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그해 겨울은 지독하리만치 추웠다. 칼날 같은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고, 하늘에서는 매일 같이 눈이 쏟아졌다.
이상 기후라고 불릴 정도로 냉혹했던 추위.
하지만 국제 사회의 정세는 어떤 때보다도 따뜻했다.
테러의 영향 때문이었다.
국가들은 테러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군대를 파견하고, 헌터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국가의 국민들 역시 한마음이 되어 테러 수습에 동참했다.
누군가는 성금으로 그 마음을 표하고, 누군가는 직접 스카이 아일랜드로 넘어가 민간 구조대로서 활약했다.
그야말로 전 지구적인 노력이 스카이 아일랜드를 향한 셈이었다.
그 덕분에 초기에는 미비했던 수숩이 박차를 가했다.
당초 1년을 예상했던 구조 작업이 고작 3개월 만에 마무리 된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망자를 낳은 희대의 테러. 사람들은 망자들에게 묵념했고, 다음을 위해 기도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안을 마련하는 움직임도 촉구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제 연맹은 본격적인 스카이 아일랜드 복구 작업에 착수했다.
그 시작은 설계.
사실상 초토화된 것이나 다름 없는 스카이 아일랜드의 밑그림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그렸다.
지역은 재분배되고, 각 구역의 특성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테러에 대한 확실한 방지책도 추가되었다.
그렇게 이듬 해 봄.
복구 작업의 첫 삽이 떠졌다.
그때까지도 유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
"하아."
동굴의 넓은 공동.
유현이 자신의 앞에 모여드는 뿌연 빛무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어어어!"
빛무리는 곧 사슴이 되었다.
"5303마리..."
지금까지 잡은 거대 사슴의 숫자다. 이 거대 사슴은 이니티움의 말대로 환영이었다.
죽이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다시 나타났다.
그 간격은 대략 1분.
사용한 마나가 회복되는 데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
그렇기에 유현은 모든 마나를 사용한 뒤에는 코어가 회복될 때까지 맨몸으로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 아니면 공격이 먹히지 않는 놈이라니.'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여전히 의문이다.
'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동굴의 구석. 벽면 위에는 바를 정을 의미하는 한자가 몇 개나 쓰여 있었다.
한 획당 하루씩.
시간을 정확히 아는 게 불가능했기에, 매초, 매분을 직접 세어가며 측정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나갈 날이 가까워졌다는 건 분명해.'
유현은 저편에서 달려오는 사슴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사슴 새끼.
전리품으로 녹용 같은 거라도 주면 몰라.
'그래도 덕분에 훈련은 제대로 하고 간다.'
유현은 머릿속으로 완성한 술식에 마나를 부여하고, 전방을 향해 발동했다.
[파이어 볼]
단순히 불덩이를 날리는 마법이지만, 그 효과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수련을 통해 거듭하여 단련된 그의 마나 코어. 판대륙과 비슷한 수준의 마나 양을 회복한 것은 물론, 그 밀도가 한층 더 단단해졌다.
그 덕에 같은 마법, 같은 마나 양이라도 더 강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쾅!
불덩이가 사슴의 머리에 작렬했다. 말 그대로 폭발하듯 흩어지는 맹렬한 화염.
뚜렷하던 사슴의 형태가 흐릿해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후."
유현이 손을 털며 숨을 내쉬었다. 공간의 영향으로 여전히 마나의 운용은 무겁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벌써 지났어?"
그 사이에 1분이 지난 걸까.
허공에 무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5304마리."
유현이 전방을 보며 자세를 다 잡으려던 그때.
빛무리 속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 사슴이 아니었다.
"야! 나와!"
이니티움이 머리만 빼꼼 내밀고는 유현을 향해 소리쳤다.
느닷없는 그녀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하던 것도 잠시.
유현이 씩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끝이구만."
"옷 좀 깨끗하게 해봐. 그러고 만날 거야?"
유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 만나는데?"
"부모님. 그때 너 누워서 자는 것만보고 갔다고 하시던데. 내가 그나마 뒤늦게라도 말해서 다행이지, 쯧."
"...아!"
유현은 아차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에 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을 알아차리고 연락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일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클린]
마나가 전신에 남은 먼지들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거지꼴이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막 샤워를 마친 듯 뽀송뽀송한 모습이 되었다.
"머리도 좀 자르고."
"거기까진 귀찮은데. 그냥 묶지 뭐."
유현이 마법으로 작은 머리끈을 만들어 뒷머리를 묶었다.
묶을 정도로 긴 머리는 아니었기에, 뒤통수에 작은 꽁지가 하나 생긴 수준이었다.
"마음의 준비되면 나와."
"가족 만나는 데 마음의 준비는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현은 침을 꿀꺽였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질 것 같았다.
전화라도 한 통 했다면 모를까.
테러 사건으로 큰 걱정을 끼치고는 직접적인 연락도 없이 3개월간 사라졌으니 화가 크게 나셨을 듯 했다.
"후. 가자."
유현은 이니티움이 사라진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풍경이 동굴에서 집으로 뒤바뀌었다.
거실.
그곳에 온 가족이 다 모여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유희연, 유하연. 그리고.
와락.
다짜고짜 안겨오는 한서희까지.
유현은 눈을 크게 뜬 채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한서희의 정수리가 보였고, 샴푸 향기가 코를 파고 들었다.
"야, 너 대체 언제..."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이니티움이 별말 없었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
한서희는 말없이 유현을 꼭 껴안고 있었다.
유현은 두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왜인지 흐뭇하게 미소 짓는 아버지와 조금 울적한 표정의 어머니.
유희연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술을 삐죽거렸고, 막내 동생은 자고 있었다.
"야, 좀 나와봐."
유현은 한서희를 밀어냈다.
하지만 한서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허리에 두른 양손을 맞잡으며 더 강하게 휘감았다.
"반가운 건 알겠어. 나도 반가워. 근데 좀 앉자."
여전히 꼼짝않는 한서희.
유현은 별수 없이 그녀를 매단 채 움직였다.
한서희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한서희 본인도, 유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아버지가 유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랄까. 어떤 의도가 있는 듯한 미소였다. 하지만 유현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괜찮아. 앉아라."
유현이 소파 사이에 앉았다.
반으로 접히는 한서희의 다리.
바닥에 무릎이 닿자, 한서희가 그제야 유현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떼어냈다.
"......"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한서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포옹을 푼 뒤 저쪽 구석에 놓인 빈 소파에 가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뭐야?'
그녀와도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나중에 해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유현은 우선 부모님과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쳐내고, 이미 뉴스를 통해서 알고 계시는 내용에는 좀 더 설명을 덧붙였다.
"고생 많았어, 우리 아들."
어머니는 한결 밝은 얼굴로 유현을 토닥였다.
"뭐, 수고했네."
유희연도 이번 만큼은 유현의 노고를 인정했다.
유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동생의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부모님 앞에서 함부로 손을 올릴 수는 없었다.
"저기, 어머님. 이야기 끝나셨으면 잠깐 따로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때, 멀찍이 앉아 있던 한서희가 다가와 조심히 물었다.
"응, 그럼. 물론이지!"
밝은 기색으로 답하는 어머니.
유현은 그 반응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따라와요."
한서희가 유현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유현은 얌전히 그녀에게 이끌려 집에서 가장 구석에 놓인 방으로 향했다.
탁.
방문을 닫자 차단되는 거실의 소음. 텅 빈 방 안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한서희가 몸을 돌려 유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마워요."
나지막이 감사를 전하는 한서희.
상기된 볼이 어색하게 꿈틀거렸다.
"일어나서 다행이네."
유현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녀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면, 오랜 시간을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이야기는 들었어요. 당신이 도와줬다면서요."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내가 그놈들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겠지."
"그 사람들이 나쁜거지, 당신은 잘못 없어요."
한서희의 말에 유현은 싱긋 웃었다.
"말이야 그렇지. 위로할 필요 없어."
"하든 말든 그건 제 마음이죠. 할 말 많으니까 조용히 듣기만 해요."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방 안을 거니는 한서희.
곧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슬픔이 담긴 눈동자가 유현을 향했다.
"쓰러져 있는 동안 긴 꿈을 꿨어요. 세상에서 당신이 사라지는 꿈이었죠."
"......꿈에서 내가 나와?"
"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유현은 괜히 멋쩍어져 턱을 매만졌다.
"그렇구만. 자주 나왔구만."
"근데 당신이 사라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당신도 꿈을 꿔봤으니까 알겠죠?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은 적어도 그 안에서는 현실과 다름없는 거."
"알지."
"그 세상에서 당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슬펐어요. 가슴이 아팠고, 온종일 울기만 했어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우울해 보였다.
꿈속에서 느꼈던 상실감이 현실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친구니까. 나도 네가 쓰러졌을 때 슬펐어."
한서희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건 듣기 좋은 소식이네요."
"내가 슬프다는 게 좋은 소식이냐?"
"당신에게 내 존재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정답은 아니에요."
"그럼 뭔데?"
한서희가 본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팍을 살짝 짓누르며 심호흡한다.
"깨어나고 몸을 회복하며 많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왜 그리 슬펐는지 수없이 자문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했죠. 그래서 나온 결론은."
한서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음."
유현은 멍청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좋아한다는 말이..."
"여러 가지 뜻이 있죠. 좋은 친구로서, 좋은 동료로서."
"그래, 그거."
"둘 다 아니에요. 저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의 옆에 있고 싶어요."
"......"
이쯤 되면 유현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감정의 의미를.
그간 그녀에 관해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반면, 한서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받아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구나."
"이유는 안 궁금해요?"
유현은 멀뚱히 한서희를 바라보았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눈치껏 물어보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이유가 뭔데?"
"당신이 했던 말들. 당신이 했던 행동들.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었어요. 당신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으면서, 푹 빠져버렸나 봐요."
"......"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한 번 더 안아봐도 돼요?"
"아까도 덥썩 안겨놓고는."
한서희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까는 몸이 먼저 움직였는 걸요... 싫으면 말고요."
유현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런 상황에 내성이 없던 탓이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한서희가 빙글 몸을 돌렸다.
"부담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앞으로도 그냥 평소처럼 대해줘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혹시 거절했다고 상처받는 건 아니지?"
"내가 앤 줄 알아요? 먼저 나가요. 학교에 연락도 하고요. 당신도 슬슬 길드를 정할 때니까요."
"길드?"
"3학년부터는 길드 실습 위주에요. 학기 시작이 코앞인데, 아직 당신만 안정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최근 겪은 사건의 스케일이 너무 크다 보니, 일상에 관한 것들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고민 좀 해봐야겠네."
유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하아."
홀로 남게 된 한서희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받아달라는 게 아니기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만 거짓말을 해버렸다.
받아달라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그의 곁에 남아있기 어려워질지도 모르니까.
"그냥 조용히 나가지. 내 걱정은 또 왜 하는지 몰라."
난감하게 만들었는데도,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는 그의 태도.
그래서 그가 좋았고, 그녀의 가슴은 더 사무치듯 아파왔다.
'차라리 잘해주지나 말지.'
그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도와줄 것이다. 그럴수록 이 마음은 깊어질 테고.
얼머나 더 아파야 할까.
얼마나 더 상처받아야 이 고통이 끝날까.
한서희의 시선이 문득 방에 난 창문으로 돌아갔다.
흐릿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창문을 두드리는 거센 빗줄기. 소나기일까.
"......소나기였으면 좋겠다."
한서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꼭 끌어안은 채 방을 나갔다.
그날 내내 비는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