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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의 기행으로 소집된 장관들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유현은 계속 총리의 집무실에 머물렀고, 그 탓에 회의는 지지부진했다.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으면, 곧잘 회의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포기할 수 없는데요."
"그거 빼면 저도 그냥 빠집니다."
"허허. 말했을 텐데..."
회의는 밤이 늦어서까지 계속됐고, 결국 다음 날로 미루어졌다.
유현은 집무실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을 향해 똑똑히 경고했다.
"말했듯, 내가 원하는 요구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 참고로 엘레나로 협박할 생각이라면..."
유현은 잔잔하게 살기를 흘렸다.
살기란 것은 무릇 어느 정도의 실력자가 되어야 느낄 수 있는 감각.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살기는 일반인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
유현은 아연실색한 장관들과 총리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 있었다.
구름이 제법 있었지만, 달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운치있는 하늘이 연출되었다.
"좀 춥네요."
엘레나가 하아- 하며 입김을 뱉었다.
영국의 밤은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따뜻함이 완연했지만, 겨울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날씨였다.
"기숙사로 가자."
"...헉. 그러고 보니 포탈로 넘어왔네요. 이니티움님이 하시는 건 봤는데, 몇 번을 봐도 신기해요."
두 사람은 영국의 거리를 걸었다. 소박한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의 어둠을 밝혔다.
"어떡할래? 기숙사 가기 싫으면 여기서 숙소 잡고 며칠 있어도 되고."
"그러면 며칠 있다가 갈래요. 기숙사에만 있으면 지루해요."
유현은 엘레나와 함께 고급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하고 들어간 스위트 룸. 런던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방이었다.
유현은 여독을 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있으려니, 판대륙의 밤 풍경이 생각났다.
"예쁘다."
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엘레나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은은한 샴푸 냄새가 풍겨왔다.
"네 고향은 영국 어디냐?"
"런던이요. 저번에 이니티움님이랑 왔을 때, 예전에 살던 곳에 갔다 왔었어요. 지금은 카페가 되었더라고요."
엘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는데 내가 살던 곳이 없어지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뭐, 이별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유리창으로 엘레나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고작 며칠. 이니티움과의 이별에서 잠시 눈을 돌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나갈까?"
도시는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외출하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분위기 전환이라도 할 겸 산책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그게 정상이지."
엘레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갈까요?"
"그냥 산책 해도 되고."
산책이라는 말에 엘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싫은 건가 싶었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 이니티움님이 말했었는데,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유현님이 가면 재밌을 것 같은 곳이라고 하셨었는데..."
"그래?"
"네. 그게 어디였더라."
잠시 고민하던 엘레나.
곧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여기서 안 멀어요!"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런던의 으슥한 골목이었다.
이런 도시에 이 정도로 어두운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여기야?"
"네. 처음 왔을 때가 아마 새벽이었는데, 그때도 영업 중이었어요."
어두운 골목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장소. 그곳은 바로 골동품점이었다.
'안에 판대륙 물건이라도 있나.'
내가 가면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라면, 무언가 있긴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면, 단순히 판대륙의 책을 판매하던 곳이 골동품점이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세한 건 들어가 보면 알겠지.
"들어가본 적은 없지?"
"네. 밖에서 그냥 보기만 했어요."
유현은 골동품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앉아 있었다.
"몇 시까지 영업합니까?"
"자네들 도둑인가?"
"아니요."
"그럼 여유롭게 둘러보라고. 한숨 잘테니 계산할 거면 부르고."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카운터 옆에 마련된 간이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재밌는 분이네요."
"그러게. 도둑이 도둑이라고 밝힐 리가 없을 텐데."
어찌 됐든 밤새 둘러봐도 될 것 같았다.
유현은 곧장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꽤 넓네."
바깥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내부는 무척 넒었다. 도서관 같달까.
물건들이 진열되어있는 모양새 역시 도서관의 책장과 비슷했다.
"흐음..."
유현은 팔짱을 낀 채 전체적인 느낌을 살폈다.
마나를 끌어올려 살펴도 판대륙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감추어져 있거나,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나.'
우선 천천히 돌아볼까.
"보다가 졸리면 말해. 호텔로 포탈 열어줄게."
"재밌을 것 같아요!"
엘레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열의를 드러냈다.
두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그래. 무슨 일 생기면 소리 질러."
두 사람은 서로 갈라져 골동품점을 돌아다녔다.
작은 항아리부터 용도를 모를 괴이한 생김새의 도구들까지.
물건들 위에는 하나같이 먼지가 쌓여 골동품 특유의 예스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칼도 있네."
이런 걸 팔아도 되나 싶은 물건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수상한 물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금 특이한 물건들은 있었지만, 모두 평범한 지구의 물건들이었다.
"좀 깊숙이 가볼까."
유현은 늘어선 진열대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속에서 무언가 반응한 건 몇 걸음 걷지 않은 때였다.
"...?"
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공간 전이 마법이 활성화되며, 허공에 아공간의 입구가 나타났다.
"...이게 왜 반응하지?"
스멀스멀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오듯 아공간에서 밖으로 나온 건 지도 조각이었다.
판대륙의 책에 걸린 마법을 해독하고 얻은 그 물건이 푸른 빛을 머금고 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반응하고 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
'이곳에 비슷한 종류의 물건이 잠들어 있다.'
유현은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도 조각이 품은 마나의 세기가 강해졌다.
더 뚜렷해지고, 강해진 빛.
그러나 여전히 유현의 감각에 걸리는 건 없었다.
'아주 꼭꼭 숨겨놨군.'
이러니 이니티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지.
바로 앞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쪽인가?"
지도 조각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골동품 점의 끝이었다.
유현은 그 끝에 있는 진열대를 샅샅이 뒤졌다.
"찾았다."
진열대의 높이는 3미터 남짓.
판대륙의 책은 그 진열대의 가장 높고, 가장 구석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비행 마법을 통해 떠올랐던 유현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엘프식 대륙 요리 제조법]
책의 제목이었다. 유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쓰레기 만드는 법을 책으로도 만드는군."
엘프의 요리는 맛이 없다.
그냥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차라리 토사물을 먹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런 족속이 다른 종족의 음식을 만들어봤자, 모욕밖에 되지 않는다.
고로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능멸이자 능욕이었다.
"손에 쥐니 이제야 반응이 오는군."
유현은 책이 가진 마법의 기운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이 책 역시 지난번에 해독한 책처럼 여러 마법이 걸려 있었다.
유현은 빠르게 마법을 분석했다.
그때와는 달리 코어의 마나가 썩어 넘칠 만큼 많았기에 몇 분 만에 분석이 끝났다.
"저번이랑 똑같네."
책을 찾는 사람을 나름대로 배려한 걸까.
지난번 책과 같은 종류의 암호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유현은 곧장 해독을 시작했다.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해독하면 되었기에, 저번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겨우 10분 남짓.
유현은 책이 품고 있던 새로운 지도 조각을 손에 넣었다.
이번에는 상당히 큰 조각이었다.
대륙 하나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판대륙의 지도가 아니잖아."
대륙의 모양으로 확실해졌다.
이건 지구의 지도였다.
"대체 지구 지도를 왜?"
유현은 틸칸의 의도를 예상했다.
이렇게 지도 조각을 구분해 두었다면, 완성된 지도에는 어떤 위치가 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은신처는 아닐 테고.'
이니티움과 살던 은신처를 굳이 기록해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그는 왜 멀쩡한 은신처를 두고 다른 장소를 만든 걸까.
무언가 감추고 싶던 게 있던 걸까? 이니티움에게도, 자신의 자식에게도, 은신처를 찾아오는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지도의 완성도가 미흡했다.
다른 골동품점을 더 돌아봐야 할까.
"음?"
그때였다.
손에 들고 있던, 새롭게 얻은 지도 조각이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또 왜이래?"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도 조각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까지 자신을 안내한 지도 조각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새롭게 얻은 조각이 반응한 건 이 조각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유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끝까지 길게 늘어선 진열대들.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니 조각의 빛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
유현이 골동품점을 나온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책 값을 계산하기 위해 주인장의 잠을 깨웠더니 어찌나 놀라던지.
정말 계속 있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가고 싶으면 말하라니까."
등에는 엘레나가 업혀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찾아 다녔는데, 구석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고맙다."
엘레나가 이곳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도를 완성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이곳에서 찾은 책만 무려 열세 권. 골동품점의 크기만큼, 많은 책이 있었다.
하나를 찾으면, 그 지도 조각이 다른 책의 위치를 알려주니, 더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가기는 좀 그렇고."
우선 엘레나는 숙소에 눕혀 놓고, 총리를 만나러 가야겠다.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는 건 영국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이었다.
'설마 한국일 줄이야.'
지도에 표시된 위치는 대한민국의 서울이었다.
정확한 위치가 찍혀 있지는 않았지만, 좌표가 적혀져 있으니 그 좌표를 따라서 가면 될 것 같았다.
유현은 포탈을 열어 엘레나를 호텔 침대에 눕혀두고는 곧장 총리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건..."
집무실에서는 장관들이 모여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현이 포탈을 열고 허공에서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지, 진짜 포탈이잖아?!"
"맙소사. 정말로 포탈까지..."
총리가 미리 말한 건지 다들 알고 있던 눈치였다.
"혹시 내 말을 믿지 못한 건가?"
"그, 그럴 리가요!"
"직접 보니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유현은 테이블로 다가가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이야기는 다 됐습니까?"
서로 눈치를 살피는 장관들.
총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우리도 그 조건을 모두 수용하겠소."
"말해보쇼."
"게이트에 갇힌 헌터들을 모두 구조할 것. 그리고 게이트 사태 해결에 크게 일조할 것."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예상한 범위 내의 요구였다.
"어려울 건 없지. 대신 문제가 있는데..."
지금 유현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남은 상태다.
만약 그가 영국에서 그들을 도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것이다.
당장 자국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다른 국가에 갔다며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
"걱정은 말게. 모든 내용은 비밀에 부쳐주지. 게이트도 통제하겠네."
"그럼 됐어. 바로 시작하지."
"혹시 몰라 대형 길드들에 정예 병력을 요구했소.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니 괜찮겠지?"
"입 관리만 잘하면 상관없어."
있든 없든, 그들이 줄 도움은 많지 않다.
"그럼 준비가 모두 끝나면 연락 주겠소."
유현은 총리에게 연락용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유마망의 해외 진출 계획은 큰 가닥을 잡았다. 부지 확보, 건설 자금 지원, 더불어 대규모의 거래처 확보 등.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군."
그의 입가에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