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피어오른 홍염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늪지대를 머금은 밀림에는 수분이 가득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은 기어이 숲을 불태웠다.
"크어어어어!"
몬스터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빠르게 번져나간 화염은 그들의 도주를 막았고,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
곳곳에서 고통에 찬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사이로 잔혹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무언가 부러지고, 터지고, 잘려 나간다.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전장의 소음.
얼마나 지났을까.
끔찍한 비명이 가라앉았다.
서혜빈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주저앉은 채였다.
정신을 차리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무언가가 다가왔다.
서혜빈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흐릿해진 시야가 서서히 맑아졌다.
"어......"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의문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기뻤고, 울고 싶었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할지 뚜렷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입은 떠듬거렸고, 손은 파르르 떨렸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몸은 하나였다.
"괜찮냐?"
유현이 쭈그려 앉아 서혜빈과 시선을 맞췄다.
걱정이 깃든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서혜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와락.
유현을 껴안은 건,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포옹은 어떠한 말이나 행동보다도 그녀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이성적인 생각은 그 뒤에 따라왔다.
"......"
서혜빈의 뺨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하지만 유현의 몸을 휘감은 손의 깍지는 풀지 않았다.
오히려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더 힘을 조였다.
"다른 사람들은?"
유현은 태연하게 물었다.
위로하려는 듯, 커다란 손이 서혜빈의 등을 토닥였다.
"...없어."
"그럼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서혜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깨를 통해 그녀의 반응을 들은 유현은 몸을 일으켰다.
신장의 차이가 제법 큰 탓에 서혜빈은 유현의 몸에 매달린 꼴이 되었다.
"원숭이냐?"
"...원숭이 얘기는 하지도 마."
서혜빈이 포옹을 풀었다.
땅 위로 조심스레 내려왔으나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유현은 팔을 뻗어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옷걸이로 갈래?"
뒷덜미를 붙잡힌 채 이동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 말뜻을 이해한 서혜빈은 곧장 미간을 구겼다.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라. 표정 살벌하네."
"하도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니까 그러지."
유현은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서혜빈은 잠시 넓은 등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등에 업혔다.
"간다."
"응…."
유현은 곧장 발을 튕겨 날아올랐다. 조금 전 몬스터들을 죽이며 훑어본 바로는, 생존자는 서혜빈이 전부였다.
필드가 조금 넓긴 해도 던전형 게이트라 달리 숨을 만한 곳도 없다.
'1명...'
한 사람이라도 구한 게 다행이려나. 그나마도 서혜빈을 구했으니, 사실 크게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부정적인 가정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만약 살아남은 게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한서희 때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을 느꼈겠지.
"미안하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현은 서혜빈에게 넌지시 말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음이 귓전을 어지럽혔지만, 유현의 목소리는 똑똑히 서혜빈에게 들렸다.
퍽!
서혜빈이 유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상당한 충격이었기에 유현이 곧장 고개를 돌렸다.
"미, 미안! 너무 세게 때렸다..."
서혜빈이 황급히 사과했다.
"갑자기 왜 때리는데?"
"네가 하도 미련한 소리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
유현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혜빈은 미안한지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결국에는 구해줬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조금만 늦었으면 너는..."
"이미 지난 일인데, 왜 그래?"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난 일. 얽매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내 성격이 그래."
소중한 것을 잃는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몇 번을 겪어도 가슴 아프며,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엘리스가 죽었을 때도, 이니티움이 죽었을 때도.
길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한동안은 가슴이 공허했다.
"...바보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 조금은 초연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그런 감정에서는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성격이 바뀌고, 힘을 얻었다고 하여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좋아. 따뜻해."
서혜빈이 유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지? 철용이한테도, 가온이한테도. 서희한테도."
서혜빈은 그간 봐왔던 유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금 틱틱거리거나, 다른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그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방식이 좋았다.
"좋아해."
칼로 잘라내듯 대화가 끊겼다.
강한 바람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서혜빈은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지금 되게 담백한 기분이야."
"주마등을 봐서 그런가."
유현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왜인지 서혜빈의 반응이 들려오지 않았다.
과격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등을 때릴 줄 알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
그건 곧 대답의 재촉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현은 입을 열었다.
"나한텐 다들 소중해."
***
바깥으로 나온 유현은 서혜빈을 생화 길드에 넘겨주었다.
서동철이 그를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정말 고맙다."
"아직 인사하긴 이를 텐데..."
유현이 천막의 바깥을 턱짓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동철도 알고 있었다.
"저거 계속 강해지고 있죠?"
"...그래. 곧 있으면 S등급도 되겠더군."
"갈 사람 없으면, 제가 갔다 올게요."
서동철은 작게 침음했다.
S등급 게이트에 혼자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는 짓이었다.
한 차례 들어갔다 왔다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네가 들어갔을 때는 A등급이었고, 지금은 S등급이다. 게다가 던전형 게이트라 일반 몬스터들보다 더 강해."
"상관없어요. 엄청 많이 죽였으니까. 아마 절반도 안 남았을 걸요?"
리젠이 안 되는 던전형 게이트의 특성상 남은 몬스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현이 자신감을 내비치자 서동철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와도 된다."
"마석 절반은 제가 먹어도 되죠?"
"다 가져도 상관없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니까."
헌터들의 구조가 최우선이다 보니 던전 내부 수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상당한 손해였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헌터들을 잃는 것보다 큰 손해는 없었다.
"마, 마스터!"
그때, 길드의 참모 하나가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S, S등급이 됐습니다!"
"그래. 다들 알고 있었잖나."
다들 알고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는 뉘앙스였다.
"그, 그게 게이트의 테두리에 금이..."
"아!"
유현은 이마를 팍, 쳤다. 애당초 게이트를 억제하고 있는 테두리는 처음 수준에 맞춰 생성되었을 터.
게이트 내부에서 흐르는 마나 양이 증가할 때를 대비했을 리는 없다.
"이걸 생각 못하다니."
"야단났군. 어서 다른 길드에도 알려라. 협회에도 전하고."
"예!"
참모가 나가고, 유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지금까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모든 게이트가 끝없이 강해지진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야.'
만약 사냥형 게이트의 억제력이 풀렸다면, 세상은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사냥형 게이트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강화되지 않는 것 같다.
"우선 조사부터 해야겠네요 변화 이후 계속 강해지는 게이트가 보고된 건 이곳이 처음이지만, 다른 곳도 있을 수 있으니까."
"바로 시작하마."
유현은 곧장 천막을 나갔다.
***
길드 소나무의 비밀 창고.
위치도 존재도 세상에 공표되지 않은 그 장소에는 귀중한 아티팩트와 무기 등, 길드의 재산들이 있었다.
"으으으..."
그 창고에서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창고의 구석에 간이로 마련된 작은 공간 내부였다.
"나 잠좀 자자. 호야."
"자. 누가 뭐래?"
"네가 자꾸 끙끙거리잖아."
그곳에는 호야와 미우가 갇혀 있었다.
팔굽혀펴기를 하던 호야는 미우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아주 살판났다? 여기가 집이냐?"
호야가 미우를 노려보았다.
작은 공간의 반을 갈라 각자의 공간을 이루었는데, 호야의 공간은 투박한 반면, 미우의 공간은 소녀다운 감성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금도 딸기 그림이 그려진 파자마를 입은 채 분홍색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케이디는 망했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
"너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래? 이제 좀 있으면 성인인데 잠옷은..."
"호야. 논점을 벗어나지 마.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고, 우리 목숨은 저 사람들 손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젠장. 여기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는 게 무슨 집이야."
호야가 문을 걷어찼다.
바깥에서 단단히 잠긴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아파?"
"......"
호야는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눈물을 삼켰다.
발바닥으로 차려고 했는데, 그만 발가락으로 차버렸다. 부러지는 줄 알았다.
"아무튼! 난 언젠가 여기서 나갈 거야!"
"고집 적당히 부려. 이번에는 너 안 따라가."
"!!!"
미우의 선언에 호야가 충격을 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왜, 왜?"
"말 했잖아. 케이디는 끝났어. 간부들도 다 죽었다고, 뉴스에서 그랬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함께 붙어 지냈기에, 따로 떨어진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말 들으면 계속 같이 다닐게."
"......"
"어쩔 거야?"
"아, 알았어."
호야가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케이디에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미우와 떨어지는 게 더 싫은 호야였다.
"근데 우린 대체 왜 여기 붙잡혀 있는 거야?"
그 말에 미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 생각을 이제야 하니?"
"......"
"아마 너 때문일 거야."
"나?"
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는 이상한 피가 흐르잖아.
그 피가 목적이겠지."
정확한 출처는 모르지만, 룬석이라는 기이한 돌이 반응했었다.
온갖 특성을 사용하던 여자가 호야에게 자신의 핏줄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그 이후로 미우는 호야의 출생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 그러면 빨리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미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은 몰라. 진짜 피가 목적이라면, 진즉에 널 끌고 갔겠지."
"건강해지길 기다리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호야는 황급히 벗고 있던 웃옷을 입었다.
"이제 운동 안 해야겠다."
***
유현은 손쉽게 게이트의 정리를 끝냈다.
S등급 게이트였지만, 이전에 들어갔을 때 거의 모든 몬스터들을 죽인 덕에 수월하게 클리어 할 수 있었다.
'설마 했더니 그 불길에 보스 몬스터도 당했을 줄이야.'
보스를 발견했을 때, 놈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놈의 숨통을 끊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너무 빨리 나온 것 아닌가?"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 유현에게 서동철이 다가왔다.
"조사는 해봤어요?"
"몇 개 게이트가 이곳과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군. 다행스럽게도 모두 던전형 게이트였어."
"등급은요?"
"높지 않다. 기껏해야 D나 C수준이야. 다른 길드에 맡겨도 충분할 듯한데."
유현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이제야 조금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안도하는 유현의 모습에 서동철은 감사를 전했다.
"고맙군. 네 덕분에 이런 위기도 순조롭게 돌파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요, 뭐."
"거의 끝났어."
서동철이 유현에게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협회에서 실시간 상황을 방송으로 송출하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간 헌터들의 90%가 구출되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다른 국가의 상황도 작게 표기되어 있었는데, 한국의 구출율이 압도적이었다.
게이트의 숫자 차이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원인이 더 컸다.
"네가 여러 게이트를 맡아준 덕에 다른 길드에서 부담을 덜었다. 빠르게 구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그럼 제가 저 중에서 반은 구한 거 아니에요?"
"훗.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군."
서동철이 작게 웃으며 유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나저나 아까 혜빈이 얼굴이 심상치 않던데. 무슨 일 있었나?"
"아뇨. 아무것도."
"...표정이 굳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유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천막을 나왔다.
딸의 고백을 거절한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의 이성이 마비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