리와 비명이 점점 더 가까워져 왔지만, 대주교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그는 안심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이니.”

- 그래. 그렇지.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대주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비웃음 소리. 낄낄거리는 소리. 조롱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림자는 모두 걷혔는데. 방안 어디를 보아도 그림자가 생길 만한 곳은 없는데.

- 네가 빛이라면 그렇겠지. 대주교.

“아. 아아…”

대주교는 탄식했다.

방 안의 모든 곳은 밝았다. 대주교 본인을 뺀다면. 빛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기 몸이었다. 두 발 사이에, 히죽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허연 이빨, 깜빡거리는 눈, 맴돌이.

마왕의 늑대 떼가 그리하였듯이.

그것들은 자신들의 머릿수와 송곳니와 턱을 과신하지 않았다. 마왕처럼이나 그것들도 주의 깊었으며 탐욕스러웠다. 사냥감이 약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사냥감 자신의 두려움이, 제 목을 조르고 제 손목을 꺾고 제 발목을 물고 늘어지는 그때를.

대주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처럼 두 다리를 뻗었다.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외웠다.

“저희가 행한 악덕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러나 이미 드리워진 그림자는 대주교의 귓전에 속삭인다.

- 알고 있지, 대주교? 두려움은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과 똑같아. 병아리 혼자서는 알을 깨고 나올 수가 없지.

무시했다. 무시해야 한다. 그림자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끝이다. 대주교는 눈꺼풀을 꽉 짓누르며 기도문에만 집중한다.

“저희의 선행만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 바깥에서 어미 닭이 부리로 쪼아 주어야 해. 그러니 바깥의 것이 두렵다고 해도, 대주교 자네의 마음이 떳떳하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대주교의 방문이 흔들렸다. 눈을 번쩍 뜬 대주교가 숨을 몰아쉬었다.

쿵. 쿵. 쿵. 방문이, 방문이 거세게 흔들린다. 바깥의 그것이 문을 거세게 밀친다.

‘뚫릴 리가 없다.’

대주교는 다시 눈을 감는다. 마음의 빗장을 내리닫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쇠나무에, 늘이고 겹쳐 두드리기를 거듭한 강철로 보강한 문이다. 공성 추로도 저 문은 뚫을 수 없다고 했다. 마왕 자신의 불로도 저 문은 태울 수 없다고 했다. 안전하다. 이 안에만, 새벽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 물론 두려운 것은 없겠지. 대주교. 그렇지?

그림자는 짐짓 의아하다는 듯 말을 건넨다.

- 지난주였던가, 지지난 주였던가? 강론에서 했던 말 아닌가. ‘시기. 질투. 두려움. 분노…죄악은 마음속의 굶주린 짐승이며, 관심을 받아먹고 커집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아예 외면하십시오.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십시오…’

쾅, 하며 문을 때려 부수는 소리. 경비병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 내몰린 비명이 끅, 끅 소리를 내며 목 졸리는 소리로 변하다, 돌연한 침묵으로 변한다.

- 훌륭한 연설이었어. 대주교. 뻔했지만, 다름 아닌 자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신성했지. 참으로 신성했어. 맨 앞줄의 남자들이 눈을 감고 눈물 흘릴 동안, 여자들은 자네를 감격 겨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저희의 죄악을 헤아리지 마시옵고…”

- 그러니 그녀들의 훤히 드러난 가슴을 본 건 자네 잘못이 아니었어. 자네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신성한 주일 미사에 그런 음란한 복장을 한 건 귀부인들이 정숙하지 못해서야. 아니 그런가? 그나마 백작 부인은 좀 낫더군. 가슴골 사이는 새하얗지 않았던가? 햇살이 그 불쾌한 손을 집어넣고 주무르지 않아서였을 거야.

“저희의 선행을 헤아려 주십시오…”

- 그래서 자네가 태양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지 않았던가. 고해소에서였던가? 아니면 이 방에서였던가? 여기도 저기도 아니었다면 마구간 옆의 작은 헛간에서였던가? 오, 아니지. 아니야. 바로 백작의 침소에서였지. 백작의 빠른 쾌유를 빌며 축성해 주러 간 그날.

쾅! 쾅! 쾅! 대주교가 천장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아흔아홉 가지 죄를 지었어도 하나의 선행이 있다면 그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 아. 정말이지 자네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토록 젊고 열정적인 아내를 두고 전쟁터에서 반신불수가 되어 돌아온 백작이 잘못한 거야. 오죽했으면, 백작의 침대 옆에서 자네와 백작 부인이 뒹굴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못했겠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혀가 잘려서? 눈이 멀어서? 혼수상태는 아니었잖나? 병신새끼, 손등에 힘줄 솟은 거 봐! 자네가 한 말인데, 기억하려나 모르겠군. 그 말에 자지러지며 웃던 부인을 보고 자네는 한층 더 힘을 냈었더랬지…하지만 그게 어떻게 자네 잘못인가?

“당신의 셈을 당해낼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심판을 통과할 자 누구입니까!”

- 자네는 부인과 남편을 몸과 영혼으로 축복해주었을 뿐인데. 잘못이 아니지. 잘못이 아니니 죄도 아니며 죄지은 것이 아니니 두려울 일도 없어.

쿵…쿵…꽝!

삐걱. 대주교의 눈이 뜨였다. 나뭇조각이 방을 뒹굴었다. 자다 억지로 일어난 것처럼 기우뚱거리던 그것이 이내 안정을 되찾는다.

“아…아아아아…!”

그리고 대주교는 보았다. 뜯겨나간 문틈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쇠 장갑을. 우둑, 우두둑 소리를 내며 틈을 벌리려 하는 그것을. 마왕성의 성문을 열어젖혔을 때 확 풍겨오던 역겨운 유황의 향내를.

- 두려워할 것 없어. 대주교. 정말 두려워할 것 없어. 수습 수도사들의 몫을 잠깐 보관한 것? 그들의 몫을 새로 들어온 수녀들에게 대신 나누어주고 소정의 대가를 받은 것? 그게 잘못인가? 다들 하는 일 아닌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종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 경비병 열을 고용하겠다며 예산을 받고 다섯만 고용한 것? 남들도 다 그렇게 해. 가짜 수염을 달고 축제의 밤마다 사창가를 들락거렸던 것? 누구라도 그렇게 할 거야.

“저는 가야 할 곳에 갔고 해야 할 일을 했으며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  마녀. 마녀들. 자네가 직접 심판한 그 숱한 마녀들. 알겠지만 마녀는 오로지 파괴만 행할 뿐, 창조의 권능은 없어. 그러니 진짜 그녀들이 마녀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그녀들이 잉태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야 했었잖나? 그것들이 마을마다 한 명씩 잡혀 들어온 천것들인지, 진짜 마녀인지 알 게 뭔가?

쾅!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자네는 자네 의무를 다했으니까. 그게 자네의 일이었으니까. 자네는 선한 일을 한 거야. 그런데, 대주교?

쇠 장갑이 문을 움켜잡았다.

문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텼다.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나 경첩은 그렇지 못했다.

경첩을 붙들어야 할 돌벽도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문이 뜯겨나갔다.

시커먼 그림자에 에워싸인 기사가 우뚝, 서서 그를 본다. 본다고 느꼈다. 투구 속의 눈빛은 볼 수 없었으니까.

그림자들이 기뻐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을 둘러싸고, 벽을 에워싸고, 축복을 내리듯 빙글빙글 돌았다. 묘하게도 그것은 백작 부인의 네글리제를 떠올리게 했다.

- 왜 기도하나?

그림자가 물었다.

“나. 나는. 나는…”

- 자네는 죄지은 게 없어.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 자네가 두려워해야 할 건 오로지 신뿐이야. 그런데도 자네는 손을 떨어. 묵주를 허겁지겁 돌리며 기도를 올리고, 촛불을 있는 대로 다 꺼내 놓아 켜며 그림자를 몰아내려 해. 왜일까? 왜 오줌까지 지리면서 바닥에 애새끼처럼 앉아 있나?

“나는 죄가 없다.”

대주교가 일어섰다. 힘든 일이었다. 젖어버린 바지, 굳어버린 다리, 타들어 가는 목. 그러나 대주교는 일어섰다.

마왕의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그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내 의무를 다하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착실히 수행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충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니, 심판은 오로지 신의 몫이리라! 네까짓!”

촛불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빛과 온기가 대주교의 오른손에 일렁거렸다. 그것은 이내 사람 크기의 망치가 되었다. 대주교이기 이전에 그는 용사 중 한 명이었고, 용사이기 이전에 성기사였다.

“네까짓 망령 따위는 두렵지 않다!”

철갑의 기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다. 대주교가 바닥에 망치를 내리쳤다. 그림자가 움찔거리며 발을 빼는 것이 보였다. 희열이, 젊은 시절의 열정이, 악을 물리칠 때의 순수한 열정이 다시 대주교의 몸에 찾아들었다.

- 그런데 왜 기도하나? 왜 무기를 들었나? 저것이 그리도 무해하다면. 저까짓 망령이 두렵지 않다면, 왜 이렇게까지 떠나?

대주교는 기겁했다. 목소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망치에서 나오고 있었다.

빛의 망치가 일그러졌다. 대주교는 망치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망치가 수은처럼 퍼졌다. 이내 그것에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가 싶더니, 시커먼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 이제 빛과 그림자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대주교여? 그렇게나 긴장하였던가?

빛은 응답하지 않았다.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대주교는 벽에 걸린 쌍 독수리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왼쪽의 것은 죽었으나 오른쪽의 것은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었다.

신의 상징이다.

“구원을…”

- 아냐. 아니지. 대주교. 그게 아니야. 자네는 기다렸어.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남들의 눈을 피해 수음하듯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잖나?

철갑의 기사가 흘러내렸다. 이내 그는 회색의 그림자가 되었다. 역류하는 하수구의 물처럼, 굴뚝을 타고 올라오던 매연처럼, 그것이 촛불의 아래를 흐르고 흘러 대주교에게로 다가왔다.

- 자네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 구원이 아니야. 자네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 두려움이지. 죄? 용서? 앙갚음? 심판? 아냐. 아냐. 아냐. 자네의 두려움은 하나뿐이지.

대주교의 앞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내 그것은 기사의 형체가 되었다. 강철의 투구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고 쇠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도 아닌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네 몫이 아니었던 것을 빼앗기는 두려움.”

“감-히-!”

대주교가 고함을 질렀다. 머리로는 잊어버렸던. 그러나 몸은 기억하고 있던. 혹독한 매질과 배고픔으로 아로새겨진 수습 성기사의 주문들이 떠올랐다.

“신의 자식을 더럽히려 드느냐!”

대주교의 주먹에서 심판의 불길이 치솟았다.

“병신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같은 새끼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어 온 것이 잘못이었어. 너와 네 계집년은 시골 촌구석에서 개처럼 새끼나 까지르며 살아야 했던 운명이었다! 네까짓 것이, 네까짓 것이!”

주먹이 기사의 갑옷을 난타한다. 갑옷이 찌그러지고, 구겨지고, 뜯겨나간다. 역시나 별것 아니었다.

“고작 신성한 열매 하나 처먹었다고, 네까짓 것이 용사가 될 수는 없었다! 우리의 것을, 나의 것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건 부당해! 부당하고 부당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의가 아니란 말이다! 불의한 것아, 결국은 이 꼬락서니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주먹이 투구를 쳐올린다.

투구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다.

끼기익, 하며 몸뚱아리가 힘없이 뒤로 자빠진다.

“한,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새끼가…”

그러나 대주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림자가 투구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둥실, 하고 떠오른 그것이 자기 몸을 되찾았다. 갑주를 두른 기사가 제 형태를 갖추었다.

아까와 다른 건 한 가지였다. 오른손에 들린 검. 검집이 씌워진 검.

“칼집에서 칼도 못 빼는 병신이 감히 누구 앞을 가로막느냐!”

“고하라.”

쇳소리가 울렸다.

“네가 한 일을 고하라. 네가 한 일이 그리도 떳떳하다면 세상 만인의 앞에 너를 보여라. 네가 한 일에 대해 밝히고 땅에 입을 맞추어라.”

“오냐. 그리하겠다!”

분노한 대주교가 벽장으로 달려갔다. 잠금창을 억지로 잡아 뜯고 망치를 잡아 쥐었다. 마왕을 죽이고 돌아온 그날 이후 꼴도 보기 싫었던 망치다. 그러나 망치는, 제 주인을 알아보고 빛나주었다.

“천한 것은 결국 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 세상에 고하겠다! 짐말과 여물을 나눠 먹던 주제도 모르는 종놈이 어떻게 몰락하였는지 고하겠다! 네놈 때문에 결속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다시 뭉쳤는지 고하겠다! 수천 번 수만 번 이야기했으나 거기에 한 번을 더하겠노라!”

대주교가 망치를 휘둘렀다.

기사가 검집을 휘둘렀다. 살아 있을 때만큼이나 느려 터진 동작이었다.

대주교의 감각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망치와 검집은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저까짓 검집으로는, 이 육중한 망치를, 신의 힘이 깃든 망치를 버티어 낼 수 없다. 검집은 튕겨 나가고, 망치 머리는 저놈의 머리를 으깨놓으리라.

기사가 검집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랐지만 이미 휘두른 망치의 궤적은 바뀌지 않았다.

어림없는 짓이다, 검술에 재능이라고는 없는 철부지의…

끼기긱.

몸은 비대해졌으나, 눈은 그대로다. 대주교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 자랑스러운 눈이 보여주었다.

검집이 망치를 슬쩍 옆으로 ‘밀쳐내는’ 것을.

바닥이 요란하게 박살이 났다. 헛방을 친 것이다. 망치는 기사의 발 옆 바닥을 부수어놓았다. 원래대로라면 투구가 저렇게 박살 났어야 했을 터였다.

대주교가 망치를 들어 올리려 했다. 다음 순간, 검집이 대주교의 손목에 내리꽂혔다. 미운 아이를 때리는 부모의 망설임 가득한 매질만큼이나 느려터졌으나

대주교는 막지 못했다.

“아아아악!”

대주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촛불이 스러지고 촛농이 손등을 태웠다. 바짓단에 들러붙은 촛불을 후닥닥 털어낸다.

절컥, 절컥, 기사가 걸어온다. 검집을 치켜들고, 느려터진 동작으로, 대주교를 내리찍는다.

단 한 번. 단 한 번에 왼쪽 어깻죽지가 박살 났다. 까무러칠 것 같았지만 대주교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펴 보였다.

“설명할 수 있어, 설명할 수 있다고! 제발, 제발 잠시만 내 이야기를!”

다행히도 기사는 멈췄다. 쇳소리가 울린다.

“듣겠다.”

눈물 섞인 눈으로 대주교가 턱을 덜덜 떤다.

“그, 그래, 그래!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였냐면…! 아아아악!”

대주교는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검집이 손바닥을 후려쳤다. 뒤로 꺾인 손가락이 제 주인을 노려본다.

“설명한다고, 설명한다고 했잖아앗!”

“들었다.”

“뭐라고…”

- 네 비명이 모든 것을 설명할 거야. 대주교.

그림자들이 낄낄거렸다. 검집이 선고처럼 솟구친다. 느려터진 그것이 회초리처럼 내리쳐진다.

수습 종자 시절. 뼈가 다 굳지도 못했던 시절. 기도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을 때. 육척봉을 시킨 대로 휘두르지 못했을 때. 선배들의 심부름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처럼.

그래. 다 꿈이야.

대주교는 마침내 이해했다.

자신은 아직 여섯 살 종자라고.

대주교라니. 허황된 소리다.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잡았다니. 허튼소리다. 자신들의 손으로 파묻은 애새끼가 살아 돌아와 자신을 검집으로 때려죽이려 든다니. 미친 소리다.

내일 아침은 뭘까. 삶은 귀리죽? 생선 뼈를 갈아 걸쭉하게 삶은 수프?

뚱뚱한 몸이 바닥을 나뒹구는 동안, 대주교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내일 아침 복도 쓸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퍽, 퍽. 살아 숨쉬는 고기를 무감정하게 내리치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대주교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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