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포탈이 닫혔다.
이니티움은 제집 안방이라도 된 것처럼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몸은 어때?"
"아직 피곤해."
"며칠 더 누워있어야겠네."
이니티움이 싱긋 웃으며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줄 게 있지 않냐는 듯한 행동이었다.
"뭐야?"
"약초. 구해왔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 일을 이야기한 건 안칠성과 한상용뿐. 다른 이에게 말한 기억은 없었다.
"내가 시켰거든. 그 메이코라는 아이를 통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케이디의 목적이 뭔지 알 필요가 있었어. 그걸 알기 전까지, 너의 존재는 방해가 될 뿐이었고."
그래서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방법을 선택했다는 게 이니티움의 말이었다.
"......"
유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이니티움이 황급히 덧붙였다.
"한서희가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어.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고, 거기에 맞게 계획을 수립했을 뿐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정말이야. 너랑 적대적인 관계가 될 게 뻔한데, 그런 짓을 했겠어? 그랬으면, 여기서 약초를 달라고도 안 했겠지. 난 이미 목적을 이루었으니까."
진지하게 변명하는 그녀를 보며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섬을 떠나지 않았겠지. 그럼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엘리스도..."
"정말 그랬을까?"
"......"
정말 그랬을까, 그녀의 질문에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선택지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가능성들.
그 과정을 지나 이어진 미래가 과연 지금과 같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해피엔딩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보다 몇 배는 안 좋은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할 말 없게 만드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이 정도면 그렇게 큰 피해를 본 건 아니야."
유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의 죽음.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조금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숫자로 따져봤을 때 큰 피해는 아니었다.
"이 이상의 가정은 무의미하겠군."
"그래. 그러니까 우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받아라."
유현은 아공간에서 그녀가 말한 물망초를 꺼내주었다.
병에 담긴 물망초를 보며 이니티움이 눈을 반짝였다.
"와, 예쁜데?"
"처음 봐?"
"워낙 옛날에 본 게 마지막이라서."
이니티움의 병의 뚜껑을 열자 바닷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꽃의 향기를 맡듯 병의 입구에 코를 가져다대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 마쉰다.
"흐음. 좋네. 바로 만들어야겠어."
"다른 재료는?"
"네 이름을 대고 미리 받아왔지."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다른 재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용케 받아왔네."
"약 이야기하니까 넙죽 주던데? 네가 그만큼 신뢰받고 있단 뜻이겠지."
만약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좀 더 복잡한 확인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순순히 그녀에게 넘긴 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유현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걸로 마지막 재료도 끝."
"며칠이나 걸리지?"
"일주일?"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 약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몇 달이라도 상관없었다.
"잘 부탁한다."
"꼭 수술실 들어가는 의사한테 보호자가 건네는 말처럼 들리네."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내가 지구 짬밥이 몇 년인데. 온갖 드라마를 섭렵했지."
참 할 일 없는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진즉에 룬석이나 찾아볼 것이지.
유현은 잠시 한심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려고?"
"다시 움직이려면 빨리 회복해야지."
"일어나서 뭐 할 건데? 아카데미도 방학했다는데."
"몰라."
여러 생각들이 뒤엉키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호야와 미우는 어떻게 처분할지.
페데리코는 어디서 찾아낼지.
언제쯤이면, 판대륙의 마나가 전부 전환될지.
"얼굴이 복잡해 보이는데. 좀 도와줘?"
"알지도 못하면서 돕기는."
"몇 개는 알 것 같은데. 우선 페데리코. 그놈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유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알아?"
"아직은 몰라. 하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놈은 결국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시 나타날 테니까."
"......역시 그렇겠지."
"응. 그리고 다음 고민. 이건 아마 첫 번째 고민이랑 비슷하겠네."
이니티움이 유현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나 코어가 위치한 부근이었다.
"놈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서 힘을 기를 생각일 것 같은데."
"힘은 충분해. 마나가 문제지."
"그거나그거나. 마나 변환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
그 말은 유현의 귓가에 마치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생각해보면, 이니티움도, 페데리코도, 틸칸도 모두 판대륙의 마나와 함께 지구로 넘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힘에서 자신과 같은 제약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려줘."
"하나 알아둘 게 있어. 우선 네가 쌓은 마나의 양과 우리가 가진 마나의 양은 달라. 네가 압도적으로 많지."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건가?"
"가능하긴 해. 더 고통스럽고, 더 힘겹고, 더 오래 걸릴 뿐이야."
이니티움이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빙글 몸을 돌리자 입고 있던 붉은 로브가 나풀거린다.
"할 수 있겠어?"
"물론."
유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오랜 시간 이어지든 상관없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힘을 되찾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
'페데리코.'
그가 꾸민 계획은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버텼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강한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처럼, 유현은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 생각이었다.
"그럼 일주일 뒤에 바로 시작한다. 괜찮지?"
"정확히 뭘 하는 건데?"
"비밀. 그때 가서 알려줄게."
이니티움이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곧 방의 한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일주일 뒤에 다시 보자."
"호야랑 미우는?"
"몰라. 적어도 케이디에 돌아가지는 않았겠지. 아마 소나무 길드에 잡혀 있지 않을까?"
"......"
" 아, 혹시 날 다시 보고 싶으면 이름을 불러. 그럼 안녕~"
이니티움은 무책임한 한 마디를 남기고는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완전한 침묵이 내려앉은 입원실.
입원실이 병원의 꼭대기에 있는 덕에 작은 소음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유현은 침대에 등을 붙였다.
두 눈은 천장을 향한 채 멍하니 생각의 바다에 잠겼다.
희생이 있었지만, 일은 나름 잘 풀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판대륙과 지구를 연결하는 차원 통로의 존재.
그게 존재한다는 건 마음만 먹으면, 다시 판대륙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괜히 그립군.'
그곳의 풍경, 여러 국가와 종족들. 한 번쯤은 그것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볼 수는 없겠지.'
차원의 통로가 열리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지구로 넘어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두 차원의 시간 선이 다른 만큼, 아마 판대륙의 모습은 자신의 기억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포기가 빠를수록 아쉬움도 없지.'
유현은 생각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페데리코.
그놈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놈은 강하다. 일정 범위의 마나를 고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모든 마나를 회복한 뒤에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놈의 힘이 과연 그게 끝일까?'
놈의 정확한 힘을 모른다.
심지어 특성의 영향으로 놈은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다.
'나도 최대한 전력을 기르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구에는 여러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
그 기술을 활용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더 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니티움도 어느 정도 지식은 있겠지.'
틸칸은 지구에서도 마법과 기술 결합의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마법적인 처리를 한 갑옷과 무기였다.
그걸 곁에서 봐온 이니티움이니,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지 않을까.
'자금은 포션으로 충당할 수 있어. 부족하면 포션을 더 만들어서 팔면 되고.'
마침 방학도 시작되었으니 포션 브랜드의 규모를 키우기에는 적기였다.
'참, 그러고 보니 신룡도 있었지.'
그동안 거의 잊다시피 했던 존재. 주인인 자신의 모습을 잊었으면 어쩔까 걱정도 됐다.
'김풀잎을 더 잘 따르는 건 아니겠지.'
신룡도 성장시키면 훌륭한 전력이 될 수 있다.
비록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성장을 가속 시킬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비슷한 부류인 이니티움이라면 그 방법을 알지 않을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유현이 시야에 이상함을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천장에 새겨진 줄무늬들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멍하니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상함을 느낀 유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그 미묘한 흔들림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뭐야?"
얼핏 보기에는 포탈의 일렁거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포탈이 아니었다.
포탈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특유의 기운이 없었다.
'환각은 아닌데. 전송 마법인가?'
멀리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는 마법.
마법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상대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페데리코."
천장 위로 흐릿한 이목구비가 나타났다.
긴 머리와 서구적인 외모가 흐릿함 속에서도 느껴졌다.
페데리코였다.
-설마 룬석을 매개체로 마나를 회복할 줄이야. 내 힘을 이어받은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떠나다니, 참 안타깝군.
"쓸 데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이건 무슨 장난 질이지?"
-내가 직접 찾아가길 바라나?
"지금이라면 날 죽이기에 딱일 텐데. 게다가 필요한 게 많잖아? 룬석도, 매개체도."
흐릿한 인영 너머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농작물은 수확의 시기가 존재하고, 열매도 무르익어야 맛있지. 강해져라. 네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보람이 있도록.
그가 바라는 건 강한 힘.
굳이 지금 당장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유현이 더 강해진 뒤 그를 죽여 그 힘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의 건방진 언행에 유현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네.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당연한 걸 묻는군. 내 힘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라. 그게 너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다.
그 말과 함께 천장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유현은 누운 상태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힘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라.'
룬석도, 매개체도 찾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은 듯하다.
그리고 그 방법이, 자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드는 방식인 것 같았다.
"어이가 없네."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듣기만해도 화나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유현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주마."
크게 호흡을 들이쉬는 유현.
곧 병실 바깥으로 이니티움을 외치는 유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틸칸과 내가 함께 만든 마법과 시간의 동굴이야. 마나의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서 버티기 힘들 거야."
"이 안에서 마나를 운용하면 된다는 거지?"
"응. 휴대전화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해. 마나를 채웠다가, 모두 사용하고, 다시 채웠다가, 모두 사용하는 식으로."
페데리코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를 들은 유현은 그 길로 이니티움을 불러 곧장 수련 의지를 밝혔다.
그렇게 오게 된 곳은 웬 이름 모를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있는 동굴이었다.
듣자 하니 힘을 회복하기 위해 마나가 넘치는 장소에 이러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틸칸과 이니티움, 두 사람만 사용하던 곳이라, 페데리코에게 들킬 염려는 없다고.
"정말 그게 다야? 그냥 마나만 쓰면 된다고?"
"그렇다니까."
"너무 간단한데."
유현의 말에 이니티움이 피식했다.
"직접 해 보면 그렇지 않을걸?"
유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해보지 뭐."
유현은 동굴의 입구 앞에 섰다.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내부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과연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
"참, 내부에는 마나 운용을 돕는 환영이 존재해. 열심히 싸워 봐."
"뭐? 그런 건 진즉에..."
"그럼 세 달 뒤에 보자."
이니티움이 유현의 등을 툭 밀쳤다. 동굴과 외부를 차단하던 투명한 막을 지난 유현. 그가 홱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손을 뻗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더 나아가지 않았다.
"...쳇."
유현은 다시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곧 넓은 원형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의 테두리를 따라 이어진 빛무리가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확실히 불편하군."
움직이는 것도, 마나의 운용도.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듯 저항감이 상당했다.
"여기서 그냥 마나를 사용하면 된다는 건가?"
운용을 돕는 환영이 있다는데,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유현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나의 운용을 시작했다.
"...크윽."
마나가 몸을 달리자, 곧장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혈액이 역류하는 기분이랄까. 공간 자체가 마나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힘들기는..."
바로 그때.
쾅!
공동의 중앙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허공으로 피어오른 뿌연 흙먼지. 유현은 코와 입을 막은 채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우어어어어어!"
커다란 뿔과 거대한 몸뚱이의 사슴이 안광을 빛내며 먼지 속에서 걸어 나왔다.
"우어어!"
두두두두두두.
유현을 발견하자 대지를 울리며 달려드는 사슴. 유현은 급히 발을 튕겼다.
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거대 사슴이 벽에 충돌했다.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을 텐데도, 그 사나운 안광은 꺼지지 않았다.
"......환영이라며."
사슴이 다시 발굽질을 시작한다.
유현은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우어어어!"
유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슴과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