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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이 보상으로 받은 건 단순히 포션 공장에 그치지 않았다.
"와!"
런던 시내에 위치한 고층 빌딩.
그곳의 정상 부근에 있는 고급 펜트 하우스는 유현이 보상으로 얻은 새로운 주거 공간이었다.
"계약은 네 명의로 해달라고 했어."
"헉! 그럼 제 집이에요?"
"영국에 자주 올 거 아니야."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왜요?"
"고향이잖아."
"여기에는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걸요."
유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뭐, 그러면 가끔 같이 놀러와서 쓰면 되겠네. 다른 애들도 데려오고."
"좋은 생각이에요! 어떻게 꾸밀까요?"
엘리스가 텅 빈 펜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상당히 넓은 탓에 그녀의 탄성은 점점 멀어졌다.
"좋은 곳으로 구해달라니까 진짜 좋은 곳으로 구해줬네."
어중간한 꼼수라도 쓸 줄 알았는데, 요구 사항에 최선을 다했다. 그만큼 상황이 시급하다는 뜻이겠지.
"상황이 그 정도로 안 좋나?"
유현은 스마트폰을 꺼내 현재 영국의 헌터 구출 현황을 살폈다.
10% 남짓으로 무척 지지부진했다.
'길드들이 잘 협조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이군.'
한국과는 달리 영국의 길드들은 정부의 요청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게 당연했다. 아무리 좋은 혜택을 준다고 해도 목숨 값에 비하면 못한 법이었으니까.
"그냥 한국이 특이한 건가."
협회의 공문에 큰 반발 없이 따른 대한민국의 길드들.
거부한 곳도 있지만,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국민성의 차이인가."
영국의 길드 중 구조에 참여한 길드는 고작 몇 곳.
그 외에는 모두 개별 헌터들이 응집하여 만들어진 구조대였다.
이는 단순히 영국에 국한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위에서 휘어잡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가 명령을 강제하지 않거나, 엄청난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닌 이상 정부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민간의 주도다.
대형 길드 한 곳이라도 총대를 메고 나섰다면, 지금처럼 구조율이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놈들 중 한 명이라도 나섰으면...'
유현은 엘레나의 입학을 위해 총리와 담판을 지은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연회장에서 봤었던 여러 헌터들. 고작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유현은 그들의 수준을 인지했다.
'강해.'
한 국가의 최강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살기에 겁을 먹었지만, 호승심을 드러내는 녀석도 있었다.
'분명 그놈들이 길드의 마스터들이겠지.'
대체 지금 뭘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런 떄일 수록 본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질 터인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행동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
"결국 손해 보는 건 본인들인데 말이야."
헌터들의 죽음. 게이트의 폭주 등. 현재 발생한 여러 문제는 결국 국가의 침체를 낳는다.
국가의 경제가 나빠지면, 헌터들의 수입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총리가 길드들의 정예를 뽑아서 붙여 주겠다고 말했었다.
헌터들의 동의가 있었으니 그런 말을 했을 터.
'전면적인 구조 활동에는 나서지 않으면서, 정예 선발에 응한 이유는 뭐지?'
이것도 그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
전화를 받은 유현은 엘레나와 함께 총리가 말한 장소로 향했다.
런던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도시권인 리버풀이었다.
"길드는 각성하라!"
"이 겁쟁이들아!"
게이트로 향하는 길목.
시위 중인 군중이 길을 꽉 막고 있었다. 곳곳에 횃불이 피어올랐고, 저마다 팻말을 들고 있다.
상당히 살벌한 분위기의 시위였다. 막고 있는 경찰이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쳐들어가 헌터들에게 매타작이라도 할 기세였다.
"무, 무섭네요."
"화날 만하지."
보아하니 이들은 게이트에 갇힌 헌터들을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으로 둔 사람들인 것 같았다.
헌터들의 방관에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아니,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지 않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떻게 들어가죠?"
"꽉 잡아."
"꺅!"
걸어 들어가려던 유현은 엘레나를 팔에 끼어 들고는 훌쩍 뛰어넘었다.
"헌터다!"
"저 개자식!"
"빨리 내 동생을 구해!"
유현의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헌터의 등장에 사람들은 흥분했고, 시위의 분위기는 더 격렬해졌다.
"어, 어떡해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잘 막겠지."
엘레나는 유현의 팔에 끼인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저기 있군."
게이트가 있는 곳은 항구였다.
평소라면 사람으로 붐볐을 항구였지만, 지금은 썰렁하다 못해 쥐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의 영향으로 입출항이 통제된 탓이었다.
"아무도 없나?"
여기로 가면, 호출한 길드의 정예들이 있을 거라고 총리가 말했는데.
"저쪽에 있는 것 같은데요?"
유현의 팔에서 내려온 엘레나가 입출항 관리소를 가리켰다.
몇 명의 사람들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유현은 알 수 있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사람 중 몇 명이 저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을.
'...위험한 놈이 있군.'
멀리서부터 살기를 흘리며 다가오는 인물.
유현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몸은 얇았고 빨갛게 물들인 머리는 뒤로 묶은 꽁지 머리였다.
"여."
가장 먼저 유현의 앞에 도달한 남자가 유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푸른색의 눈동자가 느끼하게 번들거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그냥 가서 아쉬웠어."
남자가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그때 있었군."
"옆에는 누구?"
"엘레나를 모르나?"
"내가 관심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서."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빨리 잡아달라는 행동이었지만, 유현은 그에 따르지 않았다.
"서운한데."
"얕은 수작 부리기는."
유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레나. 씩 웃으며 손을 거둔 남자는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
손가락에 붙은 압정을 보며 엘레나가 입을 가렸다.
"뭘 그렇게 놀라?"
"아, 아군 아닌가요? 왜 이런 짓을..."
"아군 같은 소리 하네."
엘레나의 물음에 답한 건 남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다가온 사람들.
그중 근육질의 여자가 남자의 옆에 섰다.
"유현. 넌 대체 왜 다른 나라의 일에 끼어드는 거지?"
여자는 유현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왜기는. 받은 게 있으니까."
"거래를 한 건가?"
"그런 셈이지."
여자가 팍 인상을 찌푸렸다.
"네 놈 때문에 계획이 엉망이 됐잖아. 거의 다 됐는데."
"계획?"
그때, 뒤에 선 청년 하나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돌린 여자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말쑥한 모범생 느낌의 청년이 여자를 대신해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유현. 우리는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구성된 특수 구조대입니다. 다들 유명한 길드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유현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몇 명은 지난번에 스치듯 봤고, 몇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개중에는 가면을 써서 얼굴 전체를 가린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삭막하군. 나 때문인가?"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할게요."
유현의 의문에 청년은 되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뜬금없이 거래?"
"영국의 헌터 구조율이 낮은 이유가 뭔지 압니까?"
"길드가 협조를 안 해서?"
"왜 협조를 안 하는지는 생각해 봤습니까?"
"이득될 게 없으니까."
청년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람들을 구하는 건 본전이죠. 우리는 본전이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영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득이라면 어떤 이득? 돈?"
청년은 쓰고 있던 무테안경을 추켜 올렸다.
"비슷하죠. 지금 영국의 헌터 산업에 부가되는 세율은 40%입니다. 이는 곧 인재의 유출과 헌터 시장의 쇠퇴로 이어지고 있죠."
"그래서?"
"이번 일을 빌미로 세율을 조정해달라는 요청을 보냈습니다. 정부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지만, 우리가 원하는 선까지는 아직인지라, 이렇게 국소적인 도움만을 주기로 일단은 합의했습니다."
유현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의도가 다분히 담긴 실소였기에, 몇 사람이 곧장 반응했다.
"뭐냐, 그 반응은!"
"이 자식이, 지 일 아니라고!"
청년이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유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비웃습니까?"
"웃겨서."
"뭐가 웃깁니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
"정부로부터 우리 산업의 보호를 촉구..."
"그 요청을 왜 다른 사람 목숨 붙잡고 하냐는 말이야."
헌터들이 한 행동은 일종의 파업. 파업이 동반된 항의는 그 필요성이 증대되는 순간일수록 더 큰 효과를 발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상에서의 문제다.
지금처럼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자신들의 목숨이 아닌 타인의 목숨이라면 더더욱.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시장이 무너질 겁니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결국에는..."
"당장 뒤지는 거랑 미래에 뒤지는 거랑 똑같아?"
"......"
"등신 같은 놈들. 할 거면 평소에 하든가. 꼭 시기 잘못 잡아서 안 먹을 욕까지 다 먹고 있네."
청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먹구름이 가득 낀 흐릿한 하늘.
바다를 달려온 사나운 바람이 항구에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유현을 향해 살기가 쏟아졌다.
"...!"
엘레나가 몸을 떨며 유현의 뒤에 숨었다. 일신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투박한 기세였다.
"뚫린 주둥아리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다."
엘레나가 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숨 막힐 듯한 살기들이 오롯이 유현에게만 집중되었는데, 정작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그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야?"
다음 순간, 헌터들의 살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세가 일대를 압박했다.
안경 너머 청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다른 헌터들 역시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안간힘으로 버텨냈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호흡이 끊어질 것 같은 느낌.
본능이 반응했지만, 헌터들은 줄행랑도, 공격도 시도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살기에 짓눌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하지."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뒤쪽에 서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검은 페도라에 역병 의사의 가면을 착용한 중간 키의 남성이었다.
"맞아, 맞아. 우리끼리 싸우려고 모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한 사람 더.
유현이 위험하다고 느꼈던 빨강 머리의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후."
유현은 깊게 한숨을 쉬고는 살기를 거두었다. 기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귀환 스크롤은 누구한테 있지?"
"나한테 있다."
가면을 쓴 남자가 망토 안에서 수백 장의 스크롤 묶음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줘."
"혼자 가려고 그러나?"
"혼자 가는게 빨라."
"그럼 우린 왜 불렀지?"
"사람들 수습이나 하라고."
유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훌쩍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하하! 재밌는 놈이라니까."
가면을 쓴 남자 다음으로는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같이 갈 사람?"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싸늘한 시선으로 유현과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재미없기는. 참, 유현. 내 이름은 레드다. 머리 때문에 기억하기 쉬울 거야. 아까 그놈은... 뭐였더라?"
"입 다물고 빨리 들어가."
유현이 레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레드가 게이트로 사라지고, 유현도 엘레나와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살벌한 분위기가 여전히 게이트의 바깥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