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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219화 (외전 완결) (219/219)

외전 8

"노예 제도 폐지를 철회하라!"

황궁의 앞을 가득 메운 군중들.

민중의 시위는 벌써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또 저 지랄이네."

병사 하나가 시위대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매일 같이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으니 노이로제가 생길 것 같았다.

"노예 제도 폐지를 철회하라!"

노예 제도의 폐지로 이종족 노예들을 부리던 귀족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일꾼을 잃었다.

자연스레 인간 일꾼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그들의 몸값 역시 덩달아 올라갔다.

노동 가치의 상승. 일반 평민들이 시위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다 돈 벌자고 고생하는 거지."

병사의 말에 욕을 뱉었던 병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도덕이 없잖아, 상도덕이. 마음 같아서는 전부 내쫓아버리고 싶은데, 어휴."

귀족들은 큰 지출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제와 대놓고 반목할 수는 없으니, 평민들에게 돈을 주고 시위대를 꾸린 것이다.

"별 수 있나. 황제님의 특명인데."

"너무 착하셔서 탈이라니까."

카프 17세가 죽고, 소렌이 새로운 황제가 된 지 어느덧 한 달.

고작 한 달 만에 제국의 정세는 안정되었다.

황제의 뛰어난 수행 능력과 만인을 포용하는 성정, 그리고 용사라는 무력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실프 백작이 항복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집무실.

카프 18세가 된 소렌이 비서로부터 감옥에 수감된 귀족의 뜻을 전달받았다.

"앞으로 몇 명이나 남았지?"

"세 명입니다."

일부 거대 귀족들은 새로운 황제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노예 제도의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주된 동기였다.

그들은 이종족들을 징집하여, 군대의 최전방에 세웠다. 노예 제도마저 폐지해 버린 황제였으니 강제로 징집된 이종족을 쉽게 건들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이번에도 용사님의 조언이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용사라는 최강의 검이 있었다.

유혈 사태 없이 전쟁을 끝내거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투 의지를 잃게 하는 등. 유현은 혼자서 연방의 모든 무력 반란을 해결했다.

"용사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니까."

그가 바깥으로 나도는 동안 소렌은 내실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여 많은 지원군을 얻었다.

그 결과, 고작 한 달만에 지금처럼 안정된 제국을 만들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하나의 연방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혹시 용사님은 방에 계시나?"

"예. 조금 전에 직접 만나 뵙고 왔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전해줘."

이종족 국가들의 동의도 모두 얻었고, 전체적인 로드맵도 세웠다.

이제는 그동안 연방의 안정화를 위해 미루어두었던 차원의 연결을 시작할 때였다.

"소렌!"

비서가 방을 빠져나가고 몇 분뒤. 소식을 들은 유현은 한달음에 집무실까지 달려왔다.

"바로 가자!"

"바, 바로 말입니까?"

"지구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어. 말 나온 김에 곧장 시작하라는 뜻이지."

소렌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진 하늘.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서 돌아가고 싶은 유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관계자들부터 깨워야겠군요."

단잠을 깨우는 건 큰 실례지만, 그게 용사의 바람이라면 모두들 흔쾌히 응할 것이다.

"용사님. 먼저 이동하셔서 시작하시죠. 저는 파트너들을 데리고 함께 가겠습니다."

"운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대는 정할 수 없다.

최대한 원하는 시간대로 이동하기 위해 시도는 해볼 수 있지만, 확률을 높일 뿐 확실한 건 아니었다.

"잘 될 겁니다."

"반드시 잘 되야지. 자칫했다가 몇백 년 뒤로 가 버리면..."

지금까지 한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소렌 역시 유현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잘... 되겠죠?"

"노력해볼게."

"믿겠습니다!"

소렌이 먼저 집무실을 떠났다.

유현은 창밖의 반짝이는 도시를 보며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도 떨리는 일. 이번 한 번으로 앞으로의 명운이 갈린다.

"잘 돌아가기를 바란다."

유현은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몇 번 두드렸다. 자신을 향한 일종의 기도였다. 목소리라는 신적 존재의 힘이 이 손에 있으니, 굳이 다른 신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좋아, 가자."

유현은 포탈을 통해 준비된 장소로 혼자 이동했다.

지구와의 통로가 마련될 장소는 수도의 광장이었다.

카프 3세의 동상이 있었던 곳이자, 제국의 600년 역사동안 수많은 이종족 인사들이 공개 처형되었던 장소.

역사적으로 노예 제도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장소였기에 모두의 만장일치로 광장 자체를 폐쇄하고 그 쓰임새를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된 게 바로 '차원 정거장'이었다.

"이렇게 넓었었나."

지나다니는 사람도 마법 수레도 없으니 이상하리만치 넓게 느껴진다.

유현은 광장에 드리운 적막을 느끼며 동상이 있었던 자리로 이동했다. 그곳이 바로 광장의 정중앙이었다.

"후우."

잔뜩 긴장한 유현은 심호흡하며 긴장감을 풀었다.

모든 방법은 목소리에게 들었다.

준비는 만전이었다.

"목소리. 이번 일이 끝나면, 난 정말 모든 힘을 잃는 거냐?"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유현은 다시금 목소리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가진 모든 힘을 투입해야만, 영원히 지속될 차원의 통로를 만들 수 있다.

자신의 선택이었고,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지만, 유현은 못내 아쉬웠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과 세계를 지켜주었던 초월적인 힘.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얻었고, 그 탓에 매번 홀로 남겨졌다.

그래서 이 힘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게 싫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나니, 더더욱 싫어졌다.

'그래도 전부 잃는다니까 아쉽긴 하네.'

소중한 걸 위해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유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욕심은 버려야지."

유현은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코어의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내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기증이 일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들었다.

"크으윽..."

무아지경.

그의 정신은 몸과 분리되어 깊은 차원에 진입했다.

거대한 에너지를 동반한 의식은 천천히 차원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마치 돌덩이를 조각하듯 섬세하고 세심하게 경계를 깎아낸다.

광장에 관계자들이 모이고, 어두운 하늘에 동이 틀 때까지도 통로는 완성되지 않았다.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하고, 고도의 집중력과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작업.

그 작업이 마무리된 건 사흘 뒤 밤이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 아래.

푸른 빛의 통로가 그 거대한 입을 드러냈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이종족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허공에 나타난 통로를 보며 입을 벌렸다.

마치 화분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새. 끝으로 갈수록 경계가 흐릿해지다가 종국에는 끝이 사라졌다.

"와, 완성됐다!"

"용사님!!"

작업을 마친 유현은 바닥에 쓰러져 드러누웠다.

몸과 정신의 피로가 상당했지만, 그는 통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용사님! 괜찮으십니까!"

소렌이 직접 그를 일으켰다.

유현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냐."

지상에서 적어도 몇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 통로의 입구가 있다.

걸어올라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 해 보였다.

"어... 날아서 가면 되지 않을까요?"

"날아서?"

마음 같아서는 날아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몸에 남은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모든 힘을...'

자신의 몸을 살피던 유현은 아직 체내에 마나가 남아있는 것을 느꼈다.

그 사실에 의문을 느끼던 도중,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예상 마나 사용량은 어느 정도의 실수가 생겼을 때를 염두하여 계산했습니다. 구원자 유현은 잔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었고, 힘의 일부가 남았습니다.

일부라기에는 많은 양의 마나.

물론 작업의 시작 전에 비교하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완벽히 평범한 몸이 된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지구의 기준으로 S급 헌터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준. 그보다도 조금 더 강할지 모르겠다.

"끄응."

유현은 통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소렌, 가자."

"예!"

두 사람은 함께 통로로 향했다.

이종족의 지도자들은 지상에서 박수를 보내며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데요?"

판대륙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과거를 이야기하던 유현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조용한 카페 안.

손님도 음악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 유현과 한서희만이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네가 아는 대로지. 통로와 가장 가까이 있던 너를 만나고, 가족을 보고 나서 다시 소렌에게 되돌아간 다음에…."

"한국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랬지. 우선 통로가 아카데미 부지에 생겼으니까. 그다음은 미국에 가서 판대륙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중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유럽도 가고..."

돌아온 이후, 유현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해외를 돌아다니며 소렌과 함께 각국의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판대륙이 어떤 곳이고, 두 세계의 연결로 서로가 얻게 되는 이점은 무엇인지 등.

다들 판타지 속에서나 등장하는 세계에 대해 처음에는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소렌의 마법과 그곳에서 챙겨온 마법 도구들을 보여주자 의구심은 금세 풀렸다.

"그 뒤로는 순항이었어."

문화와 기술적 교류.

전직 헌터들의 판대륙 진출, 이종족의 지구 이주 등.

돌아온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러니까요. 정말 놀라울 만큼, 빠르게 일상에 파고들었어요."

한서희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날아온 커피포트가 그녀의 찻잔에 커피를 따랐다.

"이런 것도 가능해지고."

유현이 싱긋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하늘에 판대륙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했었는데. 서로 다른 국가도 아니고, 다른 차원이었잖아."

"전부 당신 덕분이죠."

유현은 두 세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착실하게 해냈다.

단순히 언어의 통역을 넘어서 두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서로의 장단을 보여주고,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등을 설명했다.

그 외에도 수반된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판대륙의 마법은 지구의 일상에 균형 있게 녹아들었고, 두 차원의 사람들은 자유로이 서로의 차원을 오갔다.

아직 사회적인 인식에는 조금 더 변화가 필요하지만, 서로를 향한 반감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틸칸의 영향이 컸지."

어느 정도 미화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지구의 사람들은 틸칸의 작품을 통해 판대륙의 문화를 진즉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구 사람들이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나오니, 판대륙의 이종족들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근데 정말로 안 밝혀도 되는 거예요? 그 틸칸이라는 사람이 판대륙의 용사였다는 거."

"밝히면 복잡해져."

이야기하자면 긴 내용이었다.

그래서 유현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긴 하네요. 겨우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세상이 이렇게 변하다니."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지. 그리고 틸칸의 영향이 컸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대단하다고요. 칭찬하면 고맙다고만 하지, 자꾸 딴소리야."

한서희의 지적에 멋쩍어진 유현은 컵에 꽂혀있던 빨대를 쪽 빨았다. 옅고 시원한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슬슬 가봐야겠다."

"벌써요?"

"소렌이랑 만나기로 했어. 너도 들어가 봐. 집에 기다리는 사람 있을 거 아냐."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한 달 동안 쉼 없이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낸 여유 시간. 그마저도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이 언짢아진 건 짧은 해후 때문이 아니었다.

"없어요."

"뭐?"

"기다리는 사람 없다고요..."

"왜 없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뭐, 뭐요?! 이 정도면 젊은 거죠!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제 나이에 벌써 시집을 가요!?"

"......아니면, 아닌 거지 짜증을 내냐. 안 본 사이에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네."

한서희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었다.

"거칠어지기는 무슨. 아무튼, 나는 집에 기다리는 사람 없어요. 5년 전쯤에 혜빈이랑 동거하긴 했는데, 걔는 3년 차에 결혼하고 독립했네요."

유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서혜빈 말하는 거야? 걔가 결혼했다고? 진짜?"

"네."

"와, 그런 애도 데려가는 사람이 있네? 혹시 기둥서방 아니야?"

유현은 흥미가 동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약속 있다면서 왜 다시 앉아요?"

"세계 7대 불가사의보다 미스터리한 일이 생겼다는 걸 들었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 그래서 상대가 누구야?"

"한주석이요."

유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주석."

"네."

"사투리 쓰는 뚱뚱한 친구."

"기억하네요."

"너희한테나 12년이지 나한텐 길어봐야 몇 달밖에 안 지난 일이니까."

한주석, 한주석.

그 이름을 곱씹던 유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기가 찬다는 듯 헛웃었다.

"둘이 어떻게 결혼을 하냐. 누가 협박한 거 아니야?"

"누가 결혼을 협박해서 해요?"

"아니, 그랬을 수도 있지. 결혼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든가..."

"퍽이나 그러겠네요. 하여간, 늙으니까 자꾸 헛소리만 늘어."

유현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야, 너는 안 늙을 것 같아?"

"저는 천 살 넘게 못 살아서요."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그건 둘째치고.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은 어떻게 지내?"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현의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그의 눈이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약속 안 가도 돼요?"

"이쪽으로 오라고 하지 뭐. 중요한 일은 다 끝났으니, 굳이 집무실에서 만날 필요는 없으니까."

유현은 의념으로 소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가 가게로 찾아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자, 빨리 얘기해봐. 다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죽겠네."

지구로 돌아온 후, 친구와 만난 건 한서희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오늘이 두 번째 만남.

한 달 내내 잠을 거의 자지 못했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다.

"오철용은 일본에 이민 갔어요.

거기서 니지 라이브였나. 가상 인터넷 방송 회사를 세우겠다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철용이 답네."

"신가온은 검도 도장을 차렸어요. 근데 얼굴 때문에 방송 몇 번 타더니 지금은 그냥 연예인이에요. 노래도 하고, 예능도 나가고..."

"가온이가 나만큼은 아니여도 잘 생기긴 했지."

한서희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유현을 바라본다.

"...눈으로 욕을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야?"

"크흠. 그럼 헛소리하지 마요. 다음으로 풀잎이는 사육사가 됐어요."

그 말에 유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걔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풀잎이도 그 이야기하던데요? 진짜 당신이 말한 대로 돼서 자존심 상한다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풀잎이가 매번 이야기하던 게 있는데, 당신 다시 돌아오면 미르 사료값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받겠대요. 개라도 키웠어요?"

유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어, 무슨 큰 일이라도 난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왜, 왜 그래요?"

"......아, 아니야. 일단 계속 얘기해."

나중에 찾아가서 싹싹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블은 병원을 열었어요. 헌터 실업 방지법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회복 능력자면 의사 면허가 없어도 개원할 수가 있거든요. 외과 환자들로 문전성시래요. 아마 우리 중에 벌이는 제일 좋을걸요?"

"오, 그건 신기하네. 걔는 어때? 이케가미."

"이케가미는 변호사가 됐어요."

생각지도 못한 직업에 유현이 말을 더듬었다.

"벼, 변호사?"

"네.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겠다나 뭐라나. 게이트 사라지자마자 아카데미도 그만두고, 바로 법대 공부 시작하더라고요. 시험 합격했을 때 봤었는데, 애가 아주 수척해진 거 있죠?"

"독기가 있네. 하기야 그러니까 그렇게 모함당해도 안 날뛰고 참았겠지."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엘레나를 말 안 했네요. 걔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잘 지내지?"

엘레나는 유현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은 아이. 끝까지 곁에 남아있어 줘야 했는데,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잘 지내죠. 여기 카페 주인이 엘레나에요. 그러니까 이 시간까지 여기에 있을 수 있지."

"......뭐? 여기가?"

"슬슬 다들 올 때가 됐는데."

한서희가 시계를 흘끗였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니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새 자정을 앞두고 있었다.

"아까 간다고 그래서 심장이 철렁했잖아요."

"누가 오기로 했어?"

"네. 다들 오기로 했죠."

그때, 유현이 귓가로 바깥의 소음이 소음이 파고 들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은 목소리들이 카페 바깥에서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렌 만나러 갔으면 큰일 날 뻔했겠네."

"대체 왜 그렇게 바쁜 거예요?

나 만난다고 하길래 이제는 좀 덜 바쁜 줄 알았는데."

"그나마 너 만나니까 시간 낸 거지."

유현은 카페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가장 앞에 선 건 절친했던 주시하와 카페 사장인 엘레나였다.

"...왜 둘이 손을 잡고 있지?"

"왜긴요. 그렇고 그렇게 됐으니까."

유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건 진즉에 말을 해라. 괜히 걱정했네."

마음만큼이나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카페의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입구 앞에서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던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유현을 발견했다.

"......"

하나같이 토끼눈을 한 채 유현을 바라본다.

유현은 하나하나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카데미의 친구들과 선생, 그리고 바깥에서 관계를 맺었던 이들까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느낄 수 있는 커다란 감정 변화.

이내 문이 거칠게 열렸다.

떠들썩함이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외전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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