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유현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광장을 무질서하게 오가는 마법 수레들이 유현을 피해 지나간다.
수레를 따라온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
효수된 것처럼 왕의 손에 들린 머리. 크나큰 모욕이었지만, 유현은 분노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왜 세상을 구한 영웅이 이토록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전시된 걸까.
이종족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마왕을 죽인 용사를 고작 그런 이유로 능멸한다고?
그리고 그걸 세상이 받아들여?
"......젠장."
두통이 밀려왔다. 이종족 노예 제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세오. 일어나봐."
유현은 그 이유를 알고 싶었고, 세오라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세오는 깨어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불러봤지만, 묵묵부답이다.
"너무 과격했나."
유현은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렸다.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판대륙을 뜨지 않는 이상 언제든 들을 기회는 있다. 우선 휴식을 위한 숙소를 찾을 생각이었다.
"...아니지."
유현은 걸음을 멈췄다.
세오가 기절하기 전에 했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전부 듣지는 못했지만, 얼굴과 관련된 이야기도 했었다.
그게 설마 용사를 능멸하는 동상의 배경과 관련된 걸까?
"이름도, 얼굴도 드러내면 안 되는 이유..."
생각나는 건 하나.
대역 죄인.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준의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면, 이런 식의 공개적인 모욕도 납득이 됐다.
"조작인가."
죄를 지은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역사를 제 입맛에 맞게 바꾼 거겠지.
"이유야 뻔하고."
카프 3세에게 용사의 역사는 무척 거슬리는 기록이었을 것이다.
이종족과 함께 싸워 세계를 구한 인간. 카프 3세의 이념과는 반대되며, 계획에 차질이 생길 만한 역사였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바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어중간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
그게 아닌 이상에야 영웅이던 용사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라도 팔아먹었다고 기록했나?"
"비슷합니다."
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유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좌측,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쓴 탓에 얼굴은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오의 일행은 아닌데.'
비슷한 후드를 착용했지만 다른 세 사람 중 이런 체격은 없었다.
유현은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뭔가 알고 있나?"
"대륙의 역사를 모릅니까?"
남자는 이상한 사람을 본 듯 물었다. 유현은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어려서부터 일하느라 배우지 못했어."
"제국의 교육정책은 청소년기의 의무 교육을 제공하지만, 군데군데 허점이 많죠."
"그래. 그러니 조금 설명을 듣고 싶은데."
혹여나 다른 방향으로 말이 샐까, 유현은 질문을 다시금 인식시켰다.
"아무리 그래도 용사의 만행을 모른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 그렇죠. 간단하게 설명해드리자면, 용사와 이종족 동료들은 마왕의 감언이설에 설득되어 그들과 동조했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들의 뒤통수를 친 거죠."
"...하."
유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왕과 싸우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애초에 그에게는 그리 오래 지난 기억이 아니었다.
"......"
그래서 더 속이 끓어올랐다.
전선의 선봉에 서고, 적장의 목숨을 직접 끊은 자가 누구인가.
천년의 싸움 끝에 제국을 구원한 자가 누구인가.
모든 이종족의 협력을 이끌고, 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마왕의 대군을 이겨낸 자.
그게 바로 용사였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많은 일을 해낸 게 바로 용사였던 자신이란 말이다.
"초대 국왕이신 카프님께서는 다른 인간 동료들과 함께 타락한 용사와 이종족들, 그리고 마왕까지도 모두 죽였습니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걸 믿나?"
유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온다. 진상을 알고 뒤늦게 밀려온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감정에 휘둘려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지켰던 대륙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 모두의 신실한 믿음 덕분에 제국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후드 속 남자는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런 남자의 태도에 유현은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
일말의 분노조차 느낄 수 없는 순수한 감탄.
이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잘못된 역사는 고정되었고, 그것은 정사다. 사람들에게 용사는 과거의 악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제국은 이제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피아노의 다른 음계를 누르듯 남자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썩은 단면을 칼로 잘라낸 것처럼 달라진 남자의 분위기에 유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라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 틀림을 우월함으로 여기는 국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국가.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제국은 멸망할 겁니다."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찰랑이는 금발, 푸른 빛의 눈동자. 남자의 모습에 유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거의 동료와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었다.
"카프?"
"카프 소렌. 제국의 막내 황자입니다."
유현은 눈을 깜빡였다.
"황자라고?"
"아퀼리타스와 함께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지요."
"......반대 세력이라더니 황자까지 한 발 걸치고 있던 건가."
유현의 말에 소렌이 피식 웃었다.
"아퀼리타스는 제가 설립했습니다. 한 발이 아니라 온몸을 푹 담그고 있죠."
"황자쯤 되는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는지 궁금하시겠죠. 사실 이득은 없습니다. 반란이 성공하면 계승 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제가 왕좌를 차지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까요."
"그럼 대체 왜?"
소렌은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말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만 말씀드리자면 그게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소렌의 모습에 과거의 기억이 덧씌워졌다.
누구나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그게 올바른 정의라며 정의를 부르짖던 카프.
소렌의 가치관은 카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카프도 그랬었지."
"그렇습니까? 카프 1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분에 관한 기록도 용사님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유실되거나 조작되었으니까요."
"녀석은 참..."
흐뭇하게 웃던 유현은 순간 느껴진 위화감에 입을 다물었다.
소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님. 다시 한번 인사드리지요. 제국의 일곱 번째 황자. 카프 소렌입니다."
"......어떻게 알았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아퀼리타스에 이 한 몸 푹 담그고 있다고. 근원을 제거하러 간 결사대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용사로 추정되는 자가 곧장 제국으로 향했을 거라고요. 세오가 그 뒤를 따라갔다기에, 확신했죠. 그 녀석은 누구 보다도 용사님에 관해 잘 아는 녀석이니까요."
소렌의 설명에도 여전히 유현은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용사, 600년 전에 실종된 인물.
그런 사람이 지금 돌아왔다면 누구라도 의심부터 할 게 분명했다.
결사대의 세오가 이상한 것이지, 다른 이들의 반응이 오히려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소렌의 태도에서는 일말의 의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잠깐 마실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600년을 사라졌다가 이제야 나타났다. 그런데도 믿어?"
"용사의 여정에 기록된 역사가 무려 천년입니다. 60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나타났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도 물론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기 전까지는 의심했습니다. 세오가 드디어 정신이 돌아버린 건가 했죠. 그런데 몇 마디를 나눠보니 알겠더군요. 이분이 바로 대륙을 구원한 그분이라는 걸."
대륙을 구원한 그분.
지나가듯 뱉어낸 말이지만, 유현의 마음에 크게 울렸다.
"......고맙다."
"무엇이 말입니까?"
"진짜 역사를 기억해 준 것 말이야."
"하하. 저 하나뿐이 아닙니다. 아퀼리타스의 모두가 그리고 모든 이종족이 정사(正史)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건 참 다행이군."
유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많은 마법 수레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타나도 되는 건가?"
"안될 것 있습니까? 누구한테 들킨 것도 아닌데요."
소렌은 그렇게 말하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덩치만큼이나 대담한 성정의 소유자 같았다.
'하긴 저런 성격이 아니면 반란은 꿈도 못 꿨겠지.'
성공 가능성은 낮고, 들켰을 때의 위험성은 지나치게 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지만, 바보같이 무모한 시도였다.
"내가 여기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세오의 몸에 추적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같이 있을 테니, 그걸 쫓아온 겁니다."
유현은 마나로 세오의 몸을 살폈다. 몸에 걸린 여러 마법 중 추적 마법도 존재했다.
"이 정도로 많은 버프가 걸려 있는 걸 보면, 꽤 중요한 친구인가 보군."
"결사대에 선발될 정도로 뛰어난 성직자입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죠."
"그런 것 치고는 다들 붙잡혀서 죽을 뻔했었는데."
그 이야기도 들었는지 소렌은 헛기침을 했다.
"결사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져 지친 상태로 적들을 만나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원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던 건가?"
"예. 남은 기록이 거의 없어 마계 전역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뛰어난 실력자들이 지칠 법도 했다. 마계가 그리 넓은 곳은 아니지만, 좁은 곳도 아니었으니까.
"용사님은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글쎄..."
유현은 본래 두 가지 계획이 있었다.
하나는 근원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미 달성했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지구로 돌아가는 통로를 만들기 전, 두 세계가 연결된 이후 혼란을 막기 위해 판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국가를 설득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종족의 노예 제도. 거기에 더해 조작된 역사까지.
이런 상태로 두 세계를 연결해봤자 전쟁이나 유혈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완전히 꼬였어.'
당초에는 용사가 이룩한 과거의 위업을 앞세워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다. 귀환 용사라는 멋들어진 별칭도 곁들일 생각이었다.
사라졌던 용사를 향한 금의환향.
사람들은 열광하고, 모든 게 예상한 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카프 3세의 만행으로 모든 게 뒤틀렸다.
'역사가 조작되지만 않았어도 계획대로 되었을 텐데.'
생각하니 또 화 나네.
아무리 역사가 승자에 의해 쓰인다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당장이라도 이 오류를 붙잡고 싶었다.
"요, 용사님?"
유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느낀 소렌이 급히 그를 불렀다.
"역시 지금의 왕조를 무너뜨려야겠어. 카프의 복수를 하고, 역사를 바로잡겠다. 그편이 모두에게 좋아."
"이, 일단은 진정하시지요.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
"예. 이종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턱대고 쳐들어가는 건 피해야 합니다."
유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계획이 뭔지 듣고 결정하지. 설명해봐."
"우선 자리를 옮기죠."
밤의 광장은 사람보다도 수레가 많았다. 그런 곳에서 한참을 떠들고 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무덤으로 가지."
"아닙니다. 본부로 모시겠습니다."
소렌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포탈이 나타났다.
유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포탈 마법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런 이들도 이토록 쉽게 포탈을 열지는 못했다.
"마법을 좀 배웠나?"
"미천한 실력입니다."
"그리 가볍게 포탈을 열며 미천하다니. 겸손도 지나치면 꼴불견이야."
"하하. 하지만 용사님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소렌의 아부 섞인 진심에 유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카프와는 달리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소렌이 포탈로 사라졌다.
유현은 우두커니 포탈 앞에 섰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포탈의 등장으로 주변의 이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군."
새로운 모험을 떠나기에는 너무 늙은 것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목표했던 미래를 위해서는 별수 없다.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