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해가 뜨지 않는 영국.
매캐한 연기 때문이 아닌 단순히 밤인 탓이었다.
유현은 달이 뜬 영국 밤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좁고 높게 서 있는 소박한 건물들의 빛들이 거리를 밝게 비췄다.
"유?"
"유야?"
"유 같은데..."
어두웠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유현은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목적지는 해당 스트리트에 존재하는 작은 펍.
이니티움은 그를 그곳으로 불렀다. 포탈을 열어주긴 했지만, 그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여 그런지 좌표가 상당히 뒤틀렸다.
어딘지 모를 옥상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덕에, 유현은 귀찮은 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척도 숨긴 탓에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몇 시간 헤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딸랑.
유현이 펍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밤인데도 외부에 전등 하나 켜두지 않은 주점. 테이블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은 의자가 올라가 있고, 멀쩡한 테이블 하나가 이니티움의 차지였다.
그 옆에는 유현을 발견한 엘레나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좌표라도 알려주든가."
유현이 구시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미안.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아니면 전화라도 가지고 다니든가."
"있는데 해외 로밍 신청을 안 해놨어."
현실적인 이유에 유현의 말문이 덜컥 막혔다.
"잔소리는 잠깐 접어두고. 본론부터 이야기하자."
"페데리코가 룬석을 가져갔다며. 그게 본론 아니야?"
이니티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페데리코가 직접 말했어. 각성 코마에서 깨어났다고 매개체로서의 효과가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래."
"뭐?"
"언젠가는 두 사람을 찾아올 거야. 아니면, 다른 각성 코마 상태에 빠진 사람을 찾을지도 모르지."
"누가 또 있어?"
이니티움이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페데리코도 쉽게 알 수 없어. 아마 다른 각성 코마 상태의 인물을 찾기보다는 둘을 노릴 가능성이 더 커."
"......"
그때, 미간을 구부리며 고민하던 유현의 팔을 작은 손이 휘감았다.
엘레나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잡혀가기 싫어요."
"안 잡혀가."
단순히 한 마디였지만, 그게 안심이었는지 엘레나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어떡하지? 두 사람을 한 곳에 격리할까?"
"아니. 그건 안 돼."
유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 쳐들어올 줄 알고 그들을 격리한단 말인가.
만약 1년이 지나도 안 오면?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말 때문에 두 사람은 1년을 통으로 날리게 된다.
"그럼 어떡해?"
"간단해. 넌 한국에 살림 차리고, 엘레나는 아카데미에 들어오면 돼. 어차피 3학년이잖아."
"그게 될까?"
"이케가미랑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네."
이케가미는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다.
게다가 사실상 부정한 수를 사용하여 입학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행위에 처벌을 묻지 않은 건 단순히 교장의 재량.
문제로 짚으면 문제가 될만한 일이다.
"허락을 받아야겠네."
"교장한테?"
"아니. 우선 영국 정부한테."
자국의 능력자를 타국의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건 곧 귀한 자원을 버리겠다는 소리.
그게 고급 인적 자원이라면 더더욱 까탈스럽겠지.
"엘레나. 네 실력은 어느 수준이지?"
"강해. 경험이 일천한 지금도 S반 아이들에 꿀리진 않을 거야."
"......조졌군."
아카데미 S반이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영국 정부에서 쉽게 다른 국가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그냥 데려가서 입학시키면 안 돼?"
"나중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어. 단순히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말이야."
무엇보다 애당초 타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자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케가미는 상황이 들어맞아 그게 쉽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어쩌지?"
"허락을 받아야지."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따라와."
***
유현이 향한 곳은 영국 총리의 집무실이었다.
첩첩의 결계가 외부의 침입을 막았지만, 유현의 앞에서 그런 결계는 무의미했다.
드르륵.
빠르게 결계를 해제한 걸어 잠긴 창문을 마법으로 열고 들어갔다.
그 뒤로 겁먹은 얼굴의 엘레나가 따라 들어왔다.
-난 텔레포트 마법이나 준비하고 있을게.
이니티움은 도주가 발생할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함께하지 않았다.
"벌써 퇴근했나."
이곳으로 온 건 총리가 워커홀릭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아직 크게 늦은 시각이 아니니 일하고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아니다, 온다.'
실망하기를 잠시.
닫힌 문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은 엘레나와 함께 문 옆에 숨었다. 문이 열리면 두 사람의 모습도 가려지는 구조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총리는 혼자였다.
다시 문이 닫힌 순간, 유현은 어느새 총리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총리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유현의 손이 총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확장된 총리의 눈이 유현의 얼굴을 훑었다.
자신을 덮친 상대가 유현이라는 걸 확인한 총리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직접 기사 작위까지 수여한 그가 습격이라니.
총리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라는 걸 유현 역시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손을 뗐다.
"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귀에 통역기를 낀 유현은 총리의 귀에 여분의 통역기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한국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고 해."
"이 아이가 누군..."
엘레나와 총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테러 사건으로 사망한 엘리스의 동생. 그동안 실종되어 있다가, 고작 몇 시간 전에 느닷없이 두 발로 나타나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
그 등장으로 영국의 행정부를 뒤흔들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건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야 할 문제요."
"그게 안 되니까 왔지. 시간이 없어."
"......무언가 있군."
"케이디의 수장이 이 친구를 노리고 있어."
유현은 진실을 밝혔다. 굳이 감출 이유가 없었다.
어떤 거짓말보다도 확실한 이유가 되고, 세상에 드러나도 크게 문제 될 여지가 없다.
어차피 페데리코야 그녀의 위치가 드러나 있든, 감추어져 있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아올 테니까.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녀의 위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편이 낫다.
'사라지면 세계가 알게 되겠지.'
만약의 경우지만, 그녀가 납치되어도 더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 문제는 좀 더 대국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뭔가 달라지나?"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겠지. 해외에 있는 고등학교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안전할 거요."
유현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녀의 옆에 있는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세상에 내 옆보다 안전한 곳이 있을까?"
마나가 담겨있지도, 기세를 드러내지도 않은 한 마디.
하지만 무거웠다.
둔중한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듯, 그 말들이 총리의 고막에 쑤셔박혔다.
"...그렇군."
여타의 설명 없이도 총리는 설득당했다. 이미 증명된 힘의 소유자. 그 말대로 세계에서 그의 옆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했듯이 나 혼자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요. 그랬다가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을 거야."
"방법 없나?"
"유수의 길드가 동의한다면 모르지. 그들의 동의가 있다면, 아마 사람들도 인정할 거요."
유수의 길드. 그건 아마도 영국 내의 대형 길드들을 의미하는 뜻일 터.
"오늘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있소. 내가 방금 그 자리에 있다가 왔어."
유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총리가 급히 덧붙였다.
말했듯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어디지? 안내해. 그 자리에서 담판을 보자고."
"......경고하겠는데, 다들 한 성격 하니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는 게 좋소."
"하는 거 봐서."
어딜봐도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총리는 한숨에 그 욕심을 떨쳐냈다.
***
연회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가면 상당한 거리지만, 유현은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며 순식간에 호텔 앞에 도착했다.
총리에게 끔찍한 울렁거림을 선사한 건 덤이었다.
"우웨에에엑!"
구역질을 참던 총리는 호텔 입구의 경비를 지나 로비로 들어오자마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와..."
호텔 로비의 화려한 장식을 보며 감탄하는 엘레나.
유현은 총리를 뒤로한 채 그녀를 데리고 호텔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이, 저 사람 설마..."
"왜 여기에 있지?"
"연회에 초대받았나?"
로비에서부터 시작된 수군거림은 연회장으로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종국에는 그를 쫓아온 사람으로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 연회장의 입구가 더 시끌벅적해졌다.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유현은 앞을 막아서는 직원을 살짝 밀치고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곧장 보인 것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기다리고 있던 영국 대형 길드 수장들의 모습이었다.
"누가 이렇게 강한 기세를 가졌나 했더니..."
"유현. 그리고... 엘레나?"
"척 보아하니 한국에 데려가겠다고 온 것 같은데?"
"그걸 직접 와서 이야기한다고?"
"얼마나 건방진 거야."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사람들은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졌다.
마치 원형 경기장처럼 입구를 둘러싼 인파가 완성되었다.
"엘레나. 요점만 전해. 총리에게 말했더니 널 데려가려면 이들에게 허락받아야 한다고."
"넵!"
엘레나가 힘차게 설명했다.
중간중간 반박이 끼어들었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꿋꿋이 설명을 이어갔다.
"흐음. 이유는?"
"케이디의 대장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
그 말이 엘레나를 통해 전해지자, 누구 하나 빠질 것없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그럼 빨리 허락해주지?"
"아쉽게도 그건 안 되겠는 걸~"
"그렇게 위험하면 차라리 영국에 맡기는 게 낫지 않아? 우리와 너 하나 중 누가 더 강할지는 뻔한데."
그 말에 유현이 씩 웃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연히 나지."
엘레나의 통역 없이도 그 말의 의미는 전달되었다.
이전보다 더 무거운 기세가 폭발하듯 주변을 짓눌렀다.
"건방진 애새끼 같으니라고."
"그 말, 후회하게 해주마."
"죽이자."
유현은 그들의 살기 앞에서도 태연했다.
"잘됐네. 차라리 이게 빠르지."
유현은 품속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살기 앞에서 적당히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만!"
그때였다.
인파 사이로 경비원에게 부축받은 총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뭣들 하는 짓이요! 이런 곳에서 싸우면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모르는 거요!?"
그의 일갈에 길드의 수장들은 으르렁대던 이빨을 다시 속으로 감췄다.
마나 하나 없는 일반인인데도 총리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다들 이야기는 들었겠지."
"엘레나는 차라리 이곳에서 맡는 게 안전합니다."
"그러니까요. 아무리 유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지만, 아카데미 보다는 길드가 돌아가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레나의 관한 이야기는 이미 퍼질대로 퍼져 있었다.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화제성은 충분히 그걸 가능케 했다.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그게 결론이었다.
총리는 유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눈치였다.
'결국 자기편 감싸기란 건가.'
어쩔 수 없다.
홈구장에서 원정팀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게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어드밴티지를 이겨낼 수 있는 설득력. 유현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엘리스. 네 생각은 어때."
"저, 저요?"
"가는 건 너잖아. 네가 정해. 넌 어디가 더 안전할 것 같아? 어디가 더 좋을 것 같지?"
엘리스는 눈썹을 구부리면서도 그 말을 상대에게 통역하여 전했다.
그 질문에는 다들 동의하는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저는..."
유현은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미 목욕탕에서 한 차례 대화했었으니까.
"한국에 가고 싶어요."
그러니 이 싸움은 사실상 승자가 정해진 승부였다.
"이, 이유는? 너도 고향이 편할 거 아니야!"
"언니가 이곳에 있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다고."
길드장들이 그녀를 설득했지만,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구해준 분과 함께 있고 싶어요. 언니도 그걸 바랄 거에요."
오랜 수면. 사실상 그녀에게 영국이 고향이라는 메리트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몇 달간 이니티움이 주입한 교육 덕분에 오히려 대한민국이 더 심적으로 고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군."
이제는 더 설득할 여지가 없었다. 유현은 총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총리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허락이 떨어졌다.
행정적인 절차는 알아서 처리해줄 터.
유현은 엘레나의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렸다.
뭉쳐 있던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진다.
"......"
길드장들은 그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멀어지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요."
"이 많은 인원의 살기를 혼자서 전부 감당해내다니."
"죽음에 의연한 것처럼 보였지."
"괜히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아니라는 건가."
한 마디씩 내뱉는 감상.
공통된 평가는 하나였다.
그가 지독하리만치 강하다는 것.
"우리가 동시에 덤비면 이길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 억지로 뿜어내는 게 아닌, 정적인 상태였는데도 그 정도의 기세가 느껴졌다.
게다가 단검을 빼든 순간.
찰나였지만 공기가 바뀌었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싸우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꿀꺽.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누군가가 마른 침을 삼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일었다.
"......가자고."
하나둘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난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누군가는 승부욕을 마음에 눌러 담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