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폐부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공기다.
엄동설한의 숲속.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까봐 불은 피우지 못한다.
"......"
숲속 공터에 모여 나무에 등을 기댄 헌터들은 두꺼운 옷가지와 발열팩으로 혹한의 추위를 버텨냈다.
남은 발열팩의 숫자는 다섯 개.
인원은 서른 명이며, 발열팩의 가동 시간은 1시간 남짓이다.
하나를 뜯어 몇 분씩 돌려가며 쓴다고 해도 길게 버틸 수 없다.
쏴아아아-
거센 바람이 불었다. 눈 덮인 침엽수가 흔들리고, 헌터들은 몸을 움츠렸다.
곧 숲속으로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처에도 여러 덩이가 떨어졌지만, 헌터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작은 감정의 표현조차 없는 시체와 같은 상태. 추위를 몰아내려면 움직여야 하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크르르......"
바람이 멎자 숲은 조용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멀찍이 보이는 나무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형체들.
땅의 진동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와요."
누군가 말했다.
사람들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얀 천을 뒤집어썼다.
땅바닥에 가득한 눈과 동화되는 일종의 보호색. 몬스터와 싸울 힘은커녕 도망 다닐 힘조차 없었기에, 의견을 나누어가며 도출한 해결책이었다.
효과가 있는지는, 앞으로의 상황이 증명해줄 것이다.
"크으으..."
헌터들은 숨을 멈췄다.
몬스터들이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으로 둘러싸인 어둠 속에서 헌터들은 단지 두 가지를 바랐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그리고 눈먼 발에 밟히지 않기를.
방어구를 착용했다지만, 저런 크기의 발에 밟히면, 죽거나 크게 다칠 게 분명하다.
"크르릉?"
모습을 감추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냄새를 킁킁대던 몬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벌렸다.
거대한 입이 천과 그 아래에 있던 헌터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두 사람의 비명이 몬스터의 우적거림에 묻혀 사라졌다.
머리를 맞대어 나온 해결책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다, 다들 일어나라!!"
숨어 있던 헌터들이 천을 치우며 일어났다.
끝까지 버티며 찰나의 가능성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설령 싸우다 죽더라도 두 다리로 맞서는 게 헌터된 자의 자세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싸울 힘조차 남지 않았지만,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수밖에.
"발열팩 소지자들은 전부 뜯어서 몸에 붙여!"
얼어붙은 몸을 조금이라도 녹여야 싸움에 유리하다.
누가 발열팩을 사용하는 게 좋을지, 효율을 따져가며 발열팩을 나눌 여유는 없다.
헌터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던 발열팩을 뜯어 몸에 붙였다.
공터로 들어온 몬스터는 총 다섯 마리. 수북한 은빛 털이 몸을 뒤덮은, 겨울 숲의 늑대 몬스터, 설랑(雪狼).
"크워어어!"
그 우렁찬 포효만큼이나 거대한 덩치였다.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도, 털 사이로 삐져나온 발톱도. 하나 같이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솔직히 승산은 없어."
다가오는 늑대들을 보며 헌터들은 한참 전의 풍경을 생각했다.
싸우던 늑대 무리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뒤바뀌었었다.
이전에는 평범한 늑대의 크기였다면, 지금은 그보다 몇 배는 커졌다. 사람을 찢는 저 발톱이, 지금은 자동차도 너끈히 찢을 것 같았다.
"그래도 싸워야지 않겠냐."
헌터들이 도망친 건 변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몸뚱이가 갑자기 거대해지니, 더 싸울 의지가 사라졌다.
제법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늑대의 습성을 가진 몬스터였다.
달아나도, 달아나도 놈들은 계속해서 쫓아왔다.
그 결과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
"다들 긴장해라."
"크아아앙!"
설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새하얀 눈밭 위로 피가 흩날렸다. 눈을 녹이며 서서히 가라앉는 핏자국.
순식간에 몇 명이 당했지만, 살아남은 인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쾅!
어디선가 굉음이 들린 건, 생존자가 절반 정도 될 때 쯤이었다.
전장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굉음이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탓이었다.
"뭐, 뭐지?"
당황한 헌터들.
몬스터들은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크르르..."
하지만 이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헌터들에게 관심을 돌린다.
"지, 집중해!"
헌터들 역시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나?"
몬스터들이 공격을 재개하려던 그 순간.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하고, 유현은 그 시선을 받으며 전장의 한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유, 유현?"
"여기에는 어떻게..."
광범위한 필드형 게이트.
아무리 감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압도적인 속도와 그에 상응하는 관찰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이.
"크아아앙!"
몬스터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유현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아무리 유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거리. 몇 헌터가 질끈 눈을 감았다.
[마비]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빛이 몬스터들을 관통했다.
달려들던 설랑들은 박제된 듯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세상에 존재하는 과학 법칙을 무시한 듯한 기이한 움직임.
마치 한정된 공간의 시간을 그 자리에 고정시켜 둔 듯한 모양새였다.
"흑마법 효과 좋네."
태연하게 몬스터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유현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푸욱.
질긴 가죽을 꿰뚫는 강철검.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는 공격이었지만, 너무나도 부드럽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헉, 헉, 헉!"
모든 몬스터들의 숨통을 끊은 순간. 숲속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유, 유현님, 헉, 헉."
김주식이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헐떡댔다. 그의 뒤로 하나둘 마망의 길드원들이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어?"
"유현님이 너무 빠른겁니다..."
길드원들은 주변의 헌터들에게 포션과 함께 발열팩을 건넸다.
몇몇은 시체에 천을 덮으며 전장을 수습했다.
"계속 수습해. 난 더 돌아볼 테니까."
구조 활동은 길드 단위로 이루어졌다. 유현은 마망 길드의 소속원들을 비롯한 협회의 직원들과 함께 구조를 진행했다.
이 게이트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사람을 구조하여 바깥으로 데려갔다.
유현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활용한 위치 추적과 그 위치를 길드원들에게 알려주는 미르의 힘 덕분이었다.
"여기는 더 없는 것 같네. 미르. 돌아가자."
투명화한 미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특성처럼 보여졌다.
아직 유현의 특성에 관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워낙 다양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었기에 위치를 알리는 특성이 하나 정도 더 있다는 말도 쉽게 받아들였다.
"나왔다!"
유현과 구조대가 게이트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자나 구급 대원들을 제외하더라도 엄청난 인파였다.
"와아아아!"
"멋있어요!!"
벌써 구한 사람만 몇 백 명.
사건이 터진 지 이제 막 하루가 지났지만, 마망 길드는 가히 신드롬 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길드 입장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구조 활동. 심지어 게이트는 어느 때보다도 위험했다.
그래서 참가하지 않은 길드들도 많았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으로 설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누군가를 구하는 헌터들을 향해 열광했다.
그들의 정의감에 탄복하고, 깊이 감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한 구조 행위를 누구보다 많이 해냈으니, 마망 길드에 찬사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구조된 헌터들이 마망 길드원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챙겨온 포션 덕분에 그들의 몸 상태는 오히려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 좋아져 있었다.
"가자."
마망 길드는 인파가 적은 곳으로 이동했다.
유현은 다음 토벌 게이트의 사진을 보고는 곧장 그곳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이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자, 자, 빨리 들어가."
유현이 포탈 너머로 길드원들을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강찬성.
그는 왜인지 포탈로 들어가지 않았다.
"뭐해, 안 들어가고."
"고맙다, 현아."
유현의 손을 잡고 열렬히 흔드는 강찬성. 특성을 사용한 탓에 강찬성의 손은 오리 너구리의 손이 되어 있었다.
"이런 건 특성 풀리고 해라. 축축해서 기분 나쁜데."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래. 살면서 마망 길드가 이렇게 유명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나 헌터 되면 나한테 넘겨."
오리 너구리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뭐, 뭐?"
"부길마 자리는 줄게."
"아, 아,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세운 길드..."
"인수금으로 큰 거 한 장 주면 되나?"
오리 너구리의 손이 다시 유현의 손을 붙잡았다.
"앞자리가?"
"백."
"콜."
백 억은 거절하기에 너무 큰 돈이었다.
***
커다란 TV에서는 한국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데리코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옅은 분노를 담아 말을 뱉었다.
"몹쓸 놈."
유현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페데리코는 은거지로 돌아오자마자 준비해둔 장치의 일부를 가동했다.
룬석 몇 개를 사용하여 차원의 경계에 데미지를 가한 것이다.
그 결과, 판대륙의 힘 일부가 지구로 새어 나오며 게이트 속 몬스터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애당초 게이트는 판대륙의 공간.
페데리코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되리라는 건 모두 예상했다.
유현에게 혼란을 줘 시간을 빼앗고, 그동안 자신은 다른 일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군."
말 그대로 압도적인 구조 능력.
어떤 게이트든 개의치 않고,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을 구해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놈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따라올 수 있나 궁금하군."
페데리코는 부상 회복을 위해 몸을 담그고 있던 회복용 탕에서 나왔다.
그는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어떤 방으로 향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캄캄한 감옥.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감옥 안에서는 온갖 국가의 언어가 들려왔다.
영어나 중국어부터, 소수민족이나 어느 이름 모를 부족들의 언어까지.
전 세계에서 잡아 온,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능력자들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펼칠 환경이 되지 못하거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던 이들.
그들은 모두 페데리코의 흡수 대상이었다.
"조용."
페데리코의 한 마디에 내부가 고요해졌다.
그는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가더니 어떤 철창 앞에서 우뚝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마령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망자의 힘을 흡수하는 페데리코의 능력이 발현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페데리코의 몸에 S급 능력자를 몇 명은 만들 힘이 새롭게 축적되었다.
"오늘도 달콤하군."
페데리코는 만족감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방을 나온 페데리코가 TV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현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현."
시선에 담기는 살기.
미간이 있는대로 구겨진다.
"머지않았다. 그 아이만 찾는다면..."
콰직.
커다란 TV가 종이처럼 순식간에 구겨졌다.
"네놈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