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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을 통해 도착한 곳은 여전히 스카이 아일랜드였다.
적어도 연결된 너머가 섬의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유현은. 뜻밖의 풍경에 멍청히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그를 향해 이니티움이 다가왔다.
이니티움은 누구보다도 페데리코를 잘 알고 있었다.
"놈은 곧장 동굴부터 찾아갔겠지. 그리고 내가 숨을 만한 곳을 하나씩 좁혀갈 거야."
"여기라고 안전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맞아. 하지만 적어도 우선 순위에 두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전까지 있던 섬의 서쪽에 반대편에 놓인 섬의 동부 지역.
시험의 탑을 비롯한 여러 교육시설이 가득한 구역이었다.
"좀 맡아줘."
유현이 이니티움에게 엘리스의 동생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니티움은 가만히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넘기고, 넌 어쩌려고?"
"당연히..."
"당연히 그놈들을 찾아가 싸우겠다는 멍청한 말은 안 하겠지?"
"지금 처리해야 해."
이니티움은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도 이해는 돼."
만약 그놈들을 그냥 보내면, 언젠가는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이다. 엘리스의 동생을 노린 위협은 덤일 테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무 섣불러."
"이길 수 있어."
"그 상태로?"
그녀의 눈에 유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마트혼의 독살검을 사용하며 활기를 빼앗긴 탓에 두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그 무기랑 신발, 군단장의 전리품이지?"
이니티움이 유현의 팔과 다리를 살폈다.
어둡게 변색 된 두 신체 부위.
군단장의 장비에는 마기가 가득하다. 마족이 아닌 자가 사용하면, 이처럼 마기에 침식된다.
"침식이 심해지면, 중독될 거야. 마기에 중독되면, 상황은 지금보다 악화되겠지."
"......"
"당장 뛰쳐나가서 케이디를 괴멸시킨다면 몰라. 너도 지금 상태로는 그게 불가능하단 건 알잖아?"
유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사용할 장비는 많지만, 결국 장비는 아이템. 사용자의 몸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피로가 누적되고, 마나도 모두 사용한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어도 제대로 된 싸움이 가능할 리 없었다.
"오늘 어쭙잖게 싸웠다가는 언젠가는 마기에 중독된 상태로 싸우게 될지도 몰라. 제대로 걷지도 못할 텐데, 싸울 수 있겠어?"
이어지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이니티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자."
유현은 침음성을 흘렸다.
상식적으로는 그게 맞다.
수많은 적을 상대로, 수많은 전장을 누벼왔으니 오히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태로 싸워봤자,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알면서도, 멍청하게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네 말대로 할게."
"잘 생각했어."
"오늘 말고, 내일부터."
유현의 손에는 어느새 룬석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까 전, 구경하겠다기에 건네주고는 회수하지 않았던 룬석이었다.
이니티움의 눈이 커졌다.
"너, 너 설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정신 나간 짓 하지 마. 드워프가 만든 아이템도 아니고, 인간이 대충 보고 따라 만든 솜씨야. 룬석이 폭발할 거라고."
이니티움이 유현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팔 보호대의 마석 구멍을 막았다.
"누가 여기 끼운대?"
"뭐?"
유현이 냅다 입 안에 룬석을 넣었다. 목울대가 꿀렁이며 룬석이 식도를 타고 저 아래로 내려간다.
"이, 이...!"
가당치도 않은 일에 이니티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미친놈아! 그걸 먹으면..."
"나중에 갚을게."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죽을 수도 있다고!"
소리치는 이니티움을 보며 유현이 씩 웃었다.
"안 죽어. 몇 번 해봤어."
반응은 곧장 왔다.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의 파동. 푸른 빛이 피부를 뚫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윽!"
심장을 찌르는 듯한 격통.
밀려오는 고통에 유현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접었다.
"......"
이니티움이 마른 침을 삼켰다.
룬석을 직접 흡수하는 광경은 살아생전 본 적이 없었다.
걱정이 되는 한편, 시선을 떼 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으으으으윽!"
고통은 서서히 커져갔다.
심장을 찌르다 못해 헤집는 고통. 마나의 근원에서 시작된 통증은 곧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팔, 다리, 머리 등.
어디 하나 가릴 것 없이 끔찍한 아픔이 몰아쳤다.
"크아아아악!"
유현이 몸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멈추지 않는 통증에 온몸을 비틀어댄다. 입에서는 연신 앓는 소리가 빠져 나왔다.
그러기를 몇 분.
우뚝.
시간이 멈추듯 그의 몸이 굳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유현. 미동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야! 야! 정신차려!"
이니티움이 뒤늦게 그의 몸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몸에서는 어떠한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급속 냉동고에 넣은 듯 빠른 속도로 식어가는 몸뚱이.
"......"
이니티움이 손을 유현의 가슴께에 올렸다.
박동이 없다.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넋이 나가 다시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텅 빈 눈으로 눈앞에 시체가 된 유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어이가..."
바로 그 순간.
유현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이윽고 느껴지는 강대한 마나의 기운.
이니티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야! 일어나봐!"
감겨 있던 유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몸을 일으킨다.
"크으. 진짜 더럽게 아프네. 룬석은 이래서 싫다니까."
"...하. 미친놈.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정색한 채 욕지거리를 내뱉는 이니티움. 유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웃어?"
"살다 살다 드래곤이 내 걱정하는 게 신기해서 웃는다."
만날 죽어라 싸우던 종족에게 걱정을 받는다는 건 무척이나 진귀한 경험이었다.
이니티움 역시 유현의 말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긴 하네."
"그치? 그러니까 빨리 포탈 열어줘."
"신기한 거랑 포탈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리 룬석의 힘을 흡수했어도, 그게 만능이 아니란 거 알잖아. 특히 지금 네 상태로는."
룬석에 많은 마나가 담겨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릇이 작으면 결국 남은 마나는 흘러 넘친다.
현재 유현이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금도 몸에 흡수되지 못한 마나들이 바깥으로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보다 상태는 훨씬 좋아."
유현은 계속 마법을 사용했다.
활기를 돋우는 마법,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 마기의 침식을 없애는 마법 등.
침식 제거 같은 비효율적인 마법들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룬석은 단숨에 흡수되지 않는 존재. 게임 속 마법사가 마나 포션을 먹은 채 마법을 사용하면, 줄어든 마나가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것처럼, 지금 유현의 상태도 그랬다.
유현은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했고, 마나 코어에는 끊임없이 마나가 채워졌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나는 일부에 불과했다.
"......내가 잊고 있었네. 네가 어지간한 대마법사 뺨치는 실력자라는 걸."
마법의 핵심은 속도.
유현은 누구보다 빠르게 술식을 그리고 마법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아까 그 좌표로 포탈 열어봐. 이와 먹은 룬석, 뽕 뽑아버려야지."
이쯤 되니 이니티움도 더 말릴 수 없었다.
마나 코어의 양 자체는 비루하지만, 마나가 계속해서 회복되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최상급 룬석이라도 지속 시간이 길지는 않아. 그러니까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나한테 신호 줘."
"허공으로 중지를 날릴게."
"약지로 해."
유현의 앞에 포탈이 열렸다.
"중지."
그가 한 마디를 남긴 채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
"젠장! 어서 보고부터 해라!"
유현이 사라진 직후.
매개체를 빼앗겼다는 정보가 페데리코에게 보고되었다.
본부에 있던 페데리코는 곧장 몇 가지 장소를 짚어주었다.
이니티움의 예상대로, 가장 먼저 지목된 곳은 동굴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그곳에 없었고, 페데리코는 대기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간부들은 여태껏 섬을 떠나지 않은 채 서부 구역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쉽게 빼앗겨 버릴 줄이야."
"그놈 대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공격을 없애는 거지?"
"목소리를 낮춰라."
"케이가 죽었다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조용할 수 있겠어?"
"너답지 않게 감상적이군, 엔."
엔이라 불린 짧은 머리의 여자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케이, 그 새끼가 나한테 얼마를 빌려 갔는데! 뒤졌으니 돌려받을 수도 없고."
"...화낼 만하군."
"그렇지? 아무튼 간, 유현 그 새끼 다음에 또 만나면 묵사발을 내주겠어."
엔이 유현을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어차피 공격 패턴이야 뻔하니, 전략적으로 들어가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다."
"엠. 네가 확실하게 앞장서란 말이야. 오케이?"
엠이라 불린, 조금 둔하게 생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주목!"
그때, 에프가 간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기저기 나뉘어 쉬고 있던 간부들이 에프를 향해 모였.
"페데리코님이 말하기를, 섬에서 유현의 마나가 느껴졌다는군요. 놈은 아직 섬에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나로 요약하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내용이었다.
"놈은 강력한 지원자와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까 전 날개가 그 증거지요. 그러니 다섯 사람씩 한 조를 만들어 섬의 각 구역을 순회하고..."
그때, 갑자기 에프가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미 몇몇 예민한 이들은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에프가 왜 저러지?"
그의 반응에 다른 이들도 하나둘 위를 올려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머문 어두운 하늘. 그곳에 일렁거리는 원형 포탈이 나타났다.
"......"
간부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설마 제 발로 여기까지 기어 온다고?]
곧 포탈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누군가는 주먹을 꽉 쥐었고, 누군가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의 얼굴에서 간부들은 여러 감정을 느꼈다.
오만, 허세, 분노 등.
제각기 다른 감상이었지만, 그 감상의 끝에 이어진 행동은 모두 같았다.
"유현이다아아!"
그 목소리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라도 되듯, 모두가 각자의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근접 계열의 간부들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원거리는 뒤에서 근접 계열을 지원하라! 버프 마법을 사용해도 좋다!"
에프가 크게 소리치고는 쇄도하는 행렬에 합류했다.
그의 지시에 몇몇은 어리둥절한 채 시선을 교환했다.
"버프 마법이라니?"
"그게 뭐야?"
반면, 그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한 남자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마나로 그려지는 마법의 술식.
기하학적인 문양과 괴이한 문자의 집합이었다.
"그, 그게 뭡니까? 제이?"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간부가 물었다.
"마법이다."
마법.
상위 10인을 제외한 간부들에게는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그것.
"마, 마법이요? 그게 정말 존재하는 거였습니까?"
"설마 거짓말은..."
갈색 머리의 제이가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하라는 뜻을 전했다.
"의심하지 마라. 위대하신 페데리코님의 가르침을 얌전히 지켜보도록."
곧 마법이 완성되었다.
허공을 수놓던 도형과 문자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며 사라졌다.
[강화]
그 마법의 타겟이 된 건 에프였다. 에프의 몸에서 푸른색 빛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달려가던 그의 속도가 폭발하듯 가속했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간부들이 경악했다.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속도. 마법의 실체를 눈앞에서 마주한 순간, 그들의 상식이 개벽했다.
"마, 마법이..."
"실존했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이를 비롯한 원거리 간부들이 힘을 합쳐 몇 개의 마법을 더 사용했고, 다른 육체형 간부들 역시 몸의 레벨이 몇 단계나 상승했다.
"케이의 복수다!!! 개자식아!"
"생포하라! 고문하라!"
기세를 드높이며 달려가는 이들.
그 속도는 질풍 같았고, 힘은 파괴적이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힘의 레벨, 모두가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원거리도 공격 준비! 근접 계열이 혼란을 줘 공격을 흡수하지 못하게 하면, 공격하라!"
에프가 명령을 내리고, 유현을 향해 도약한 바로 그때.
줄곧 가만히 있던 유현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것도 마법이라고."
[헬 파이어]
하늘이 열렸다.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돌덩이가 지상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