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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218화 (218/219)

외전 7

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꽃잎이 아래로 기울었다.

툭, 하고 핏방울이 꽃잎을 타고 떨어진다.

털썩.

수십의 병사가 동시에 쓰러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튄 무언가를 닦는 황제.

그게 피라는 걸 확인하고, 뒤늦게야 주위를 살핀다.

황제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당황에서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온갖 폼은 다 잡더니만, 실전은 처음인가?"

마도 제국은 진즉에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 뒤로 긴 시간 이어진 평화. 작은 소란이나 내부 분란이 몇 차례 있었지만, 카프 17세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다.

십수 년의 집권 기간 중 그가 겪은 실전이라고는 격투 대회뿐.

그마저도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연극에 가까웠다.

"이노오오오옴!!!"

하지만 자존심은 경험의 여부와 관계없었다.

황제는 자신을 향한 모욕을 참지 않았다. 눈앞에서 펼쳐진 잔혹한 살육의 두려움보다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분노가 더 컸다.

때때로 분노는 무모함에 도전할 용기를 준다.

그리고 그 결말은 대개 비극이다. 황제는 눈앞의 남자가 단번에 수십을 죽였다는 사실을 잊은 채,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나는 황제다! 대륙의 지배자란 말이다!"

황제가 검을 앞세워 달려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불덩이와 날카로운 쇠붙이들. 동시 캐스팅이었다.

마법으로 시야가 가려진 가운데, 유현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었다.

'시야를 가리고 사각지대에서 공격하려는 건가.'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을 뿐.

유현은 마나를 모아 터뜨렸다.

한 번의 손짓으로 다가오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마법은 분해 되고, 장검은 바스러졌다. 카프 17세의 몸뚱이ㄷ 뒤로 튕겨 나갔다.

'괜히 소렌을 상대로 승리한 게 아니군.'

동시 캐스팅이 가능한 마법 실력. 사각지대를 만들고 파고드는 판단력. 검을 쥔 자세와 거리를 좁히는 스탭까지.

실전 경험이 없는 것치고는 뛰어난 전투력이었다.

"어, 어떻게 마법이..."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잔재주가 통할 것 같아?"

"잔재주? 나의 힘이... 잔재주...?"

압도적인 힘의 차이.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이를 악물었다.

모든 종족을 발아래에 둔 인간, 그런 인간들의 정점에 선 황제.

자신을 모욕하는 건 곧 신에게 도전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

유현의 발언에 눈이 뒤집힌 카프 17세가 목에 핏발을 세웠다.

"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세계를 광명으로 물들인 선대 황제들의 후손! 카프 17세다! 그런 모욕을 듣고 이 몸이 관용을 베풀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뭐라는 거야."

카프 17세가 다시 일어났다.

한순간 달라진 주변의 공기.

엄청난 양의 마나가 카프 17세의 주변으로 응집하기 시작했다.

"죗값은 목숨으로 받겠다. 죽어서 너의 잘못을 회개하라."

카프 17세의 손에 밝은 태양을 집어삼킬 정도로 찬란하고 강렬한 빛이 일었다.

"내리쳐라! 신의 창!"

카프 17세가 손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쳤다.

직후, 굵은 뇌전 수백 줄기가 구름을 뚫고 유현의 머리 위에 작렬했다.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던 황궁의 비밀 마법, 이른바 '마른하늘에 날벼락'. 어중간한 번개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다. 강력한 전격이 반복되며 거대한 바위조차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마법이었다.

"네가 용사라면 가중 처벌이다."

곧 지상에 내려꽂히던 번개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

유현은 멍청히 서 있는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에는 조금의 대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말을 잃었다.

입은 경악으로 벌어졌다.

"네가 죽는 건 그 잘난 선조 때문이다."

"서, 선대를 모욕하지..."

유현의 손이 횡으로 움직였다.

카프 17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새끼 때문에 뒤진다니까 끝까지 선조 타령은."

쏴아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뒤뜰의 정원을 휩쓸었다.

제법 강한 바람이었다.

죽은 듯 멈춰 있던 카프 17세의 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통제를 잃은 몸뚱이가 꽃밭 위로 넘어졌다.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꽃들을 붉게 물들였다.

"저기다!"

뒤늦게 다른 병사들이 뒤뜰로 몰려왔다. 그들은 유현을 향해 달려오다가 뜬 눈으로 삶을 마감한 황제의 머리통을 보고 멈췄다.

유현은 그들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카프 소렌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아직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소렌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카프 17세는 죽었다. 소렌을 데려오고, 모든 영지에 소식을 전해라. 너희의 왕이 죽었으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처음에 병사들은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투한 적에게 황제의 친위대와 황제가 죽은 상황. 하지만 이곳은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다려 줄 수는 없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가?"

유현이 살기를 흘리자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뒤늦게야 반응했다.

"아, 알겠습니다! 뭣하냐! 빨리 움직여!"

"소렌은 어디에 있지?"

지휘관은 긴장을 삼키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 안내하겠습니다."

유현은 지휘관을 따라 성의 내부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황궁이었지만, 그리운 감각은 없었다. 기억 속의 그곳과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이곳입니다."

소렌이 머무는 곳은 성채에 마련된 회복실이었다.

하지만 소렌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피 묻은 옷도 그대로고, 상처 역시 심하다.

'적당히 상황을 보다가 회복시키려고 했나 보군.'

유현은 흰옷을 입은 회복실의 담당 사제에게 소렌의 회복을 명령했다. 그가 망설이자 지휘관이 눈치 빠르게 닦달했다.

"뭣하나! 어서 움직이지 않고!"

흉기 아래 시작된 소렌의 회복.

자신이 알던 회복 마법과는 다른 형태에 유현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건 처음 보는 마법이군.'

그때였다.

회복실의 문이 열리고, 병사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지휘관과 소곤거리는 병사.

지휘관이 목울대를 꿀렁이며 유현에게 다가왔다.

"화, 황제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역시 그렇군."

대충 예상은 했다.

황제의 잘린 목이라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시위대의 탄압을 멈추지 않겠지.

"각 영지의 좌표를 가져와. 카프 17세의 머리도 함께."

"머, 머리를 말입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지휘관은 등줄기의 털이 곤두섬을 느끼며 냉큼 달려 나갔다.

지휘관이 떠나고 잠시 뒤.

회복 마법의 효과가 탁월한 덕인지, 소렌은 금세 깨어났다.

"으음..."

"소렌. 괜찮냐?"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눈을 비비는 소렌.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더니 유현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었다.

"요, 용사님? 아니, 그보다 이곳은 황궁의..."

"카프 17세가 죽었다."

"......정말입니까?"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가져왔습니다!"

지휘관이 뛰어 들어왔다.

그 품에는 카프 17세의 머리가 안겨 있었다.

"...정말이었군요."

"영지에 황제의 죽음을 전하니 믿지 않더군. 증명할 필요가 있어서 챙겼다."

"저 같아도 그러겠습니다. 황제가 갑자기 죽었다니,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소렌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의 잘린 머리를 눈앞에 두고서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슬프지는 않나?"

"그럴 리가요. 엘렌은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게 한이네요."

소렌은 카프 17세의 머리채를 쥐어 들었다. 목 아래로 뚝뚝 피가 떨어진다.

"엘렌..."

그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려왔다.

형제의 죽음을 맞이한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가운 눈빛.

카프 17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소렌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한 단계 남았군요."

소렌은 머리를 들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곧 그가 도착한 곳은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소렌은 거울 앞에 섰다.

"황제가 영지와 의사소통을 할 때 사용하는 마법 거울입니다. 이거라면, 황제의 죽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직접 텔레포트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잘 됐군."

"용사님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렌의 뒤로 섰다.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소렌이여야 한다.

"창을 꿰뚫고, 세상의 진리를 바라보는 자여."

소렌이 발동어를 외기 시작하자 거울에서 스멀스멀 마나가 피어올랐다. 곧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던 거울 위로 수십의 풍경이 어지럽게 겹쳤다.

***

"물러가라아아아!"

"왕국에서 꺼져라!!"

"으아아아아!"

버섯처럼 둥근 지붕의 건물들이 여러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드워프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그 언덕 사이를 걸어가며 가장 높은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과거 드워프의 왕국이었던, 킹덤 드워프. 제국의 영지가 된 이후로 그 이름은 리프로 바뀌었다.

성채에 있는 리프의 영주는 유례없는 규모의 시위대를 보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젠장, 젠장, 젠장."

이미 저들을 제압하기 위해 병사들을 투입했었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처음에야 효과가 있는 듯싶었으나 한 노인 드워프가 나서며 오히려 드워프들은 더 단단하게 결집했다.

"수도의 전언은?"

"아직 입니다."

"젠장! 병기 사용 허가를 요청한 게 언젠데...!"

이 상태로는 병사들을 더 투입시켜봤자 소용없다.

필요한 건 병기로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여 저들의 의지를 잃게 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영주님! 황실에서 직접 통신입니다!"

"어서 연결해라!"

"이쪽이 아닙니다! 중앙의 광장에..."

-아, 아! 들립니까?

영주의 시선이 광장으로 돌아갔다. 광장의 상공.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렌 님이 왜 저기에?"

"소, 소, 손에..."

영주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소렌의 손에는 황제인 카프 17세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우, 우우욱."

그 잔혹한 모습에 영주가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드워프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머리통을 보며 뜨겁게 열광했다.

"진짜 황제가 죽었다아아아!"

"와아아아!!! 황제가 죽었어!!!"

"이제 자유다!!"

황제의 죽음에 쏟아지는 폭발적인 반응. 한편, 황제의 죽음에만 모든 관심이 쏠리지는 않았다.

"지, 진짜 용사님이랑 똑같이 생겼어!"

"정말 용사님이야?"

"족장님이 말씀하신 게 사실이었어!"

"용사님이다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아아!!!!"

아퀼리타스 간부 소속인 늙은 드워프 지도자를 통해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드워프들.

대부분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눈으로 확인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영지의 영주는 귓구멍 뚫고 똑바로 뚫고 들어주세요.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 건 리프 영지만이 아니었다.

엘프, 울프, 고블린, 오크 등.

제국의 모든 영지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흘러나왔고, 비슷한 반응을 토해냈다.

황제의 죽음, 그리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용사의 등장까지.

광분에 찬 포효에 가까운 함성들이 판대륙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카프 17세는 죽었습니다. 지금부터 황좌는 반란을 성공한 제가 계승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한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칙령을 공표하겠어요.

소렌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난 몇백년 간의 역사를 뒤집는 순간. 살면서 품었던 가장 간절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이종족의 마음만큼이나, 소렌의 가슴도 거세게 두근거렸다.

-현 시간부로 이종족 노예 제도를 폐지하겠습니다. 각 영지의 주권은 이종족에게 되돌아가나 이는 영지의 독립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칼리안 마도 제국의 명칭을 칼리안 연방으로 개명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난 직후, 모든 영지에서 환호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만세!"

"해방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종족의 독립.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노예 제도에서의 해방만으로도 그들의 가슴에 불꽃을 지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건 여기 계신 이분 덕이었습니다.

소렌이 뒤에 서 있던 유현을 앞으로 내세웠다.

-먼 과거, 이종족들을 하나로 모아 마왕을 물리쳤던 용사님입니다.

인간은 잊었지만, 이종족 여러분들은 모두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책에 그려진 모습과 똑같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추억에 젖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마음속에 담고 있던 전설 속의 그 이름을 외쳤다.

"유현!"

"유현!"

용사, 유현.

그는 또 한 번 판대륙을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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