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페데리코의 몸에서 암흑의 기운이 솟구쳤다.
지독하리만치 어두운 어둠이 한순간에 주변을 집어삼켰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번데기처럼 어둠에 뒤덮인 페데리코.
유현은 공격을 날렸지만, 그 공격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기."
마기(魔氣). 마족들의 원천이 되는 힘으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지난번의 그 정령인가."
생명력을 매개로 움직이는 정령에게 똑같이 생명력을 나누어 준 상태였다면, 페데리코가 맥없이 당한 것도 이해가 된다.
유현은 페데리코를 경계하며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더 많은 마법이 섞인 혼합 마법진.
그리는 데에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둠에 삼켜진 페데리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도 막아봐라."
유현은 페데리코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유현의 몸에서 빠져나간 마나가 대기의 마나와 뒤엉키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자연의 마나는 애당초 마법에 활용될 수 없다.
하지만 새롭게 짜여진 마법은 자연의 마나를 강제로 붙들고 늘어졌다.
섞이고 엉키며 강해지는 마법.
어느새 거센 폭풍이 완성되었다.
번개가 번쩍이고, 불꽃이 타오르며, 총알처럼 빠른 수십의 물줄기가 내려꽂히고, 바위가 떠도는 폭풍.
일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크기를 키워가던 폭풍이 구체로 압축되었다.
구슬처럼 작아진 폭풍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수십의 마법.
그 폭풍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페데리코를 집어삼켰다.
"...반응이 없군."
억지로 버티는 걸까.
유현은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지켜보았다. 마법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아무리 페데리코라도 저 안에서 무사하지는 못할 터. 언제까지고 어둠 속에서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리고 곧 예상대로 반응이 왔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펑!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풍의 구슬이 사라졌다.
이어서,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푸른 하늘도 멀리 솟은 초목도 붕괴된 건물이 널브러진 지상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컴컴한 어둠, 어둠, 어둠.
순간 유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성보다 먼저 꿈틀거린 본능.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곧 세상에 닥칠 위험에 반응했다.
"대체 무슨 짓을..."
이 정도로 거대한 위험을 감지한 적은 손에 꼽았다. 마왕 부대에게 기습당했을 때나, 마왕과 직접 마주했을 때 정도.
"페데리코!"
유현은 사방으로 공격을 날렸다.
모든 공격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젠장."
이 정도로 마기를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유현은 주변을 살폈다. 암흑이 사위를 뒤덮은 공간. 일종의 필드 마법과 비슷하다.
"파훼하는 방법은...
더 강한 힘으로 마법을 깨부순다.
유현은 코어의 박동에 박차를 가했다. 더 많은 양의 마나가 더 빠른 속도로 체내를 질주한다.
[아공간 전이]
유현은 아공간에서 기다란 창을 뽑아냈다.
그 끝이 뭉툭하고, 길이는 짧은, 창 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운 형태.
하지만 이것은 창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수많은 적장의 몸뚱이를 꿰뚫은 창.
마나를 품은 채 무언가를 꿰뚫는 것에 최적화 되어 있어, 단독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무기.
그렇기에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도 부탁한다."
강렬한 푸른 빛이 창에 깃들었다. 헥톨의 검 이상의 마나 감응력을 가진 창. 그럴듯한 이름이나 역사적인 전승 같은 건 없다.
오직 마나를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무구였다.
창대가 부서져라 움켜쥔 유현은 팔을 치켜들었다.
창끝에 겹겹이 쌓인 마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격동했다.
끝이 뭉툭한 창은, 마나에 뒤덮이며 무엇보다 예리한 날을 품었다.
유현은 그 끝을 허공을 향해 조준했다.
"뚫어라."
강화된 팔의 근육이 한순간 팽창했다.
창이 푸른 빛의 잔상을 남기며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날아갈수록 더욱 넓게 퍼지는 마나의 꽁무니.
푸르게 그려진 그 모습은 종국에 다다라 마치 폭이 좁은 화살표처럼 보였다.
직후, 이곳이 너의 길이라고 안내하듯 화살표가 어둠을 꿰뚫었다.
하얀빛이 새어 들어옴과 동시에 유리창이 깨지는 것처럼 어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부서진 어둠이 다시금 빛을 좀 먹어 들어갔다.
[에어]
유현이 허공을 박찼다.
어둠이 다시금 세상을 잠식하기 직전, 유현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발아래로 펼쳐진 창공.
예상대로였다. 몇 점의 구름보다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본 지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붕괴하는 도시와 불타오르는 이름 모를 산과 숲들.
페데리코와 그 부하들의 마수는 어느새 저 멀리에 있던 도시까지 뻗어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가려던 유현은 지상 곳곳에 나타난 일렁거림을 발견하고 멈췄다.
테두리가 존재하지 않는 게이트가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게이트까지 만들어 낸다고?"
유현이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서 싸우는 건 문제 없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쓰며 싸울 여념은 없다.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일단은..."
페데리코가 데리고 있던 마계의 정령. 그놈이 가진 마기는 일반적인 마족 수준이 아니었다.
진가를 발휘한다면, 마왕에 근접할지도 모를 강력한 힘. 페데리코와 그놈을 혼자서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신성력이 필요해.'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신성력이 필요하다.
유현은 엘레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피신한 미르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르가 마나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며, 그 몸에 마법을 새기는 것도 가능해졌다.
원격으로 복잡한 명령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간단한 의사는 전달할 수 있다.
미르 정도의 신성력과 마력이라면, 페데리코를 상대로 페어를 이루어도 손색이 없다.
"엘레나와 함께 이곳으로 와."
엘레나에게는 위험한 전장이었다. 하지만 페데리코가 살아 있는 이상 그녀를 다른 곳에 두는 건 더 위험했다.
미르에게 명령한 뒤, 유현은 지상으로 낙하했다.
게이트에서는 어느새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테두리가 없기에 사냥형 게이트인지, 던전형 게이트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상황. 게이트의 보스를 죽이고 게이트를 닫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으아아아악!"
시민을 덮치려던 그린 오우거의 머리통이 터졌다.
유현은 포탈을 열어 그 안으로 학생을 던져 넣었다.
"크아아아아!"
"우어어어어!"
곳곳에서 몬스터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비명도 들려왔지만, 유현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이런 자잘한 잠몹이 아니다.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우며 나아가는 페데리코를 막아야 했다.
"정신 나간 새끼 같으니라고."
정정당당한 싸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식의 난동은 원치 않았다.
유현은 이를 뿌득이며 발을 튕겼다. 무너진 잔해를 뛰어넘으며 날아올라 순식간에 페데리코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의 주변에는 페데리코를 보호하듯 수백 명의 부하들이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유현이다!"
"막아!"
"공격해라!"
유현을 발견하고 소리치는 적들.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무시한 채, 유현은 술식을 그리고, 발동했다.
[썬더 오브 갓]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
창공을 뒤덮은 먹구름 속에서 내려친 뇌전이 서로 뒤엉키더니, 이내 강력한 전격을 방출했다.
콰르릉!
우레와 함께 빛의 줄기가 수백 명의 몸뚱이에 작렬했다.
강에 전기가 흘러 수백 마리의 물고기가 동시에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처럼, 수백의 인원이 동시에 추락했다.
그런데도 페데리코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더 뚜렷하게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유현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망토처럼 나풀거리는 암흑.
그것을 등에 두른 채 나아가는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마왕?"
아니, 마왕일 리가 없다.
뒷모습과 그 느낌이 닮았을 뿐.
'그래, 말이 안 되지. 마왕은 내가 죽였으니까.'
하지만 왜인지, 머릿속에서는 불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왕을 죽였을 때 그가 남겼던 말이 되살아났다.
-이게 끝이 아니다.
왜 마왕은 끝이 아니라며 여지를 남겼을까.
허세였겠지. 허세여야 한다.
만약 마왕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면...
"유현."
등을 보이고 나아가던 페데리코는 어느새 그의 앞에 있었다.
유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페데리코의 반쪽. 얼굴과 육체의 절반이 칠흑 같은 어둠 일색이었다.
"너는 어둠을 기억하는가?"
유현은 페데리코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공격을 막은 건 망토라는 실체를 가진 어둠이었다.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이 어둠은 너를 기억한다는군."
"닥쳐!"
사방에서 나타난 무기와 발현된 마법이 페데리코에게 동시에 쇄도했다.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망토가 펼쳐졌다. 우산이 펼쳐지듯 어둠이 한순간 주변을 뒤덮었다.
공격은 소리도 충격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은 말한다. 끝이 아니라고 했었지."
"...!"
"그런가. 이 어둠이 용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왕이었나."
펼쳐진 어둠의 안쪽. 수백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하얀 공막 위로 나타난 붉은 동공. 각막의 색은 검었다.
유현은 이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마왕."
"어둠이 말하길, 죽음에서 태초로 돌아갔다는군. 동족의 원념과 염원은 다시금 그의 영혼을 일깨웠고."
"......젠장."
완전히 죽은 게 아니었나.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이 다시 태초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까.
"이 자가 나에게 어둠을 주겠다고 한다. 판대륙을 암흑의 시대로 몰고 갔던 그 힘을."
그 말을 들은 순간, 유현의 머릿속으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아직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유현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분명 후회할 거다."
"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 속으로 불타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크하하하하하하!"
페데리코의 폭소가 정적을 깨뜨렸다.
한참을 웃어대던 그는 눈물을 닦는 시늉마저 했다.
"후회? 내가?"
"마족의 힘은..."
"강한 힘에는 부작용이 뒤따르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그런 내가 후회?"
페데리코가 망토의 암흑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둠과 하나가 된다. 어둠은 네게 파멸을 안겨줄 수만 있다면 기어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군."
"갈 때 까지 갔구나, 마왕."
"이미 패배한 시점에서 자존심 같은 건 버렸다는군."
페데리코의 손이 망토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 손에는 어둠에 물든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막대한 마기가 담긴 마왕의 근원. 정확히는 마왕이었던 마령의 근원. 한없이 어둡고,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했다.
'과거와 같은 힘은 아니야.'
전성기 때보다 몇 배는 약해진 힘. 하지만 여전히 강한 전력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유현은 페데리코를 말리지 않았다. 그 심장이 입 안으로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포기한 건가?"
페데리코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섭취한 심장은 금세 그 영향력을 드러냈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암흑의 기운. 그가 등에 망토처럼 두르고 있던 어둠은 그 형태를 달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줄곧 심각함을 연기하던 유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느껴진다... 세상을 뒤엎을 힘이...!"
페데리코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어둠은 검의 형태가 되어 페데리코의 손에 들렸다.
과거 마왕이 어둠을 사용하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제 어쩔 거지?"
태연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유현.
유현의 표정을 보며 페데리코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비로소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놈을 찢어 죽일 거다. 그리고 그 힘을 흡수하여, 차원의 경계선을 무너뜨려야겠군."
"그다음은?"
"하나가 된 세상에서 더 거대한 힘을 흡수하고, 모든 종족을 절멸할 것이다."
유현은 피식 웃었다.
"악당다운 계획이네."
페데리코가 미간을 구겼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거늘, 유현에게서는 이전에 느껴지지 않던 여유마저 느껴졌다.
"포기하다 못해 체념한 건가?"
"네가 간과한 게 몇 개 있어."
유현은 페데리코가 의문을 표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우선 네가 흡수한 마왕의 힘은 전성기때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것."
"상관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니."
유현이 검지에 이어 중지를 펼쳤다.
"둘. 마왕도 신성력에는 무적이 아니었다는 것. 네 몸에 섞인 마기는 신성력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야. 하지만 신성력에 영향을 받으면 몸뚱이에도 큰 영향이 가는 양이긴 하지."
"그래서 어쩌란 건가? 신성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현이 세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간과한 점이다."
"뭐?"
유현의 시선이 페데리코의 뒤를 향했다.
[투명화], [은신], [사일런트], [잠입], [카멜레온].
온갖 마법으로 기척을 죽이고 다가온 미르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왜 신성력이 느껴지는..."
페데리코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많이 먹으면 체 해, 등신아."
[홀리 브레스]
미르의 입에서 성스러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