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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를 나가려던 유현은 멈칫했다. 탈출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떠들었다면, 바깥에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반인이나 기자는 물론이고, 헌터들까지도.
'미르를 투명화해서 빠져나가는 것 보다는 그냥 여기서 포탈을 여는 게 낫겠어.'
유현은 포탈을 열었다.
목적지는 다른 게이트였다.
이런 식으로 몬스터가 진화한 게이트가 이곳만 있지는 않을 터.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유현은 게이트를 통과했다.
도착한 곳은 곳곳이 불타고 있는 들판이었다.
일전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한서희의 도움으로 들어왔던 게이트로, [화전의 대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나와라, 불도마뱀."
그 당시, 유현은 이곳에서 판대륙에서 봤던 마물과 비슷한 몬스터를 봤다. 이곳에 온 건 더 확신을 갖기 위해서였다.
"크워어어어!”
유현의 앞에 불꽃을 전신에 두른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외형을 본 유현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그때 만났던 거대 불도마뱀.
어디서 봤다고만 생각했는데, 바뀐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놈은 샐래맨더라는 이름을 가진 마물이었다.
"그때랑 큰 차이는 없네."
외형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그때는 몸의 일부에만 붙어있던 불꽃이 지금은 전신을 휘감았다. 더 붉고, 맹렬한 홍염. 그때보다 몇 배는 강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크아아아아!"
유현을 향해 샐래맨더가 달려들었다. 맹렬한 돌진과 함께 날아오는 불덩이들.
"크릉!"
미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신성한 빛의 방패가 샐래맨더의 불덩이와 돌진을 동시에 막아냈다.
이윽고 샐래먼더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미르의 마법이었다.
쾅!
커다란 바위가 샐래맨더 위로 떨어졌다. 몸뚱이보다 몇 배는 큰 바위였기에, 샐래맨더의 모습은 바위에 깔려 보이지 않았다.
"잘했어."
유현은 미르의 등을 두드렸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미르의 두 가지 힘. 신성력과 마나. 조금 정신을 집중하니 마나 코어의 존재도 느껴졌다.
이런 변화가 생긴 건 드래곤 하트로 제작된 성장 촉진제의 영향이리라.
"뜻밖의 부작용이야."
기대한 것처럼 덩치가 커지진 않았지만, 그 대신 미르에게 마나라는 새로운 힘이 생겼다.
"이런 부작용이라면 환영이지."
기숙사에서 미르가 그토록 고통스러워 하던 것도 이해가 됐다.
코어가 존재하지 않는 몸에 코어가 생긴다는 건 곧 육체의 구조를 바꾸는 일.
그게 맨정신으로 이루어졌으니 고통으로 쇼크사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에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넓게 펼쳐진 불타는 들판은 초원 필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강해진 몬스터에게 쫓겨 달아나는 사람들. 대항하는 이들은 모두 죽었고, 도망치는 이들의 죽음도 머지 않았다.
"미르, 가자."
유현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
유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협회장을 비롯한 길드 마스터들은 한 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경기도 외곽. 화전의 대지로 들어가는 포탈의 입구 주변에는 수많은 헌터가 모여 있었다.
사냥을 마치고 나온 게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피해 도망친 듯한 모습의 헌터들.
구급차와 구조 대원들이 바쁘게 오가는 가운데, 협회 일행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현을 발견했다.
"유현!"
유현은 투명화 마법이 걸린 미르에게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어."
"어는 인마!"
한상용이 유현에게 역정을 냈다.
"다들 무슨 일이에요?"
유현은 어리둥절했다.
사람이 많이 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런 주요 인물들이 한 번에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일? 그 말 진심인가?"
"아, 맞다."
서동철의 말에 유현은 그제야 상기했다.
페데리코와의 전투 이후 그대로 사라졌으니, 그들이 찾아온 이유야 뻔했다.
"그 테러범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최칠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유현은 고민했다.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지에 관한 고민이었다.
'마왕이니, 근원이니. 아무리 떠들어봤자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가장 좋은 설득 방법은 역시 직접 보여주는 것.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니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별말 안 했어요."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간 것 같은데."
"그냥 같이 팀 먹고 지구를 정복하자 같은 말들이죠."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유현을 향했다. 하지만 다들 쳐다보기만 할 뿐, 반박은 하지 않았다.
"무슨 냄새 나지 않아?"
그때 채지수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유현이 움찔했다.
미르의 항문이 채지수의 머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요?"
유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문제가 생긴 게이트는 한 곳이 아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맞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일단 유현군은 찾았으니까 인명 구조를 우선으로 하져."
"저도 도울까요?"
전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게이트.
그 안에 들어간 헌터들을 모두 구하는 건 길드들의 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학생을 이런 상황에 투입할 수는 없어."
"그런 거 가릴 때에요? 실습생이라도 데려가서 써야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고집 부리지 마."
한상용은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유현 학생 말이 맞아요. 지금은 비상이잖아요."
"동감이여. 어차피 실습생 신분이면 게이트 출입도 가능하잖아여."
사람들의 시선이 최칠기에게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결단을 내려줄 만한 사람은 협회장인 최칠기 밖에 없었다.
"원칙상 실습생은 일정 등급 이상 게이트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최칠기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유현 학생의 실습 과정에서 그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지."
"......"
"그 결과가 나빴다면 모를까. 좋다 못해 완벽했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더 해보세."
이미 실전을 통해 그 실력을 증명했으니, 특별히 눈감아주겠다는 소리였다.
"단, 다른 아이들은 기존의 원칙대로 하는 것 잊지 말게."
오직 유현만을 향한 특별대우였다.
"그러면 유현군은 어디 길드 소속으로 들어가야 하져? 이것도 결국에는 실습이잖아여."
"협회장님~ 이왕 인심 쓰시는 김에 헌터 자격증까지..."
"아니, 그건 안 돼."
최칠기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잠깐. 오늘은 원래 생화 길드의 실습이..."
"쉿! 상황이 바뀌었잖아여!"
"마, 맞아요!"
맹렬한 반대 앞에 서동철의 발언은 깡그리 무시당했다.
서동철 역시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나?"
"흐음."
길드의 선택권은 유현에게 넘어왔다.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유현. 마스터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여기서 선택하는 길드가, 어쩌면 유현이 입단하게 되는 길드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유현군! 내가 잘해줬잖아여! 철용이와 함께라면 우린 더 높은 곳으로..."
"현아~ 누나랑 같이 좋은 곳 갈까~?"
"유, 유현 학생! 부룬디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려요! 우리는 그곳의 영웅이..."
"오든, 말든."
마지막으로 유현은 한상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당초 자신의 실습을 거부했던 한상용이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잘 생각해라. 네 힘이 길드에 묶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5대길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유현은 그제야 한상용이 실습을 반대한 이유를 깨달았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였다.
지금이야 사이가 좋아 보여도, 힘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누군가는 상대를 집어삼키려 하는 법이니까.
'단순히 길드 간의 문제를 떠나, 국가에도 문제를 초래할 수 있어.'
유현은 한상용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우려가 너무 보기 좋게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제가 한 말 잊었어요? 길드 들어갈 생각 없다니까요."
"......그럼 실습생에게 부여되는 게이트 입장 자격도 사라진다."
"단어 하나 추가할게요. 적어도 남의 길드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박정환이 눈을 반짝였다.
"그말은 자기 길드를 만들겠다는 소리인가여?"
"예? 아뇨. 그건 지금 못하잖아요."
"엥? 그럼 대체..."
유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가 먹은 길드 하나 있어요."
***
유현의 요청을 받은 강찬성은 마망의 길드원들과 함께 포션을 잔뜩 지고 협회에 도착했다.
"이런, 젠장. 내가 길드장인데 왜..."
강찬성은 끊임 없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정작 그의 등에는 누구보다 많은 짐이 들려 있었다.
"주식 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에요?"
마망 길드에 김주식이 들어온 이후, 그와 함께 공격대를 이루던 멤버들이 합류했다.
"나도 몰라."
"그냥 찬성 오빠만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
강찬성은 협회의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점점 일반적인 출입이 불가능한 장소가 가까워지자, 김주식의 마음에 불안이 피어올랐다.
"혀, 형님.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어? 설명 안 했어?"
"예. 그냥 짐 챙겨서 따라오라고만..."
"가면 알게 돼."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협회에 마련된 지하 훈련시설이었다.
"여, 왔냐."
유현은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강찬성은 태연할 수 없었다.
"......"
유현의 뒤에 서 있는 일련의 사람들. 얼굴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야, 실습 허가서는 떼 왔지?"
강찬성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그 시선은 협회장과 5대 길드의 수장에 향해 있었다.
"선 채로 죽었나."
유현은 강찬성의 품속에서 마망 길드의 명의로 발급된 실습 허가서를 꺼냈다.
"좋아, 이거면 됐고."
유현이 김주식과 그 일행에게 눈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굳어 있던 김주식은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이, 이게 무슨..."
"다들 뉴스 봤죠?"
"게이트 이상 현상 말입니까? 아직 명확히 밝혀진 건 없다고 들었는데..."
"몬스터들이 강해졌어요. 우리가 그놈들을 족치고 사람들을 구하러 갈 거고요."
"......예?"
느닷없는 전투 예고에 김주식이 멍청히 반문했다.
"그 포션 가방들은 다들 내려두시고. 다른 사람들 쓸 거라서요. 아, 가방 하나는 챙겨요. 우리도 써야 하니까."
유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허가서를 기다리고 있던 협회장에게 향했다.
"이거면 됐죠?"
"......허, 참.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저 길드와 포션을 판 건가?"
"뭐, 그것도 계획의 일부기는 했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네요."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군. 길드를 통째로 먹을 생각을 할 줄이야."
최칠기가 허가서를 접어 자신의 품 속에 넣었다.
"허가서가 있으면 됐네. 자네는 지금부터 마망 길드의 실습생으로서, 원칙에 제한받지 않고 게이트에 출입할 수 있네."
최종 확인을 받은 유현은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마망의 길드원들은 굳어 있는 강찬성을 데리고, 유현의 뒤를 따라갔다.
"대체 언제부터 밑그림을 그린 건지 원."
한상용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자신의 우려는 기우였다. 이미 유현은 그 나름의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문무 겸비라는 말이 딱이네여."
다들 박정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저 포션도 직접 만든 거잖아여."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는데, 잘 됐군."
서동철이 앞장서 가방을 챙겼다.
"어어~! 혼자 다 가져가면 안 돼지! 우리 길드 것도 남겨놔~!"
"저, 저희 것도요!"
마스터들은 길드원들이 사용할 포션을 챙겨들고는 훈련실을 떠났다. 전국적인 구조 작전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