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흐야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수백 개의 칼날이 거대 몬스터의 몸뚱이를 관통했다.
한 번, 두 번.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철퍽.
한때는 몬스터였던 것이 고깃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칼날은 이내 다른 몬스터에게 옮겨갔다.
"흐하하하!"
끝없는 어둠이 드리운 공간.
유현은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몬스터들과 싸웠다.
몇 마리를 죽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따위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적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균열이 닫혔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은 남은 몬스터를 한 번에 죽이고는 서서히 사라지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이제 몇 개 남았지?"
[하나 남았습니다.]
어둠 저편에서 빛이 났다.
유현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암흑을 가르는 길고 커다란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더럽게 크네."
마지막 남은 균열은 빛을 발하며 새로운 몬스터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바퀴벌레처럼 계속해서 쏟아진다. 처음에는 수십 마리였던 것이 이제는 수만 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몬스터의 진입은 멈추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게 마지막에 나오는 거야?"
균열의 크기는 제각각.
균열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숫자와 강함은 크기에 비례했다.
최후의 균열이 하필 최강의 균열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캬아아아아!"
몬스터 군단이 유현을 향해 진격했다. 귀찮음이 가득했던 유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이놈들만 잡으면 이제 끝인가?"
[그렇습니다. 차원의 경계에 존재하던 모든 균열이 수복됩니다.]
"그럼 앞으로는 지구에 게이트가 나타날 일은 없겠군."
판대륙의 일부가 지구와 연결되어 게이트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균열 때문이었다.
균열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자연 발생하는데, 그 균열이 모두 복구되어 지구에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목소리의 설명이었다.
목소리는 앞으로 몇만 년은 더 지나야 균열이 자연 발생할 거라고 덧붙였다.
"게이트는 내가 여기로 넘어온 뒤부터 없어졌을 테니..."
유현이 차원의 경계선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지구에 존재하던 모든 게이트와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지구의 안위를 위해 차원의 경계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덕이었다.
많은 힘을 사용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 시점에 유현은 이미 빛줄기의 힘과 목소리의 힘을 흡수한 상태였으니까.
"몇 년이나 지났지?"
유현은 손가락을 펼치며 시간을 세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가 펼쳐 놓은 수백의 무기들은 자아를 가진 듯 전장을 헤집었다.
"10년 정도 지났나?"
[12년 7개월 27일 12시간 11분 29초 경과 중입니다.]
"이야. 그 시간 동안 지구에 게이트가 없었으니, 헌터들은 죄다 일자리 잃었겠구만."
아니, 차라리 그 수준이면 낫지.
이미 업계 전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걱정되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유현은 전장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몬스터 군단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 일격에 쓸려나갔다.
"뭐, 돌아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유현의 손짓에 또다시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곧장 균열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이 채웠다.
무지막지한 인해전술.
10년 동안 유현은 이런 전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따분한 얼굴로 적들을 착실히 죽여나갔다.
"판대륙에 가볼까 하는데."
전투와 어둠만이 머무는 공간에서 유현이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던 건 목소리의 영향이 컸다.
[판대륙에 말입니까?]
목소리는 천년의 세월과는 달리 유현의 대화에 곧잘 응했다. 그게 질문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지."
제거하지 못한 마계의 근원.
그걸 파괴하지 못하면 오늘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
모든 마족을 죽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그들의 염원이 닿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근원을 파괴하는 게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마계로 가는 건 위험합니다.]
"혹시 몰라? 미래에 또 새로운 마왕이 나타날지."
[구원자 유현이 강한 건 압니다. 하지만 판대륙에 넘어가면 지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딱딱한 음색에 걱정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유현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예전이면 몰라도 이젠 아니지."
차원의 경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던 그때와는 다르다.
목소리가 가진 초월적인 힘.
그리고 페데리코가 남긴 빛줄기를 흡수하며 얻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
그의 특성까지도 흡수하며, 몬스터들의 힘까지 얻은 건 덤이었다.
[방법은 있습니까?]
"네가 알려줘."
[저도 모릅니다. 구원자 유현을 지구로 보낼 수 있었던 건 차원의 경계에 균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수백 개의 불덩이들이 낙하했다.
굉음과 함께 몬스터들 사이에 불꽃이 일었다.
유현은 심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하나 방법을 알긴 하는데..."
틸칸이 남기고 갔던 방법.
이 정도로 강한 힘이 있다면, 안전하게 그 방법을 성공할 수 있다.
"두 세계를 연결할 거야."
목소리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능하겠지?"
[지금의 구원자 유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 통로를 유지하려면...]
"전부 쏟아부으면 될 거야."
[두 세상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지구의 국가들과 판대륙의 국가들이 적대할 수도 있고, 이종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판대륙에서는 이종간의 다툼이 끊임없이...]
"그렇다고 마계의 근원을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목소리는 다시 침묵했다.
유현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언데드]와 [세뇌] 마법의 연계.
쓰러진 몬스터들을 모두 되살려 전장의 아군으로 만들었다.
유현은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여주었다. 군단은 무기를 든 채 아군이었던 적들을 서슴없이 베어나간다.
"두 세계의 차이가 엄청난 재앙을 만들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결국 사람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지."
몬스터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간다. 균열은 끊임없이 몬스터를 토해냈지만, 그 숫자만큼 언데드 군단의 새로운 병력이 늘어났다.
[구원자 유현은 세상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렇다면 왜 위험을 부담하려는 겁니까?]
"믿으니까. 인간도, 이종족도."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세계의 생활을 경험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결말을 정해두고 생각하지 마. 세상은 의외로 잘 섞일 거야."
그 뒤로도 싸움은 이어졌다.
몇 개월이 더 지나고 나서야 마지막 균열이 닫혔다.
유현은 후련한 듯 기지개를 켰다.
"끝났네."
[바로 출발합니까?]
"최대한 빠르게 가야지."
마계의 근원을 남겨두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과 근원을 제거하고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
어느 쪽이든 장단이 존재한다.
유현은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닌 선택을 했다.
"좌표 알려줘."
유현은 목소리가 알려준 좌표로 포탈을 열었다.
"따라오냐?"
[저는 이미 구원자 유현의 안에 있습니다.]
"그럼..."
유현이 포탈로 넘어가려는 순간.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정말 사람들을 믿습니까?]
"몇 번을 물어봐?"
[나의 품에 안겨 있던 세계를 걱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믿어."
천 년. 단순히 운이 좋아 좋은 사람들만을 만났다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을 판대륙에서 보냈다.
유현은 그들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인간도, 드워프도, 엘프도.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관을 위해 투쟁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꼭 통로를 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더라고."
[이유가 있습니까?]
"지구에 마나는 그대로 남아 있잖아."
판대륙에서 지구로 넘어간 마나는 지구의 환경에 맞게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 탓에 유현도 마나의 구조를 바꾸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였었다.
"그럼 능력도 남아 있겠지. 하지만 그 능력을 표출할 상대는 없어졌어. 누군가는 직장을 잃었을 거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직장을 잃은 누군가는 나쁜 길을 선택할지도 모르지. 만약 그런 사람이 전 세계에서 수십, 수백 명씩 생기면, 매일 같이 범죄가 끊기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서 싸운 이유도 사라지는 거야."
[필요악입니까?]
"비슷하네. 몬스터가 피해를 끼쳐도, 결국에는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해."
말을 끝맺은 유현은 포탈을 통과하려다가 다시 멈칫했다.
"넌 모습 같은 건 없냐?"
[저는 개념으로 존재합니다.]
"아쉽네. 직접 볼 수 있으면 쥐어 패려고 했는데."
유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포탈을 통과했다.
그 목적지는 마계 최남단의 가정집. 최후의 근원이 남아 있는 마왕의 생가(生家)였다.
***
어두운 하늘 아래, 도시는 밝게 빛난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12년.
사람들은 한 번도 겪지 못한 현실에 천천히 적응해갔다.
-게이트 없으니까 ㄹㅇ편하네ㅋㅋ
ㄴㄹㅇㅋㅋ 이제 게이트 경보 때문에 지각할 일도 없음.
ㄴ 십새야. 난 직장을 잃었다.
ㄴ누가 헌터하래? 개꿀 빨던 ㅂㄹㅈ새끼
ㄴ게이트 없어져서 좋다는 새끼는 혹시 빌런인가요?
ㄴ빌런 특. 헌터로 일할 때 저축 안 함.
ㄴ그러니까 빌런 짓 하고 다니지.
[대재앙] 이후 헌터들은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그 여파는 반년이 지난 시점에 나타났다.
인프라 회복으로 정신이 없던 각 국가의 정부들은 헌터 관리에 집중할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헌터들 중 일부는 나쁜 마음을 먹고 빌런이 되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들은 능력을 사용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절도는 기본이고 청부 살인이나 범죄 조직에 가담하는 이들도 있었다.
"서쪽 120 방향으로 간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빌런의 숫자에 특수 경찰의 숫자 역시 증가했다.
박봉 월급제의 공무원이었지만, 능력을 사용하여 정당하게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헌터들이 지원했다.
이제는 폐쇄된 아카데미의 유망주들은 물론 높은 등급의 헌터들까지.
한서희 역시 그중 하나였고, 이제는 10년 차 공무원으로 여전히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반대! 240! 옥상! 뛴다!"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귀 마석 일명 '토끼발'을 절도한 빌런이 빌딩의 옥상을 달렸다.
한서희는 그 뒤를 쫓았다.
"그만 쫓아와!"
"그럼 보석 내놔!"
"이런 씨댕!"
빌런은 거침없이 난간을 뛰어넘었다.
한서희는 난간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보가 틀리잖아! 비행 능력자야!"
지상으로 추락할 줄 알았던 빌런은 감춰두었던 날개를 펼쳐 하늘을 비행했다. 뒤를 바라보며 조소를 날리는 건 덤이었다.
"하하하! 쫓아오느라 고생 많았다!"
졸지에 닭쫓던 개가 된 한서희.
빌런의 조롱에 그녀의 눈빛에 분노가 타올랐다.
"좌표, 243, 221. 저격한다. 잘 받아."
무전기 너머로 무어라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서희는 한 귀로 흘린 채 전방으로 손을 올렸다.
총을 쏘듯 손가락을 펼치고, 한 쪽눈을 감아 그 끝을 빌런에 조준한다.
"흐히히! 이것만 있으면 몇 년은..."
푸푹!
신나서 날아가던 빌런의 날갯죽지를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꿰뚫었다.
"어, 어?"
몇 발의 얼음송곳이 날개에 더 박혔다.
날개가 힘을 잃자 빌런이 아래로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아!"
빌런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무언가 터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휴."
한서희가 난간 너머로 지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빌런이 떨어진 위치는 정확히 그녀가 무전한 좌표였다.
그곳에는 미리 에어 쿠션 능력을 가진 구조대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보석 회수했어.
"다행이네."
-그 좌표부터 말하고 보는 것 좀...
"뭐 어떡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지체했으면 놓쳤어."
한서희는 무전을 끊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지 10년.
그녀의 성격은 제법 바뀌어 있었고, 행동에도 망설임이 사라졌다.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범죄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서희는 옥상을 나와 지상으로 내려갔다.
질끈 묶은 머리와 피로에 찌든 얼굴. 검은 양복을 착용한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한때 SNS에서 인플루언서로 유명했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후우."
한 빌딩 앞 흡연장.
한서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빌런에게 인질로 붙잡혔다가 강제로 배우게 된 담배는 망가진 삶의 사소한 해방구가 되었다.
"슬슬 그만할 때가 됐나."
그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높이 솟은 빌딩은, 이제는 사라진 소나무의 모기업이었던 송진 그룹의 사옥이었다.
"저 사람 한서희 아니야?"
"에이, 저게 어딜 봐서 한서희냐?"
"닮은 것 같은데..."
이제는 대놓고 담배를 태워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집안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자의 말로라면 말로였다.
"언제든 돌아오라고는 하셨는데..."
여전히 정정한 할아버지이자, 송진 그룹의 회장, 한정수.
그녀가 공무원을 선택했을 때, 할아버지는 몹시도 화를 냈다.
한서희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그 뒤로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는 할아버지의 전화였다.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한서희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사람이 사라진지 12년.
세상에 그의 희생이 알려졌지만,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
한서희는 사랑하는 이의 헌신으로 얻은 평화에 큰 위화감을 느꼈다.
이게 맞는 걸까.
평범하게 살아가도 되는 걸까.
그저 기억하기만 하는 걸로 충분한 걸까.
고뇌 끝에 그녀가 선택한 건 탄탄대로에서 벗어난 길이었다.
마지막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그를 다시 봤을 때, 당신이 싸울 때 나도 싸웠다고 말하기 위해서 선택했다.
"......"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의 마음 가짐은 흐릿해졌다.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해보지만, 그때마다 자기 혐오감이 몰아쳤다.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러는 거야?
"하아."
긴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차디찬 겨울.
오늘따라 마음조차 시린 기분이었다.
한서희는 흡연장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결연한 얼굴로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차리자.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계속 기다릴 거야."
서른 살. 청춘의 유통기한은 진즉에 끝났지만, 그날의 약속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뭐야? 저거 봐봐."
"우와. 뭐 저런 게 생겼대?"
한서희가 그 소리를 들은 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커플의 감탄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둘 전광판으로 향했다.
한서희 역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저기는..."
지금은 폐쇄되어 방치된 아카데미의 건물.
과거의 추억이 담긴 장소가 전광판에 송출되고 있었다.
전광판의 하단에는 한 줄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12년 만에 게이트 등장. 위치는 아카데미 상위 클래스의 광장]
아카데미를 전체적으로 비추던 화면이 이내 광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나뒹굴고, 관리되지 않는 광장에 덩그러니 있는 붉은 빛의 게이트.
사람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뱉어낼 때, 한 사람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 아..."
그것은 단순히 게이트의 등장을 알리는 속보였다.
하지만 한서희에게는 12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도착한 희망이자 이정표였다.
"여."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고 길을 건넜지만, 한서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잘 지냈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12년이 지났고, 조금 늙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귀에 익은 목소리.
한서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흐르는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진 시야. 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왜 이제야 왔어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