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3개월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나의 분기가 지나고, 하나의 계절이 흐를 시간.
하지만 고작 그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를 보며 유현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
경찰의 통제 아래, 텅 빈 광화문 대로.
인도 위로 늘어선 수많은 인파가 유현을 향해 박수치고, 환호했다.
마치 개선장군을 금의환향하는 듯한 풍경. 아니, 그보다 더한 열기였다.
"이, 이게 뭐에요?"
유현조차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마왕을 잡고 제국에 되돌아 갔을 때도,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리진 않았는데.
다시 창문을 올렸지만, 함성은 차창을 뚫고 들어왔다.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는 거지."
귀빈을 모시는 고급 승용차에는 유현을 제외하고도 한 사람이 더 탑승해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대통령 만나면 좀 어색할 것 같은데. 저번에 한 번 쳐들어가서."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잠시 굳었던 한상용의 표정이 이내 풀어졌다.
"뭐, 그 자리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별 일 있겠어?"
"그렇긴 하죠."
한상용. 유현의 도움으로 그는 가까스로 정당방위를 인정받았다.
사람들 역시 그를 욕하기보다 지지했다. 불굴의 용기를 발휘한 이들에게 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빠르게 정당방위가 인정된 데에는 그런 여론도 한몫했다.
"살다 살다 대통령한테 직접 훈장을 받다니.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오늘 청와대에 마련된 자리는 놀라운 희생정신을 보여준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한상용은 과연 자신이 그런 명예를 얻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다들 죽음도 감수하고 들어갔잖아요."
"그렇긴 해도..."
"만약 제가 아저씨 같은 상황에 있으면 자책 안 해요. 거기에 죄책감 느끼고 얽매이는 건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짓이니까."
그들의 각오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 용맹한 선택과 희생에는 오직 박수만을 보내야 한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그들을 모욕하는 위로나 다름없다.
"......냉정하구나."
"그런가?"
유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
전장을 누비는 전사인 동시에 지휘관이자 리더인 존재.
자신 역시 숱한 희생을 겪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거기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길 수 있었을까. 하다못해 좀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는 않았을까.
만약으로 시작된 가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죄책감의 깊이를 더했다.
그 끝은, 깊은 자기혐오였다.
본인의 선택에 신뢰를 잃고, 이어진 전투에서 몇 번씩 패배했다.
이대로 용사의 여정이 끝나고 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 드워프 전사가 해준 말이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모든 전사는 자신의 무기를 직접 선택하오. 그 무기에는 사명감이 깃들지.
-사령관이 전사들의 죽음에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오.
누구도 전사들의 손에 억지로 무기를 쥐여주지는 않는다.
결국 모든 희생은 그들의 선택.
그 선택을 존중한다면, 그들의 죽음도 존중해야 한다.
'그들에게 가져야 마땅한 감정은 동정심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오직 경의뿐이다.'
그때 드워프에게 들었던 말은 여태껏 유현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동정은 할 수 있지만, 그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돼요."
"......"
"저도 누구한테 들은 말이에요."
"......현명하신 분이구나."
승기를 되찾은 원동력이 되었던 드워프의 말.
그 말은 차원을 뛰어넘어 또 다른 리더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래. 적어도 이렇게 죄책감 느끼기를 바라지는 않았겠지."
"예. 그러니까 훈장 받으면 하나씩 걸어줍시다."
검은색 승용차와 그 차를 호위하는 행렬은 텅 빈 도로를 가로질러 순식간에 청와대에 도착했다.
"와아아아아아!"
청와대 주변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세계 각 국가 유수 언론의 카메라도 보였다. 지금의 상황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유현. 그가 단순히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3개월이라는 공백이 있었지만, 그를 향한 관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경호원을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청와대 본관이었다. 그곳에는 훈장 수여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금 높은 단상. 단상의 배경에 자리 잡은 병풍. 단상의 양 끝단에는 대한민국의 국기와 청와대의 깃발이 깃대에 꽂혀 있었다.
단상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자리는 대부분 차 있었다.
여러 방송사의 카메라, 각 길드의 관계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훈장을 수여하게 된 이들.
"유현이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칼로 끊어내듯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
유현은 그 시선을 느끼며 한상용과 함께 맨 앞자리로 이동했다.
"무슨 대통령도 아니고 도로까지 통제하냐?"
서혜빈이 한참 앞에 앉은 그의 뒤통수를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말은 툴툴거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와서 훈장 준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신가온이 태연하게 말했다.
유현이 세계의 영웅으로 추대된 만큼, 선진 국가의 정상들이 그에게 자국의 명예를 수여하기 위해 한국으로 모였다.
보통이라면 자국으로 당사자를 부르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활약이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친지라 몸소 행차했다.
그 번거로움에 불편을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행사 시작하겠습니다."
주인공까지 모이자 수여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세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모든 이에게..."
라는 말로 운을 뗀 연설은 한동안 이어졌다.
테러의 피해자들에게는 유감을, 테러 수습과 테러를 막기 위해 나선 이들에게는 깊은 감사를 표한 내용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훈장 수여가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는 포탈 점거 작전에 참여한 소나무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 역시 포탈을 열어 여럿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었다.
한 사람씩 이어지는 수여 과정.
한상용까지 시상이 이어졌다.
그에게는 앞선 이들보다 몇 마디가 더 추가되었다.
"신체의 일부를 잃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용기를 치하합니다.
그의 두 발은 의족으로 대체되었다. 대통령은 그의 정장 주머니에 훈장 베지를 달아주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내려가는 한상용.
그다음은 마지막. 사실상 이 자리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유현의 차례였다.
그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현장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카메라의 셔터음도 더 빨라졌다.
"쟤도 참 신기해~ 어떻게 계속 강해지냐?"
붉은 장미의 길드 마스터 채지수.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 흥미로운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이전과는 달리 길게 이어지는 대통령의 언사. 그가 훈장을 수여하고 내려가자, 이번에는 다른 국가의 정상들이 차례로 올라온다.
"인정이여. 강하다는 건 알았는데, 설마 그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어여."
그녀의 옆에 있던 애니동의 길드 마스터 박정환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가 아니면 쉽게 반짝거리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휘황했다.
"데, 데려오고 싶네요."
단델리온의 길드 마스터 한송이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소심한 그녀마저 움직이게 만드는 강한 힘. 5대 길드 외에도, 이곳에 모인 길드의 관계자들 모두가 유현을 탐내고 있었다.
"그럼 다음은 미국 대통령인..."
유현은 여러 국가의 정상들에게 각 국가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미국에는 공로 훈장을. 영국에는 기사 작위를.
그중 어떤 국가도 대리인을 이용하지 않음으로 영웅을 향해 경의를 드러냈다
"진짜 대박이다."
"다른 나라 대통령은 처음 봐."
"와..."
관계자들 사이에서 감탄과 탄성이 오갔다. 새삼스럽게도 유현의 공로가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깨닫는 이들이었다.
"영빈관에 간단한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시상이 종료되고, 청와대의 관계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길드의 관계자들을 불러 자리를 채운 건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콧대 높은 길드의 마스터들이 기꺼이 들러리의 역할을 자처한 건 다른 행사 때문이기도 했다.
"미리 안내한 대로 신년 길드 모임도 그곳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신년 길드 모임]
봄의 시작을 앞두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정부 주최의 행사.
헌터 산업이 국가의 일부를 담당하는 만큼 일종의 정경 인사들을 부르는 것과 비슷한 자리였다.
표면적으로는 단순 친목을 위한 회동. 그러나 중요한 정보들이 오가기도 했다.
이를테면 헌터 생태계를 둘러싼 정부의 새로운 방침이라든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그런 정보들 말이다.
하지만 올해 모임 참가자들의 목적은 온전히 거기에 있지 않았다.
"......"
침묵 속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그러나 문을 나가 영빈관으로 향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유현에게 쏠려 있었다. 그에게 접촉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관계자들을 이곳에 모여들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흠."
유현 역시 그 시선을 느꼈다.
최강자전 이후 접근하지 않았던 길드들. 그가 소나무와 생화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영향력은 그 소문을 뭉그러뜨릴 만큼 강했다.
이미 실패했었고, 어쩌면 또 실패할 걸 알면서도,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매혹적인 힘. 놓치고 싶지 않은, 이미 완성된 인재였다.
[강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현은, 곧장 발을 튕겼다.
"...!"
순간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신형.
길드의 관계자들은 먼저 유현에게 접촉하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회장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미 유현은 영빈관에 도착한 뒤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차 맛이 좋군."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날카로운 인상의 카리스마 넘치는 사내.
생화 길드의 마스터 서동철이었다.
"앉지 않고 뭐하나?"
"아저씨 딸도 저기 있는데 아저씨는 왜 여기 있어요?"
"...그놈의 아저씨. 보나마나 네가 먼저 나올 게 뻔해서 와 있었다."
유현은 서동철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서동철은 꼰 다리를 풀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이미 알고 있을 듯한데."
"한 번 거절했잖아요."
"생각은 그대론가?"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길드 입단 제의는 거절한 바 있다.
그 생각에 변화는 없었다.
"조건은 맞춰줄 수 있다."
길드 입단을 제의했던 최강자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세계 선수권, 그리고 테러 사건을 겪으며 증명된 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S등급 헌터 몇 사람에 비교해보아도 꿇리지 않는 무력이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서동철도 한 번 더 시도해보았다.
"싫어요."
결과는 같았지만.
"......넌 너무 거절이 빨라."
"이미 정해둔 거니까요."
"너도 알고 있잖나. 아카데미 3년생은 길드를 정해 실습을 해야 한다는 걸."
"알죠."
"길드는 꼭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습도 할 수 없으니까."
"그것도 알아요."
"그럼 대체 왜 싫다는 건가? 생화 정도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유현은 피식 웃었다. 그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을 굽힌 행동인지는 알 것 같았다.
"5대 길드이니 설명 안 해도 압니다."
"이유라도 알려줘라."
"두 개가 있는데요. 우선 길드에 들어가게 된다면, 소나무를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계약을 맺었었어요."
"위약금은 물어주마."
"하나 더 남았어요."
유현이 길드를 거부하는 이유.
그건 아주 단순했다.
"이득 될 게 없으니까."
"......"
"생각을 해봐요. 혼자 길드 만들어서 활동해도 되는데, 뭣하러 내 수입 줄여가면서 다른 사람 밑으로 가겠어요?"
"......아주 당연한 이유였군."
유현이 밝힌 이유에 서동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간단하고 단순한 이유인지라 반박하거나 더 고집을 피우는 것도 힘들었다.
"그럼 실습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 곳씩 돌아가면서 해보려고요."
"그게 무슨..."
"한 번은 소나무, 한 번은 생화. 이렇게 5대 길드 한 곳씩 가보는 거죠. 혹시 몰라요. 그때 되면 제 생각이 또 바뀔지."
서동철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안 될 건 없지."
영빈관의 입구로 누군가 들어왔다. 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안칠성이었다.
"빨리 왔네요."
"대충 예상은 했지. 호시탐탐 말 걸 기회만 노리고 있는 사람투성이였잖냐."
안칠성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문밖으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교칙 상 실습을 위해 길드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 중간에 길드가 바뀌든 말든 상관은 없다."
안칠성이 규칙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유현은 서동철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실래요?"
"그, 그러면 찬성이요."
그 말에 대답한 건 서동철이 아니었다.
닫혀 있던 영빈관의 문을 열고 들어온 몇 명의 사람들.
길드의 명성에 맞게, 5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헥, 헥. 찬성이여."
물론 빨리 왔다고 몸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나도 찬성~ 어차피 안 될 거, 맛이라도 한번 보자~"
숨을 헉헉대는 애니동의 마스터 박정환에 이어 붉은 장미의 마스터 채지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묻고싶군."
"속셈이라뇨."
서동철은 유현이 의심스러웠다.
그간 줄곧 거부하던 길드를 이제 와서 1회용처럼 이용하겠다니.
심지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단서까지 부연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잠시 고민하던 서동철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한 번이라도 그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약간의 찝찝함은 문제가 아니다.
"찬성한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모두의 시선이 문 너머로 돌아갔다. 문 바깥에는 어느새 다른 길드의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넌 어떻지?"
홍해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를 지나 어색한 걸음으로 회장에 도착한 한상용.
서동철이 그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한상용이 천천히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유현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저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