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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실습이 종료되고 이틀 뒤. 유현은 기숙사를 나와 다음 길드의 실습 장소로 이동했다.
마지막 길드는 바로 생화.
실습으로 어떤 게이트를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방에서 기르는 미르가 사춘기인지 요새 자꾸만 하늘을 보며 울음소리를 낸다.
엘레나가 있긴 하지만, 주인으로서 돌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니티움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약을 만들어 준댔는데.'
마물에게 사용하던 성장 촉진제라고 했던가.
그 내용물을 마기가 아닌 마나로 바꾸면 신룡에게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며, 확신이 없는 듯한 투로 말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능성은 낮았다.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신룡은 신성력을 기반으로 하는 개체니까.
'그 촉진제에 담기는 게 신성력이면 몰라도.'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
그러니 기대는 접어두는 게 낫다.
"여긴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현은 눈앞에 있는 공사 현장과 스마트폰의 지도를 번갈아 보며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정확히 찾아왔다. 이곳 공사 현장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 불길함을 느낀 유현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곧장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서동철이 그의 앞을 막았다.
"잠깐 잊은 일이 있어서..."
"내가 사람을 불러서 해결해 주지."
"......"
도망칠 생각인 걸랑 접어두라는 뜻이었다. 상대가 대응할 수 없는 핑계도 여럿 있었지만, 유현은 거기서 포기했다. 어떤 핑계를 대도 서동철이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이게 실습이에요?"
"이 역시도 길드의 업무 중 하나지."
유현이 공사 현장 출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올려다보았다.
[길드 생화 본부 건설 현장]
이런 곳에서 길드의 업무랍시고 학생에게 시킬 실습은 하나밖에 없다. 그게 실습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유현에게는 실습의 범주 이내였다.
'그래, 이 역시도 길드 업무와 관련된 일이긴 하지.'
하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여 정상적인 일이란 뜻은 아니었다.
유현이 푹 한숨을 내쉬자 서동철이 코웃음을 쳤다.
"두려운가? 무슨 일을 시킬지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르는 게 바보죠."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건 내가 판단합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에요?"
"저거."
서동철이 손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활짝 열린 공사 현장 출입구를 지나 저 안쪽으로 상당수의 레미콘트럭이 보였다.
"저걸 다 옮기면 된다."
"......예?"
"위로 옮겨야 해."
유현이 고개를 들어 공사가 진행중인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았건만,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다.
"콘크리트를 고층으로 올려보내는 펌프카가 고장 났다. 몇 대 더 있긴 하지만, 빠르게 공사를 마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저걸 어떻게 옮겨요? 트럭째로 들고 가는 건 아닐 테고."
"타워크레인에 바스켓을 달아서 올리듯이 네가 바스켓을 직접 들고 움직이면 된다. 가능하겠나?"
"......일단 해보죠."
바스켓에 가득 담긴 콘크리트.
유현이 바스켓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오, 되는군."
유현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톤 단위는 가뿐히 될만한 무게였다.
이런 일에 마법까지 사용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유현은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강화] 마법을 사용했다.
"이걸 정확히 어디로 옮겨요?"
"자세한 건 위에서 알려줄 거야."
유현이 바스켓을 든 채 그대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올라가는 유현을 보며 서동철이 감탄했다.
"과연 대단하군."
유현이 바스켓을 비우고 내려오자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인부들이 신기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크흠."
기분이 좋으면 안 될 일 같은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머쓱해진 유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계속 옮겨라. 오늘 할 일은 그게 다다."
"이건 추가금 받아야겠는데요."
"상식적인 범위 내라면 얼마든 주지."
아카데미에서 지향하는 실습과는 거리가 먼 업무. 실습이라는 이유로 무료 노동하기에는 과한 업무 강도였다.
"혹시 레미콘 트럭을 통째로 들고 옮길 수는 있나? 바스켓도 좋지만, 직접 트럭을 옮겨 슈터를 활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서."
"해볼게요."
너무 무거워서 단순히 육체의 힘으로만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몇 개의 마법을 사용했고, 성공했다.
"오오오!"
"와! 진짜 되네!"
"히야~ 대단하구마이."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
우즈벡에서 온 티무르도, 중국인 왕 타오도, 노가다 30년 경력 신교수도. 눈앞의 광경에 그저 입을 벌린 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구경 그만들 하고 일해들~"
작업 반장이 그들을 다시 일터로 돌려보냈다.
유현은 차량 몇 대를 올려보낸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많이 옮겼는데도 아직 차량이 꽤 남아 있었다.
"후."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문득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린 유현은 입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도 유현을 알아봤는지 곧장 건설 현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야! 너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서혜빈이었다.
한 번에 말을 내던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실습."
"후, 실습? 실습을 왜 여기서 해? 그냥 막노동 아닌가?"
"네 아빠한테 물어봐."
"......음. 아빠도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
자기 아빠라고 태세 전환하는 것 좀 봐라. 생각은 무슨. 그냥 부려 먹으려고 부른 건데.
"넌 여기 왜 있냐?"
"애들이랑 같이 본구 구경 좀 하려고..."
"애들?"
유현이 되묻자 서혜빈이 못할 말을 했다는 듯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냐! 그것보다 지금 쉬고 있는 거야?"
서혜빈이 웃으며 물었다.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혹시 꼽 주는 거냐? 왜 웃지?"
"그런 건 아니고..."
"농담이야."
사실 농담은 아니다.
잠깐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는 이만..."
"잠깐만."
유현은 멀어지려는 서혜빈을 붙잡아 세웠다.
서혜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마치 무언가 찔리는 게 있다는 듯이.
"너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나."
"내, 냄새?"
"응, 냄새."
유현은 자신의 옷을 킁킁거렸다.
기숙사에서 사용하는 섬유 유연제의 라벤더 향이 코속으로 스며들었다.
"왜, 왜 이래 갑자기?"
자신의 냄새를 맡는 유현을 보며 서혜빈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엘레나."
"..."
"같이 있지?"
서혜빈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어, 어떻게 알았어?"
"다 방법이 있지."
같은 섬유유연제를 썼기에 같은 냄새가 난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같이 살고 있다는 게 귀에 들어가면 복잡해질 테니까.
"지금 어디 있어?"
"...저기에 서희랑 숨어있어."
"한서희? 걔는 또 왜 같이 있냐?"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까...?"
요컨대 서로 길드를 오가며 실습을 한다, 그런 말이겠군.
"그럼 엘레나는 왜 같이 있지?"
"아, 그게..."
그때, 저 멀리 입구에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엘레나였다.
곧 그녀의 몸이 누군가가 당긴 듯 뒤로 훅하고 사라졌다.
아마 한서희가 급히 그녀를 잡아당긴 거겠지.
"됐다,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지."
"자, 잠..."
서혜빈이 말릴 새도 없이 유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입구에 숨어있던 엘레나와 한서희의 앞이었다.
"...!"
너무 놀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고 했나.
엘레나와 한서희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멈췄다.
.
"너 왜 여기 있어?"
"......"
유현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들켰어?"
"아, 아니요!"
그렇다면 안심이다.
"그냥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잡혔어요."
"그래? 난 또 뭐라고."
이렇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한서희가 유현에게 인사를 건넸고, 유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 그와 다르게 한서희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지난 번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하기야, 안 그럴 수가 없겠지.
결국에는 시간이 약이 되어 이 관계의 냉기를 풀어줄 것이다.
"저도 한 번 실습이라는 걸 해보려고요."
엘레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벌써?"
당초 예정했던 이론 학습 기간은 두 달. 그 뒤부터 실습을 시작하기로 했기에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네! 배운 걸 어서 써보고 싶어요!"
"웬만하면 붉은 장미 길드는 가지마. 길드 마스터가 또라이야."
"알겠습니다! 근데 유현님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엘레네가 공사 현장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며 물었다.
"실습."
"이런 곳에서요?"
"사정이 있어."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사정인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유현은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잘들 놀아. 난 다시 일하러 갈 테니까."
"아, 네!"
유현이 다시 레미콘 트럭이 주차된 곳으로 돌아갔다.
입구까지 뛰어왔던 서혜빈은 유현이 다시 저 멀리서 나타난 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빠른 거야? 같이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혜빈씨는 유현님에게 호감이 있나요?"
엘레나는 유현을 제외하고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서혜빈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TV에서 봤어요. 누구랑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보통 커피 한 잔 하자는 말로 시작한다던데요?"
부정하려면 얼마든 부정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가 충분한 말이었지만, 서혜빈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한서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소리는 그만하고 구경부터 하자. 나도 처음 와보는 거라 기대되네."
한서희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서혜빈은 곧장 몸을 돌려 건물로 향했다.
서혜빈을 향해 넌지시 뻗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온다.
"......"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게 자신 하나 만이 아니었나. 왜인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서희야! 빨리 와!"
어느새 앞서간 서혜빈이 손을 흔들었다.
한서희는 응어리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누가 그를 좋아하든, 이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다른 사람을 선택하면 슬프겠지만, 그 역시도 존중하리라.
"......?"
무거운 걸음을 내딛던 한서희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그걸 느낀 건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서혜빈도 우뚝 멈춰 섰다.
엘레나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
멀리서 소란스러운 공사 소리가 들려왔지만, 왜인지 폭풍의 전야처럼 고요한 긴장감이 흘렀다.
"감이 좋구나."
한서희가 홱 몸을 돌렸다.
긴 머리의 남자가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한서희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려 남자를 향해 불꽃을 퍼부었다.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하지 않으마."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뒤에서 들려왔다.
다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우선 자리를 옮기지."
한서희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보지만, 익히 들었던 생김새. 유현이 말한 케이디의 수장, 페데리코였다.
"쯧."
페데리코가 혀를 찼다.
맑은 하늘이 갈라지며 괴물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한서희의 앞에서 충격이 일었다.
뒤로 거칠게 날아간 한서희를 붙잡은 건 엘레나였다.
"괘, 괜찮아요!?"
"아, 응. 고마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현이 페데레코와 대치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을 가진,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유령처럼 페데리코의 등 뒤에 부유하고 있었다.
"뒤지고 싶어서 작정했군.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와?"
"그사이에 많이 성장했구나."
페데리코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목을 풀었다.
"하지만 강해진 건 너만이 아니다."
직후, 한 번 더 폭발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