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레, 레드?"
"안녕~"
천천히 다가오는 레드.
유현은 엘레나를 뒤로 당기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이상 다가오면 죽인다."
"살벌한데?"
"경고는 한 번뿐이야."
레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죽일 거잖아?"
"눈치는 빠르군."
"말해봐. 대체 어떻게 알았어?"
"직감이지."
싸한 기운을 느꼈지만, 처음부터 의심한 건 아니었다.
다만 미스틸과의 대화로 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추려졌을 뿐이었다.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하던 대로 돈만 빼먹으면 될 텐데."
"뭐겠어?"
레드의 시선을 받은 엘레나가 흠칫하며 유현의 뒤로 몸을 숨겼다.
"엘레나를 데려가려면 직접 오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텐데."
"겸사겸사하는 일이지. 그분이 내린 명령이 네 감시였거든."
"음침한 새끼."
유현은 페데리코와 레드를 짓씹으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선 너부터 죽여야겠다."
"미안하지만, 싸울 생각은 없어서."
"그건 내가 정해."
영국 헌터 업계에 닥친 문제의 원인. 놈을 잡고, 관계자를 알아내면 다시 정상화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전리품. 진짜 목적은 페데리코의 전력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런 놈이 하나는 아닐 테고.'
단순히 케이디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던 간부들을 제외하고도, 페데리코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는 부하들이 있던 모양이다.
그 숫자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몇 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몇 백명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몇 명이든 방해가 될 거라는 점. 그 숫자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왕이면 놈의 본거지도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군.'
놈은 어디서든 습격해올 수 있지만, 이쪽은 불가능하다.
주도권이 완전히 페데리코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
페데리코의 능력을 생각하면, 주도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가 지속될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
유현은 레드를 향해 마법을 발동했다.
[마비]
산맥의 찬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검은 에너지.
마비의 힘이 담긴 마법이 레드에게 닿기 직전 위로 솟구쳤다.
"풋. 고작 그딴 마법에 당할 줄 알았어?"
"페데리코가 많은 걸 가르쳐 줬군."
유현은 전신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이윽고 발을 튕겨 레드에게 쇄도했다.
후웅!
뻗은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레드는 어느새 저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분에게는 정말 많은 걸 배웠지. 예를 들어, 이런 것도."
레드가 허공에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에 맺힌 푸른 빛의 마나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
마법의 사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술식, 다른 하나는 마법진이었다.
술식은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그 형태를 그려내 곧장 발동할 수 있다. 일종의 암산 같은 느낌이다.
반면, 마법진은 정해진 형태가 있다. 그 복잡한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려야 마법을 발동할 수 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방법인데.'
마법진은 단순히 도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흡사 어린아이의 낙서라고 생각될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킨 형태였다.
외우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며, 보통은 종이를 들고 다니다가 그 종이를 보고 따라 그려 마법을 발동했다.
'저걸 자리에서 바로 그려내다니.'
그 마법진의 형태를 유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기초 마법의 하나인 [연기]였다.
펑!
폭발과 함께 피어오른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리 큰 범위를 가리지는 않았다. 마법진은 형태가 제한된 만큼 부여할 수 있는 마나에도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붙어보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멀리서 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유현은 그를 보내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윈드]
바람을 불러와 연기를 몰아냈다.
레드는 어느새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유현은 혀를 차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를 뻗어 그 끝에 레드를 조준한다.
[정밀 타겟]
[좌표]
멀어지는 레드를 타겟팅하고, 그 좌표를 추적한다.
머릿속에 놈의 이동 경로가 입력되었다. 이동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레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그 경로는 보나마나 일직선이었다.
'다음 경로는 여기로군.'
유현은 놈이 이동한 경로를 파악하여 그의 다음 경로를 예상했다.
[순간이동]
포탈과 달리 좌표만으로 대상을 이동시킬 수 있는 마법.
유현은 마법을 사용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어중간한 거리를 두고 놈의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
놈이 그 경로에 도달하기 직전.
그때 이동해야 놈을 완벽하게 잡을 수 있다.
'지금.'
유현이 시동을 걸어둔 마법을 발동했다.
한 순간 사라진 그의 모습은 예상했던 경로 위에 다시 나타났다.
레드의 몸이 그를 향해 빨려들 듯 날아오고 있었다.
뒤늦게 유현을 발견한 레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급히 방향을 틀려 했지만, 이미 유현의 사거리 내에 들어온 뒤였다.
덥썩.
유현은 앞으로 손을 뻗어 막 날아온 레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상대를 봐 가면서 수작질해야지."
레드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눈빛에 담긴 당혹감과 의문. 어떻게 자신의 앞에 나타났냐고 묻는 눈치였기에, 유현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경로를 예상하고, 순간이동했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유현이 손 아귀에 힘을 준 탓이었다.
호흡기의 압박 속에서 조여오는 숨통.
레드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쇠사슬]
허공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이 레드의 사지를 붙들고 몸통을 휘감았다.
이윽고 레드의 거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한 줌의 숨을 되찾기 위한 격렬한 생존 의지였으나, 유현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살고 싶나?"
처절한 몸짓만 봐도 대답은 알 수 있었다.
유현은 아귀의 힘을 살짝 풀어주었다.
"켈록!"
미친 듯이 기침하는 레드.
숨소리는 거칠다 못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쉽게 죽이는 편이 아니니까."
레드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럴 리가 있나."
"정말이야."
줄곧 가벼운 느낌을 풍기던 구릿빛 피부의 붉은 머리 청년은 여유를 잃었다. 그가 풍겨오던 호승심은 거세당한 것처럼 싹둑 잘려 나갔다.
"너 같은 놈이 몇 명이나 있지?"
"몰라."
"페데리코의 아지트는 어디지?"
"그것도 몰라."
유현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알지만, 내가 누군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군."
[라이트닝]
유현은 쇠사슬에 전기를 흘려보냈다. 뼈와 살을 분리하는 듯한 격한 통증이 레드의 온몸을 들쑤셨다.
"크아아아악!"
"다시 묻지."
유현이 전기 충격을 멈췄다.
레드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너 같은 놈이 몇 명이나 있냐."
"......"
레드는 침묵하더니 아래로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실핏줄이 터져 흰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다."
레드의 입 안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마치 그 놈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아지트는?"
그때, 레드의 동공이 뒤집혔다.
핏줄이 터진 탓에 뒤집힌 눈의 색은 불길하리만치 붉었다.
유현은 그의 몸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악취미군."
"고문보다야."
앞으로 한껏 고개를 내민 채, 입을 열고 닫는 레드.
그건 마치 실에 연결된 인형을 조종하는 것처럼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눈앞의 레드는 더 이상 레드가 아니었으니까.
"페데리코."
"기껏 키워놨더니만, 전부 불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아무래도 레드는 아지트를 털어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걸 눈치챈 페데리코가 그의 몸에 빙의한 것이다.
"내 선물은 즐거웠나?"
"그 덕에 이 고생 중이지."
"풋. 얌전히 기다려라.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갈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레드의 몸이 축 늘어졌다. 얼굴의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대량의 혈액이 빠져나왔다.
"......"
부하라고 해봤자, 결국에는 버림 돌이란 건가.
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레드의 몸을 잡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아래로 추락하는 레드의 몸뚱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죄인의 등을 따라간 벌이라면 벌이었으니.
"이런 식으로도, 놈의 힘이 느껴지는구만."
페데리코는 지난번보다 더 강해졌다. 과연 대단한 성장 속도였다.
이미 정상에 오른 힘이건만, 그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솟아오른다니. 정말이지 불공평한 능력이다.
"...그래도 아직은 비벼볼 만한데."
중요한 건 새롭게 얻은 능력의 활용이려나.
특히 사령술은 여러 조건에 따라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어떤 전장에서 싸우느냐가 중요하겠군.'
지금부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그 상황의 형세를 예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
그 후로 일주일.
유현은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화 게이트의 소탕을 마쳤다.
총리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뛸 듯이 좋아했다.
비공개 파티라도 하자고 소리쳤지만, 유현은 거절했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한국에서 실습도 해야 하고, 게이트도 돌아봐야 하고.'
그리고 틸칸이 남기고 간 책에서 얻은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도 한 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위치도 한국이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었다.
"아, 맞아."
집무실을 나가기 전, 유현은 총리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레드는 죽었어. 내가 죽인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그놈 뒤를 잘 조사해봐. 밖으로 세는 세금의 꼬리가 잡힐 테니까."
유현은 총장의 굳은 얼굴을 뒤로 하고, 엘레나와 함께 포탈을 넘어왔다.
그렇게 도착한 기숙사.
엘레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펜트하우스도 펜트하우스지만, 역시 그간 살아온 기숙사만큼 편한 곳은 없었다.
"공장은 왕대길 씨한테 맡겨놓고."
벨이 울린 건, 유현이 할 일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딩동!
인터폰을 확인하자 한서희의 얼굴이 보였다.
왜인지 단단히 화가난 것 같았다.
'......'
이럴 때는 열어주지 말아야지.
저 화를 감당하고 싶지도 않고, 지금은 혼자서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 뒤로 벨은 몇 번인가 더 울렸다. 유현은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엘레나를 돌려보내고는 인터폰을 살폈다.
"드디어 갔군."
하여간 끈질기다니까.
답이 없으면 사람이 없구나 생각하고 돌아가야지, 쯧.
유현이 혀를 차며 몸을 돌린 그때였다.
쨍그랑!
커다란 돌덩이가 베란다의 창문을 깨고는 거실 바닥에 떨어졌다.
"......"
유현은 말없이 한때는 창문이 존재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창문 일부가 깨진 게 아니라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는 창틀밖에 남지 않았다. 돌에 마나라도 담아서 던진 모양이다.
"하, 있었으면서 대답을 안 하네."
한서희가 베란다로 다가왔다.
유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너 이게 대체..."
"잡아봐요."
1층이었지만, 베란다까지는 조금 높이가 있었다. 한서희는 당당하게 손을 뻗으며 잡아달라 말했다.
"이런 미친년이..."
"뭐, 미친놈아."
평소의 그녀라면 입에 담지 않았을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유현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올렸다.
"후.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왔다갔는 줄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창문을 깨는 건..."
"당신이 집 안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심장 마비나, 뭐, 기타 등등의 이유로!"
"......"
한국에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건 아마 열흘 정도 전의 일.
그때 이후로 열흘의 공백이 생겼으니, 걱정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잠깐 일이 있었어. 지금 막 돌아온 거야."
"무슨 일이요?"
"그것까지 말해야 하냐?"
"할 필요 없죠. 그럼 저도 왜 왔는지 말 안 할래요."
"안 듣고 싶은데."
한서희가 미간을 구겼다.
"당신이 우리 길드에 맡겨두고 잊은 게 있지 않나요?"
"뭐? 내가? 뭘 맡겨 뒀는데?"
"말했잖아요. 말 안 한다고. 당신도 듣기 싫다면서요."
한서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처럼 왜 그래?"
"애 맞는데요?"
"사춘기냐?"
"그런가 보죠."
평소에 어른스럽던 그녀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왜 그렇게 뿔이 난 건데."
"여러 가지 이유로요."
"말해봐."
"우선 책임감의 부재. 스카이 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보낸 케이디 단원들은 언제까지 우리가 맡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공사장에서 있던 일은 왜 설명을 안 해요? 또 뭐가 있냐면..."
유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멈췄다.
"맞는 말이네."
"뭐부터 해결할래요?"
"......우선 애들부터 보러 가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 사람. 호야와 미우. 두 사람은 결코 적이 아니었다. 아니, 설령 적일지라도, 이니티움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교화시켜야 한다.
"혜빈이가 고백했다면서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하고 다녀?"
"우리 제법 친하거든요."
"그래서 성격이 옮았나 보군."
유현은 그날 한서희의 손맛이 제법 맵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