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와!"
나갈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올 때는 셋이었다.
유현의 기숙사에 들어온 이니티움은 거실에서 자는 미르를 발견하고는 신발도 벗지 않고 뛰어 들어갔다.
"크르르..."
용의 기운을 느꼈는지, 곤히 잠들어 있던 미르가 눈을 떴다.
이니티움은 쓰다듬으려던 손을 거두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흐음. 초면에 인사가 너무 거친 거 아냐?"
낮게 으르렁거리는 미르.
이니티움 역시 더 물러서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쯧."
유현은 눈싸움을 시작한 둘을 지나쳐 엘레나와 함께 부엌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레나가 대뜸 물었다.
"저, 저게 뭐에요?"
유현이 그녀에게 물이든 컵을 건네며 답했다.
"신룡."
"모, 몬스터는 키우면 안 돼요!"
엘레나에게 신룡은 다른 몬스터와 다를 바 없었다.
"위험한 놈 아니야."
"그래도..."
"비밀로 해줄 수 있지?"
유현은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단지 부드러운 말투로 툭 내뱉었을 뿐.
하지만 효과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엘리스가 죽은 지금, 엘레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이방인과 마찬가지.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
몇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 이후 마주한, 유일한 가족이 사라진 세상. 두렵고, 무섭겠지.
그 세상에서 자신과 이니티움은 그나마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엘레나는 멀어지고 싶어도 멀어질 수 없다. 멀어진다면, 그녀는 또 다시 혼자가 될 테니까.
'어떻게 보면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꼴이나 다름없지만...'
단순히 드러나는 위협만 없었을 뿐이지,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직접적인 살의를 드러내는 것만큼 위협적이었다.
"......"
엘레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겁을 먹은 듯 지독하리만치 사색이 된 얼굴.
효과가 확실하다 못해 조금 과한 것 같았다.
"말만 안 하면 돼."
유현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어깨의 떨림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이렇게나 겁먹는 모습을 보니 조금 양심에 찔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살의를 드러내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겠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
그녀를 보던 유현은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너 그러고 보니까 영국 사람 아니야?"
"영국인 맞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입국은 어떻게 했어?"
엘레나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어서 눈썹이 구부러졌고, 눈동자가 위를 향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누가 보더라도 잘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하아."
엘레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만,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입국. 그게 그리 자주 하는 일도 아니고, 그 사실 하나 떠올리는 데 저렇게 오래 고민하는 걸 보면 정답은 뻔했다.
"저 그냥 선생님 따라서 왔어요."
"선생님?"
"네. 이니티움 선생님."
그래. 선생님이라고 할 작자가 그 녀석 밖에 없지.
'역시나 예상대로군.'
이니티움을 따라왔다면, 적어도 제대로 된 입국 절차는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그녀의 이전 행보에도 의문이 들었다.
"영국에는 가봤어?"
유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그녀가 영국에 돌아가지 않은 채 이곳에 있는 거라면, 자신은 지금 납치범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요!"
활짝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엘레나.
유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맙소사."
본국에 데려간 적이 없다면, 엘레나는 지금 사망자로 처리되어 있을 터.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순서였다.
"너 아카데미 입학하려면, 영국부터 가봐야겠는데."
"...왜요?"
유현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엘레나의 파란색 눈동자가 확장되고, 붉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콧구멍까지 벌렁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에게 있어 모범 사례로 쓰일 만큼 적절한 리액션이었다.
"내일 이니티움이랑 영국 가서 생존 신고 좀 하고 와."
***
다음 날.
이니티움과 엘레나가 영국으로 떠나고, 유현은 두 번째 실습을 위해 게이트가 위치한 곳으로 이동했다.
붉은 장미는 애니동과 다르게 본부 대신 곧장 게이트에 올 것을 요구했다.
"......"
그렇게 도착한 게이트의 주변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게이트의 후처리를 위한 인부들은 대기하고 있었지만, 헌터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와아아~ 유현이다아아~"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 긴 가죽 부츠, 그리고 가죽 자켓까지.
가죽 일색의 옷차림을 한 채지수가 검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제가 늦은 건 아닐 테고. 다들 어디 갔습니까?"
그의 물음에 채지수가 장난스레 웃었다.
"내가 정환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아? 네가 글쎄, A+ 게이트를 거의 혼자 클리어했다며?"
"그렇긴 하죠."
길드원들의 도움도 있긴 했지만, 거의 혼자 한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재밌었을까? 유현이 싸우는 걸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그게 헌터들 없는 거랑 무슨..."
그때, 채지수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몰려우는 불길함에 유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오늘은 나랑 같이 게이트 데이트~"
"......"
"자신있지? 나 어제 기대하느라 잠도 못 잤어. 여기 다크서클 봐봥~"
유현은 달라붙는 채지수를 밀어냈다. 결국 그녀의 말은 혼자서 게이트를 클리어하라는 소리였다.
"진심이에요? 나 혼자서 하라고?"
"왜? 못하는 거야 설마?"
"못할 건 없는데. 이런 게이트도 다 길드원들에게 경험이 될 텐데요."
그 말에 채지수가 폭소했다.
"얘 좀 봐~ 누가 누굴 걱정하니?"
"......하긴. 내가 5대 길드 걱정할 이유가 없네."
5대 길드란 명성은 괜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런 게이트를 몇 개씩 예약해두고 동시에 토벌을 진행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럼 출발~."
"뭐, 선발 탐험대 그런 건 당연히 없겠죠?"
"정답!"
진짜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었다. 길드 마스터라는 사람이 이리도 막무가내라니.
유현은 본 적도 없는 길드원들에게 문득 동정심을 느꼈다.
"현이현이~ 우리 길드 이름도 랭킹에 넣어줘~"
"......그게 본 목적이었구만?"
"후훗. 다 같이 도는 것 보다는 혼자서 도는 게 더 편하지?"
"그렇긴 하죠."
게이트의 기준은 세계 표준인 만큼, 그 클리어 랭킹도 세계와 공유한다.
게이트 타임 랭킹에 길드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명성과 홍보 효과를 얻는 것이다.
"당연히 1등 하겠지?"
"몰라요."
유현은 짧게 답하고는 게이트에 입장했다.
***
"흐아아아~"
한편, 영국으로 간 이니티움과 엘레나는 온종일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치며 저녁에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게 정말 힘든 일이네요."
"그러게. 심지어 오늘이 끝이 아니라니~"
이니티움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졌다.
드래곤조차 지칠 만큼, 영국의 행정상 부활 절차는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그래도 잘 됐어요! 내일이 되면 전 다시 태어나는 거잖아요! 와! 생일이 두 개다!"
"생일이 두 번이면 좋나?"
"한국 식으로 세면 네 번이에요! 음력이랑 양력!"
"오, 음력, 양력 기억하고 있구나."
사사로운 대화가 오갔다.
엘레나가 깨어난 이후, 이니티움은 그녀와 한 몸이라도 된 듯 온종일 붙어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은인을 본 소감은 어때?"
이니티움이 비스듬히 누운 채 엘레나에게 물었다.
"멋있고 좋은 분 같았어요."
"그리고?"
"음... 정이 많다?"
"왜 그렇게 느꼈어?"
"언니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언니 이야기를 했을 때, 꼭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선생과 제자의 관계처럼, 이니티움은 그녀가 느낀 감정과 이유를 말로써 정의하게 했다.
"평소에는 냉정하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아이 만큼 정이 많은 아이도 없을 거야."
그가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겪어온 고통은 이니티움조차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겪고서도, 유현은 태생적인 선함을 버리지 못했다.
"제가 유현님이랑 친해질 수 있을까요?"
"응. 걔는 예쁜 사람 좋아해."
"헉. 그럼 저랑은 친해지지 못하겠네요."
"후후. 밖에 나가서 그런 소리하면 한 대 맞을걸~?"
엘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니티움이 쿡쿡거렸다.
"먼저 씻어. 난 할 일이 있어서."
"네!"
엘레나가 화장실로 사라졌다.
이니티움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정자세로 앉았다.
'미르. 아직 즉시 전력으로 쓰기에는 미숙해.'
어제 유현의 집에서 만났었던 신룡, 미르.
그녀석이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됐는지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그런 우연이 겹친 덕에 큰 도움이 될 전력을 얻은 셈이니까.
문제는 성장.
신룡은 성장이 제법 빠른 편이지만, 제대로 힘을 내려면 아직은 한참 모자르다.
'언제 어디서 페데리코가 쳐들어올지 몰라.'
그때를 대비하여, 신룡의 성장을 가속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침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가설이 하나 있었다.
마족이 전력을 늘리기 위해 마물에게 사용했던 성장 촉진제.
그 성분을 마기가 아닌 마나로 바꾸면, 신룡에게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신룡의 성장을 촉진하려면, 어지간한 마나로는 안 된다.
이니티움은 그래서 품 속에 손을 넣어 룬석을 꺼냈다.
보호해야 할 물건이지만, 사용할 만한 곳이 있다면 아끼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만약 성공하면, 전부 써버리자."
모든 룬석을 사용하면, 페데리코가 이쪽을 습격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
그를 추격하고, 죽여 룬석을 빼앗는 것.
지금처럼 서로 쫓고 쫓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낫다.
[마나 블록]
주변에서 마나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도록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바로 주변에 있다면 몰라도, 멀리서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온종일 경계했지만, 페데리코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 마나 블록 마법이면 안심이다.
이니티움은 손에 든 룬석에 마나를 집어넣어 활성화시켰다.
룬석이 그녀의 손을 떠나 눈과 비슷한 위치까지 부유했다.
'여기에 약재를 섞고 약 성분을 더 하면...'
그때였다.
쨍그랑!
도시의 빛이 새어 들어오던 발코니의 커다란 창문이 박살 났다.
유리가 깨졌지만, 그 조각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천천히 움직이는 유리 조각.
움직임에 제한이 걸린 건 유리 조각뿐만이 아니었다.
"으..."
이니티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고의 속도는 변하지 않았기에,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이니티움.
그녀는 곧장 룬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속도가 붙지 않았다.
터벅.
느려진 흐름 속에서 정상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니티움은 구태여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뒤에서 걸어온 페데리코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에 섰기 때문이다.
"어때. 새롭게 흡수한 능력이야."
당연하지만, 이니티움은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면서 룬석을 붙잡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나 블록을 쓴 건 좋았어. 순간 기운이 사라져서 당황했다니까?"
페데리코가 허공에 부유하던 운석을 갈취했다. 이니티움의 표정이 천천히 분노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그런데 날 너무 얕본 거 아니야? 네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얼마나 멀리 떨어져도, 난 네 흔적을 찾을 수 있어. 그게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라고."
페데리코의 손이 공간을 찢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이니티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너의 아공간. 완벽하게 계산했다. 이제 내 것이나 다름없지."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이니티움의 아공간에 들어 있던 룬석들이었다.
"여기서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재미없지? 틸칸의 꿈이 이루어지는 걸 너도 봐야 할 거 아니야."
이니티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구겨진 인상이 그녀의 분노를 말해주었다.
"오, 역시 이겨내는구나. 그럼 이만 가봐야겠는걸?"
페데리코는 조금만 더 있으면 이니티움이 몸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도망치듯 포탈을 연 페데리코.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참, 화장실에 있는 매개체 친구 말이야. 각성 코마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아예 효과가 없는 게 아니란 건 알지?"
페데리코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그 부잣집 아가씨도 말이야."
"......으아아아아아!"
구속을 벗어낸 이니티움이 곧장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미 페데리코는 사라진 뒤였다.
후두두두둑.
허공에 체류하던 유리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멎었던 화장실의 샤워기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는 이니티움.
그녀가 눈을 치켜뜬 채 조금 전 페데리코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