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한 차례의 큰 전투를 겪고 난 이후, 공격대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연전연승으로 제법 달아올랐던 기세가 물이라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직전에 펼쳐진 전투.
자칫했으면 큰 피해를 입었을 뻔한 싸움이었다.
원인은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 그리고 방심.
누군가의 경고를 무시한 탓도 있었다.
"......"
모두 말없이 움직였지만,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그 시선은 한 사람을 좇았다.
실습생의 자격으로 레이드에 참여한 아카데미의 소년.
한 손에는 검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여유롭게 걸어간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그의 보폭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진짜 쩔더라."
"만화 주인공인 줄 알았음."
공격대 사이에서는 꾸준히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들 조금 전의 광경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전장의 허공을 날아다니던 한 자루의 검.
그 검이 춤추듯 움직이며 수많은 파이어 랩터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염력 특성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특성이 또 있어?"
유현을 향해 증폭된 의문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유현이 말한 대로, 통로는 전방에서 합쳐졌다. 조금 전 그 구간을 지나친 덕에 모두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기습도 막았잖아."
화이트 웨어 울프의 기습.
누구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거늘, 유현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응했다.
가장 뒤에서 최전방까지.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누구도 그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빨랐다.
"봐. 그러니까 처음부터 저 아이 말대로 했으면 방금 전 같은 전투도 없었을 거 아냐."
"저 정도 일줄은 몰랐지."
"괜히 세계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아무리 강해도 게이트에 들어오는 건 처음. 등급 테스트나 세계 선수권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진짜 실전 경험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박정환을 비롯한 길드원들은 유현이 하는 말을 그리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상황이 보여주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내 말이. 시작도 못 하고 여기서 후퇴하는 줄 알았다니까."
"하필 만나도 파이어 랩터 놈들을 만나가지고는..."
만약 유현이 없었다면, 레이드는 진즉에 중단되고 잔여 인력은 퇴각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쟤 진짜 처음 맞아?"
"꼭 베테랑 같단 말이지."
유현은 마치 숙련된 헌터처럼 탁월했다.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며 적의 흔적을 파악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체 저게 어딜봐서 실습을 나온 학생이란 말인가.
어떤 학생도 우뚝 멈춰서 벽의 흔적을 살피거나 땅바닥에 코를 바짝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들 잡담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여?"
박정환이 조금씩 목소리가 커지던 길드원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유현에게 다가갔다.
"뭐라도 찾았나여?"
바닥에 바짝 엎드려 코를 킁킁거리던 유현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냄새가 납니다."
"무슨 냄새여?"
"뜨거운 냄새요."
"제 열정이 불타면서 생긴 냄새에여."
유현은 앞쪽을 쳐다보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이 드리운 통로의 저편.
그 먼 곳에서 서서히 붉은색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옵니다."
"......혹시 한참 앞에 보이는 저 빛이 몬스터인가여?"
"예. 일자 통로라 잘 보이네요."
박정환이 눈가를 찌푸리며 붉은 점을 응시했다.
너무 멀어서 움직이고 있는 건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좀 더 가까워져야 어떤 몬스터인지 알 것 같은데여."
"레드 이프리트에요."
박정환이 움찔했다.
"저게 보여여?"
"예."
"아니, 어떻게여? 저 정도면 몽골인도 안 보일 텐데."
적을 파악한 유현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어떡할래요? 제가 잡아요? 아니면 뒤에서 지원만 할까요."
레드 이프리트. A등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로 혼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개체다.
다른 놈들과 달리 단독 행동 개체지만, 본인이 군단이라고 주장하듯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반대해야 마땅했다.
실습생에게 맡기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하지만, 박정환은 강력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혼자서 잡을 수 있어여?"
그의 힘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힘을 향한 집념이었다.
"껌이죠."
"그럼 보여주세여."
박정환이 유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러지 않았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갔을 기세였다.
"기왕이면, 저기서 말고 여기로 데려와서여."
"오케이."
유현이 대답한 순간. 박정환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
박정환이 눈을 크게 뜬 채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흔들거리기 시작한 붉은색 빛. 그 빛이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졌다.
"진짜 더럽게 빠르..."
쾅!
혼잣말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 이프리트가 내리꽂혔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던 박정환조차 화들짝 놀랄 만한 굉음.
조금 뒤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무기를 꼬나쥐었다.
"어, 어디야!"
"흩어지지마! 대형 유지해!"
강한 충격 속에 피어오른 먼지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곧 그들의 귓가에 닿기 시작한 타격음.
그와 함께 서서히 연기가 걷히며 먼지 속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마스터!"
공격대가 대형을 유지하며 재빨리 전방으로 움직였다.
"지, 진정해여! 나 괜찮아여!"
연기 속에서 박정환이 소리쳤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던 것도 잠시.
그들은 거칠게 흔들거리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 저게 대체 뭐에요?"
"레드 이프리트에여."
"레, 레드 이프리트? 중간 보스급 아니에요!?"
박정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먼지가 거의 걷혀 지척의 시야가 확보되었고, 곧 완전히 사라졌다.
"......"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짐승을 패듯 레드 이프트를 패고 있는 유현의 모습이었다.
"우어어어어어!"
이프리트가 끔찍한 포효를 내질렀다. 보통이라면 적을 향한 위협이나 경고로 들렸을 법한 하울링.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소리가 살려달라는 절규처럼 들려왔다.
"살다살다 몬스터에게 동정심이 들 줄이야..."
"저도요..."
불쌍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대체 얼마나 강해야 A등급 몬스터를 맨주먹으로 저리 때려잡을 수 있는 걸까.
물론 마나가 실려 있으니 완전히 맨주먹은 아니지만, 특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헌터에게 맨몸이나 다름없었다.
쾅!
벽에 꽂힌 레드 이프리트를 향해 유현은 쉼 없이 주먹을 꽂았다.
굉음이 연이어 울려퍼졌다.
그건 마치 샌드백을 때리는 복싱 선수의 훈련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정말이지, 일방적이고 가차 없는 구타였다.
"후."
순식간에 레드 이프리트를 마무리한 유현이 몸을 돌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길드원들은 구경거리를 본 행인처럼 멍하니 박수쳤다.
"브라보."
"어메이징."
"판타스틱."
"진짜 대박이네여."
그저 감탄 일색이었다.
그들의 아낌없는 칭찬에 유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 정도쯤이야."
"더 보여주세여! 다들 오늘은 몬스터 안 잡아도 괜찮져!?"
박정환의 질문에 모두가 긍정의 답을 보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유현. 그의 싸움을 이토록 가까이서 보는 게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한 길드가 그를 독점하기에는, 그의 그릇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자! 그럼 출발!"
박정환의 말과 함께 공격대가 다시 전진했다.
이번에도 유현이 최전방에 섰다.
*
*
*
그날 저녁. A+ 등급 게이트의 클리어 타임 랭킹이 변경되었다.
애니동의 이름이 타임 랭킹 1위 자리에 당당히 올라갔다.
***
첫 실습이 종료되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실습의 전제 조건은 위험하지 않은 게이트여야 할 것.
그렇기에 유현처럼 높은 등급의 게이트에 들어가 며칠씩 걸리는 토벌을 진행하는 학생은 없었다.
다만 유현에게만 예외 조건이 붙었을 뿐이다.
"간만에 몸 좀 풀었네."
아카데미 상위 클래스 단지에 위치한 고급 목욕탕.
유현은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 몸의 피로를 녹였다. 시간이 늦은 탓인지 목욕탕에는 유현 혼자였다.
"내일은 붉은 장미인가."
앞으로 며칠은 쭉 5대 길드의 실습이다.
오늘 시험한 건 육체적 능력.
이니티움이 만든 동굴에서 단순히 코어의 마나만 회복한 건 아니었다.
"조금씩 손맛이 돌아오고 있어."
오늘 애니동의 레이드에서는 무기와 마나 강화를 위주로 사용하며 전투했다. 단순히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역시 적을 직접 베는 게 더 감각 회복에 도움이 됐다.
"이 상태면, 웬만한 상대한테는 안 꿀리겠어."
단순히 강화 마법과 마나를 통해 강화한 육체의 힘만을 두고 봤을 때 그렇다.
만약 다양한 공격 마법까지 곁들여진다면, 페데리코와 싸워도 승산이 있으리라.
끼이익.
그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목욕탕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수증기 너머로 보이는 하얀색 머리칼. 그 아래로 나타난 새하얀 피부. 왜인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
상대의 이목구비를 본 유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너, 너..."
유현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분명 죽었을 텐데.
하지만 눈을 비비고 봐도, 엘리스와 똑같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이는 상대방.
투명한 바다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유현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엘리스의 동생."
"마, 맞아요."
한서희가 깨어났으니, 그녀가 깨어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게 무척이나 유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여기 목욕탕이야."
"모교탕?"
"장소를 잘못 잡았어."
그렇게 말하며 유현은 다시 다리를 굽혔다.
훤히 드러났던 그의 몸뚱이가 물에 가려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요."
"넌 덤이었어."
중간까지는 그랬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한서희를 위한 임상실험 대상자여을 뿐이었으니까.
"아, 나 덤이라는 말 알아요. 배웠어요."
"......"
"투플러스 원 하면 거기에 같이 오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그래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언니가 없어서 조금 싫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아무래도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같았다.
여기서 가만히 듣고 있을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유현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네!"
유현은 밖으로 나가 대충 아랫도리에 수건을 두르고 실내에 마련된 평상에 앉았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이 그의 물기를 말렸다.
그를 따라 나온 엘리스의 동생도 유현의 옆에 얌전히 착석했다.
"그냥 인사만 하려고 온 건 아닐테고."
"인사만 하려고 왔어요! 그동안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꼭 말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유현을 바라보며 싱글생글 웃었다.
엘리스가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다면, 이쪽은 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저도 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교장 선생님이 된다고 했어요."
"특성은?"
"언니랑 똑같아요."
손을 펼치자 그 위로 얼음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유현은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감탄했다.
깨어난지 고작 몇 달.
그간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이토록 섬세한 조작이라니.
"네 언니가 왜 죽었는지 알아?"
어차피 다 알테니 빙글빙글 둘러 말하거나 상대를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저를 지키려다가요."
"그럼 넌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어요."
유현이 그녀의 손 위에 피어난 얼음꽃을 움켜쥐었다.
부스러진 얼음 조각이 손바닥 위로 나뒹군다.
"얌전히 집에 처박혀 있는다. 하다못해 헌터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
"선택은 네 마음이지.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물론 엘리스의 전우로서 살갑게 대해줄 순 없겠지만."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침울해진다. 왜인지 메이블이 떠올랐다. 걔도 분명 감정 변화가 상당히 뚜렷했던 것 같은데.
"허락 안 해주면, 안 다닐게요."
"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꼭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목적이 뭔데? 헌터?"
유현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저는 언니의 복수하고 싶어요."
"복수?"
"케이디라는 놈들이 언니를 죽였다고 했어요. 간부들은 죽었지만, 대장은 아직 살아있어요. 그 사람을 때리고 싶어요."
부족한 어휘로 떠듬떠듬 말을 잇는 그녀. 고작 몇 달을 공부한 것치고는 상당한 구사력이었다.
"......"
복수라. 그렇게 명확한 목적이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 복수의 끝이 설령 공허할지라도, 유현은 복수에 찬성하는 바였다.
'모든 걸 잃은 사람이 다시 키를 쥐고 항해를 시작하는 데 복수만 한 것도 없지.'
가능하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 복수를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했다면, 그녀의 인생을 어느 정도는 이끌어주며 책임을 다해야 했다.
"허락해주시는 거에요?"
"그래. 애초에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게 웃기지만."
"와! 기뻐요!"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며 어린아이처럼 온몸으로 기쁨을 표한다.
그 진심어린 모습에 유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제 이름은 엘레나에요."
"엘레나. 근데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왔냐."
와도 하필이면 목욕탕에 찾아와서는. 이성의 알몸을 봐놓고는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내가 알려줬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니티움. 우리 꽤 자주보는 것 같은데."
"며칠만인가?"
"시간으로 세도 될 걸."
이니티움이 앞으로 나와 엘레나의 옆에 섰다.
"이 애 정말 귀엽지 않아? 이 머리 웨이브도 내가 넣어준 거야."
이니티움이 엘레나의 하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엘레나는 베시시 웃으며 그 손길을 즐겼다.
"이제 엘레나가 위험해질 일은 없는 건가?"
"그렇지. 각성 코마에서 깨어나며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잃었으니까."
"놈이 무슨 방법을 취할지 궁금하군."
"뻔해. 룬석을 되찾으러 오겠지."
"어디에 보관하고 있지?"
이니티움이 생긋 웃었다.
"비밀."
"철저하군."
"그놈의 귀가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니까."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참, 물어볼 게 있는데. 너 신룡에 대해 좀 아냐?"
"웬 신룡?"
"내가 하나 데리고 있어서 말이야. 지금 기숙사에 있는데..."
유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니티움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뜨인 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기 떄문이다.
"보, 보여줘. 보고 싶어."
"......"
"빨리! 나 신룡 한 번도 본 적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