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
마계.
마족과 마물의 차원.
모든 균열을 닫은 유현은 차원의 경계를 나와 마계로 진입했다.
"예전이랑 똑같네."
유현은 깎아지른 절벽의 끝에 선 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불길하리만치 어두운 하늘.
절벽 아래로 깔린 숲 역시 마기를 뿜어댔다.
마계란 길가의 돌멩이조차 어둠을 품은 곳. 마기에 저항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금세 어둠에 잠식되어 목숨을 잃는 장소다.
"변함없이 재수없는 곳이라니까."
유현은 풍경에서 몸을 돌렸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마계의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목적은 하나. 마지막 남은 마계의 근원을 파괴하는 것.
"대놓고 느껴지는군."
마계의 근원이 있는 곳은 마왕의 생가. 위치는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그 근처로 도착 좌표를 설정했다.
유현은 절벽을 지나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습관처럼 은신 마법을 사용하여 모습을 감추고 기척도 숨겼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 역시 최대한 갈무리했다.
숲에는 마물들이 있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피하고 싶었다.
길을 나아갈수록 마기가 짙어졌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순탄한 여정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유현은 마기가 짙어지는 원인이 단순히 근원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도 인간이다!"
유현은 걸음을 멈췄다.
나무 위에서 수십의 마족들이 내려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근원의 힘인줄 알았더니, 마족이 있었나.'
유현은 은신을 풀었다.
마물이나 수준 낮은 마족의 눈은 속일지 몰라도 이 정도의 마기를 가진 마족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군단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군단장 휘하의 정예 병력은 되는 수준이었다.
"그 따위 어줍잖은 속임수로 우리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유현은 마족들의 면면을 살폈다.
어두운 보라색 빛 피부와 머리에 달린 두 개의 작은 뿔.
마족의 상징과도 같은 특징이었다.
"이놈도 잡아서 데려가자!"
"오늘 밤은 인간 파티다!"
"하하! 오랜만에 별식이로군!"
불을 발견한 원숭이처럼 잔뜩 흥분한 마족들.
마족은 식인을 즐긴다.
인간은 그들에게 훌륭한 식량이었다.
마왕이 죽은 이후로는 인간과 만날 일 자체가 적어졌으니 그들이 흥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오늘 포식을 했을 텐데 말이야."
"뭐라는 거야?"
"마계에 혼자 들어올 정도인데 제정신이겠냐?"
"방금 그놈들의 일행일 수도 있지."
유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마계에 들어온 인간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인간들은 죽였나?"
살아있기를 바랐다.
판대륙으로 넘어가기 전, 그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뭐야. 마족의 언어를 알아?"
"특이한 언어 취향이군."
마족들이 조소를 흘리더니 냅다 공격했다.
마기에 뒤덮인 무기를 앞세워 일제히 쇄도하는 마족들.
유현은 아공간에서 헥톨의 검을 꺼내 들어 가볍게 공격을 흘려냈다.
한 차례 충돌 직후, 유현과 마족들의 위치는 뒤바뀌어 있었다.
마족들이 얼빠진 얼굴로 유현을 바라본다.
"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유현은 당황하는 마족들에게 검을 투척했다.
푸른 빛의 마나를 머금은 헥톨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적들의 몸을 꿰뚫는 검신.
[가속]
검의 질주가 더욱 빨라진다.
마족들은 대처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쯧."
유현은 손에 검을 쥐고는 다시 걸음을 나섰다. 정예 병력 수준의 마족들을 죽였으나 마기는 그 끝을 모르고 짙어졌다.
아무래도 이런 마족 놈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았다.
'생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건가?'
마족 입장에서 마계의 근원은 종족 재건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다.
그런 근원이 있는 생가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것 같은데.'
마족들이 가진 범상치 않은 양의 마기. 모두 근원의 덕일 것이다.
이대로 근원을 계속 방치하면 결국에는 우려하는 일이 다시 벌어질 터.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그나저나 대체 누가 들어온 거지?"
바깥에서도 마족들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챘을 것이다. 아마 마족들이 이야기한 인간들은 용사 파티처럼 그들을 막기 위해 여러 국가가 합세하여 만든 파티일 테고.
하지만 붙잡혔다고 했으니, 계획은 실패였다.
'바깥 사정을 좀 알고 싶은데.'
목소리가 알려주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개념. 대륙의 정세나 자세한 배경 같은 건 모른다.
"서둘러야겠군."
유현은 지상을 걷는 대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시간을 지체하다가 인간들이 죽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우하하하하!"
"죽여라!"
"죽여라!"
얼마 안 가 얼마 안 가 마족의 생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단급 숫저의 마족들이 생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다.
그 캠프의 중앙, 생가의 바로 앞에는 마족들이 원형으로 모여 있었는데 가운데에 몇 사람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아닌데?"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유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파티에는 단순히 인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 인원이 저것밖에 안 된다고?"
아무리 마족의 수준이 전성기 시절 발톱에 때만큼도 못하다지만, 마계가 고작 네 명이 쳐들어올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성직자로 추정되는 인간, 물약 병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드워프, 중장갑을 입은 엘프, 늑대 수인족 울프.
모두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가지긴 했지만, 특출난 수준은 아니었다.
"으하하아아아아!"
마족들은 그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유현은 그들이 추는 칼춤이 음식을 먹기 전에 행하는 의식임을 알고 있었다.
잠시 뒤에는 놈들이 가진 무기가 파티의 목숨을 끊어놓으리라.
'한 번에 끝내야겠군.'
유현은 하늘에 선 채 붙잡힌 파티의 아래에 포탈을 만들었다.
바닥에 파둔 구덩이에 빠지듯, 파티가 땅속으로 쑥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 하늘.
다들 눈을 크게 뜬 채 지상을 바라본다.
"으, 으아아아아악!"
"뭐, 뭐야!"
유현은 그들을 허공에 고정해두고는 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티의 비명을 들은 마족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치고 있었다.
"잘들 가라."
유현은 손가락을 튕겨 준비한 마법을 발동했다.
공격을 날리려는 마족들의 머리 위로 수십의 불덩이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크기와 그에 맞먹는 속도였다.
"그, 근원을 지켜라!"
"도망치지 마!"
"방어를 전개해!"
마족들은 황급히 마기로 방어막을 펼쳤으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콰과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숲은 불바다가 되었다. 생가는 파괴되었고, 군단은 전멸했다.
숲 전체를 집어삼킨 홍염.
생존자가 존재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파괴됐군."
유현은 더 이상의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마계의 근원이라고 해봐야 결국에는 에너지의 집합. 외부의 강력한 충격 앞에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 내가 떠나고 판대륙에선 몇 년이나 지났지?"
이들과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우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대충 천 년은 지났을 거라고 생각한 유현은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600년입니다.]
"지구에서 1년 넘게 있었던 것 같은데 천 년이 안 지났어?"
[두 세계는 단지 시간 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판대륙의 천 년이 반드시 지구의 1년인 건 아닙니다.]
"그럼 내가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나의 힘이 작용한 것도 있지만, 운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돌아가는 것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건가.
유현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구원자 유현이 가진 힘이라면 원하는 시간대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내가 가진 힘을 뛰어넘었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아무튼, 그럼 급하게 처리할 필요도 없나."
빨리 돌아가든 늦게 돌아가든 큰 차이가 없다면 판대륙과의 연결을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다. 관광이나 대륙을 돌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현은 목소리와의 대화를 끝내고 파티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잘린 나무에 둥글게 묶여 있었다. 그래서 유현과 시선을 마주한 건 인간 성직자뿐이었다.
성직자는 흔들리는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 얼굴은 설마..."
"누군데! 나도 보여줘!"
"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거리가 멀어요!"
사제복이 바람에 휘날린다.
성직자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에 의구심이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신을 아는 듯한 눈치에 유현은 씩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겨우 몇 걸음의 간격. 성직자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된다.
"마, 마, 말도 안 돼..."
"세오! 누구냐고! 대체 누군데 이런 마법을 쓰는 거야!"
"요, 용사님 같습니다..."
세오라 불린 성직자는 말을 내뱉고는 멍하니 유현을 바라보았다.
"뭐? 용사?"
"푸핫! 웃기는군! 느닷없이 용사라니!"
"저, 정말입니다! 책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세오는 책에 그려져 있던 용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앞의 남자에게 책의 그림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는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완전히 똑같았다.
"네가 착각한 거겠지. 그게 얼마나 오래된 이야긴데?"
"하, 하지만..."
"정말이라면?"
유현이 목소리를 내자 한순간 파티의 말문이 막혔다.
유현은 세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성직자. 너 방금 책이라고 했지?"
세오가 유현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있습니다!"
유현은 세오의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가죽 표지에 적힌 제목은 [용사의 여정]. 영웅의 서사시를 동화처럼 풀어놓은 것 같은 제목이었다.
"흐음."
유현은 책을 훑었다.
책의 제목대로 용사의 모험기가 적혀 있었다.
단순히 여정뿐만 아니라 용사의 동료와 관련된 이야기들, 용사에 대한 사적인 정보들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보며 유현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헛소리가 이렇게 많아?"
여자를 밝힌다느니, 명령을 거부하면 누구든 죽였을 정도로 냉혹한 성정을 가졌다느니.
하지만 모험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다. 오류가 있는 건 개인 정보 중 일부뿐이었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책에 적힌 대로다."
유현은 그들을 꽁꽁 묶어둔 밧줄을 끊었다. 순간적으로 사라진 몸의 구속에 파티가 호들갑을 떨었다.
"으아아악!"
"떨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다들 당황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왜 안 떨어지지?"
"하늘을 날고 있다!"
"서, 설마 이것도..."
유현은 당황한 세오에게 책을 건넸다. 책에 적힌 건 모두 자신이 걸어온 길이었기에 더 살펴볼 내용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판대륙과 관련된 정보였다.
"지금 판대륙에 상태는 어떻지?"
"마, 마법입니까?"
세오의 물음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싫으면 내려주고."
"아, 아닙니다!"
공중 부양에 적응한 파티들은 하나둘 유현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세오와 달리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이 자가 용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용사가 모습을 감춘 지 600년이나 지났어."
"닮긴했는데..."
보통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세오는 달랐다.
"닮은 사람 아니에요! 제가 용사님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요!"
"그래봤자 그림이잖아."
"크윽! 하지만 제 감이 이 사람이 용사라고 말하고 있어요!"
"확실히 실력만 보면 대단한 자다만..."
엘프 전사가 턱을 매만지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용사님을 들먹일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동의한다. 대마법사라면 모를까."
드워프가 엘프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걸 보고 있던 유현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흘렸다.
"대마법사라. 내가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나?"
"그 정도? 지금 마법사를 모욕하는 거야?"
늑대 수인이 발끈하고 나섰다.
반응을 보아 그는 마법사 같았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질문에나 답해라.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 정도는 되겠지?"
"무, 물론입니다, 용사님!"
"너, 마음에 드는군."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600년 만에 다시 나타났는데도 용사라는 걸 바로 알아봤으니 그 충성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추종자였다.
"자, 그럼 다시 물어보지. 지금 판대륙의 상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