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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목적?"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 그이는 지구의 과학과 판대륙의 마법이 합쳐진다면,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과학과 마법.
각자의 장점이 뚜렷하다.
마법은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과학 역시 그렇다.
'설마 그런 시도를 할 줄은….'
판대륙에 넘어갔던 초기.
아직 지구의 기억이 그리 흐릿하지 않을 때, 유현 역시 비슷한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틸칸은 그 상상을 정말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포탈을 계속 연구한 것도 그래서야. 두 세계가 연결되는 게 목표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으니까."
"그걸 지금 맥락에서 밝힌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겠지?"
이니티움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데리코, 그놈은 용사의 책무를 버린 주제에 끝없이 힘을 추구했어."
"아까 그놈 이름이 페데리코야?"
"응. 페데리코 키에사. 이탈리아 놈이지."
페데리코는 강해지길 원했다.
실제로 산맥에 숨어든 오랜 시간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놈이니 틸칸의 계획이 아주 환상적이라고 생각했겠지. 성공만 한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설마 실패해서 뒤통수라도 때렸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겠네. 우린 중간에 계획을 포기했어."
생각도 못 했던 계획인 만큼 그 이유 역시 짐작되지 않았다.
"왜? 방법을 못 찾았나?"
"찾았지. 여러 번 실험했었고.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어."
"결과라면..."
"차원 포탈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차원의 경계선이 붕괴 해. 그런데 차원을 연결하려면, 게이트의 크기가 반드시 커야 했지."
경계선의 붕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차원의 경계가 사라지면, 판대륙과 지구가 그대로 합쳐져."
"차원이 다른데 그게 가능해?"
"응. 말이 좋아 차원이지, 사실상 이면세계나 다를 바 없으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동전의 양면과 같아.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동전의 앞면. 그런데 이제, 동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앞면과 뒷면이 합쳐지는 거야. 과학적으로 따지면 양자역학의 다중..."
"아니. 됐어. 말해도 못 알아먹으니까 시간 아깝게 설명하지 마."
"두 세계가 합쳐지는 건, 말 그대로 겹쳐지는 거야. 이해하기 어려우면, 지구라는 그림 위에 판대륙으로 덧칠한다고 생각해."
"결론만 말하면, 세상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진다는 뜻이군."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세상이 되기야 하겠지만, 큰 피해가 생길 게 뻔했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선택하는 행동이 도리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계획.
그 위험성을 깨달은 틸칸은 곧장 계획을 폐지했다.
"그 뒤로 연구와 실험은 멈췄어.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포탈을 열어 보던 틸칸도 이 동굴에서 두문불출했고."
"페데리코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겠지?"
"맞아. 놈은 강해지길 원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지."
페데리코는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동굴을 기습했다.
당시 케이디의 분위기는 제법 어수선했는데, 부족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페데리코가 독단적으로 많은 범죄를 일으킨 탓이었다.
"나도 그도 그때는 몰랐어. 단순히 그가 장사와 놀음으로 돈을 벌어온다고 생각했으니까."
"조직에 사람이 늘어나는데도?"
"말했잖아. 표면적으로는 작품 연구회였다고. 다들 틸칸의 책을 읽고 탐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생각했지."
페데리코의 영향으로, 케이디는 사실상 범죄조직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조직원들을 아꼈고, 조직원들의 충성심 대부분은 그의 몫이었다.
"그 습격에서 나만 겨우 살아남았지."
"그 정도로 강했나?"
"페데리코가 우리에게 밝히지 않은 힘이 있었어. 바로 죽은 상대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
망자 흡수.
그것이 페데리코가 가지고 태어났으며, 두 사람에게 밝히지 않았던 특성이었다.
"틸칸은 반항도 못 한 채 죽었고, 그 힘마저 흡수한 페데리코를, 나는 이겨내지 못했어."
이니티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로 파르르 떨려왔다.
"그나마 한 명은 살아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절대 용서 못해."
"그건 또 누군데?"
"호야."
"...뭐?"
"유전은 몇 세대를 건너뛰고 발현된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모양이야. 그 아이는 마족의 힘과 드래곤의 힘을 가지고 있지 뭐야?"
유현은 멍청히 입을 벌린 채 호야를 생각했다.
'진짜 핏줄이었잖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상했던 대로 조금씩 섞인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드래곤과 인간.
두 번째는 용인 혼혈과 마족.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피가 다시 한 번 섞였다.
그렇게 나온 아이가 바로 호야였다.
"기이하군. 피가 옅어졌는데, 도리어 능력이 발현되다니."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그 덕에 그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평범한 아이였다면, 놈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이제야 알겠네. 왜 룬석이 반응했는지."
그에게서 특별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 건, 예상했던 대로 그 피가 너무나 옅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룬석이 반응한 이유는, 룬석의 가진 특출난 예민함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내가 알기로 케이디가 범죄조직이 된 건 꽤 오래전인데."
"드래곤은 성장이 느려. 반면, 마족은 빠르지. 두 특징이 어우러져서 호야가 아직 아이 같은 모습일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시간이 꽤 오래 지났잖아. 근데 넌 대체 그동안 뭘 했지? 그놈들이 이렇게 판칠 동안?"
유현의 정곡을 찌르는 일침에 이니티움은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에는 슬픔이 묻어있었다.
"방황, 은둔."
"......"
"살아갈 이유가 없었어. 놈을 이길 힘도 없고, 복수할 의지도 없었으니까."
"그럼 계속 짱 박혀 있지. 왜 이제야 나타나는데?"
이니티움은 말 대신 손을 들었다. 그녀가 뻗은 손가락은 정확히 유현을 가리켰다.
"나?"
"응. 범죄조직이 된 케이디에 남아 있던 끄나풀이 알려줬어. 아무래도 용사가 돌아온 것 같다고."
"난 어디서 말하고 다닌 적 없는데."
"하이패스 테스트, 최강자전. 전혀 밝혀진 게 없는 학생이 그런 활약을 보인다면, 사정을 아는 이들은 곧장 의심부터 들거든. 그래서 조금 조사해 보니, 바로 이거다 싶어 나한테 연락한 거지."
"......그놈은 판대륙을 어떻게 알고 있지?"
"내가 본체로 목욕하다 들켰거든."
"뭐?"
"진짜야. 기억을 지우려고 했는데, 틸칸이 그러지 말라고 했어. 한 명쯤은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그놈은 믿을 만하다고. 사실 조직에 몇 없던 연구원 중 하나였거든. 틸칸이 죽고 곧장 바닥에 넙죽 엎드려 살아남았지."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며, 이니티움은 그리움에 젖은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나올 만한 이야기는 전부 나왔다. 동굴에는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유현은 유현 나름대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어.'
정확히 100%는 아니지만, 그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밝아진 길 너머로 걸음을 내디딜 타이밍이었다.
"하나만 더 묻지.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복수?"
이니티움은 고개를 저었다.
"복수는 아니야."
"그럼?"
아련한 눈빛으로 동굴의 책상을 지그시 바라보는 이니티움.
소중한 사람을 잃는 슬픔을 알고 있었기에, 유현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세계를 지키고 싶어. 틸칸이 사랑한 세상을, 내 아이들이 태어났고 살아갈 세상을."
"그럼 정해졌네."
그간 아군인지 적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일치하는 목적.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도와주지. 너도 날 도와."
"......뭐 계획이라도 있어?"
"없는데."
이니티움이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이리 자신감에 차 있니?"
이니티움이 유현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의 엄지에 입을 맞췄다.
"우리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네 발자국의 옆에 언제나 내가 있으리."
유현은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의 방패이자 검이 되며, 언제나 옆에 서는 조력자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살다 살다 드래곤과 협력하게 될 줄이야."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니티움이 손가락을 튕겼다.
환영이 사라지고 다시 동굴의 전경이 나타났다.
"놈들의 계획은 하나. 차원 선의 붕괴야."
"방법은 전부 알겠지?"
"틸칸의 연구소는 물론 여기도 털렸으니까. 그나마 내가 룬석을 가로챘으니 시간은 벌 수 있어. 어지간한 마석으로는 포탈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이니티움이 룬석을 꺼내 보여주었다. 테러를 관망하며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그 룬석도 팔았어?"
"아니. 이건 따로 보관해 뒀었어. 놈이 습격했을 때, 목적이야 뻔했으니 게이트 곳곳으로 보내버렸지. 그게 설마 이곳 연구실에 모여 있을 줄은 몰랐지만."
룬석을 바라보던 유현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룬석 숫자가 정확히 몇 갠데?"
"직접 세 본 적은 없는데. 아마 스무 개는 되었을 거야."
"회수한 것도 세어 봤어?"
"어차피 다 회수했을 텐데 뭐."
"세어봐, 빨리."
이니티움이 묶어둔 주머니를 풀러 책상 위에 엎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들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빛을 발한다.
"하나, 둘..."
서서히 늘어가는 숫자.
그 숫자는 열두 개에서 멈췄다.
"...부족하네?"
"하아."
"자료실에 있는 게 다가 아니었나? 아니면, 아직 게이트에 숨긴 룬석을 전부 찾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사안이 중대하니 최대한 낙관적인 판단은 피하기로 했다.
"일단 놈이 룬석을 몇 개 가져갔다고 가정해보자.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개수는?"
"열 개."
"그럼 그나마 다행인데. 절반은 여기에 있잖아."
그러나 왜인지 이니티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놈들이 룬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 있어."
"마석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놈들을 찾으면 돼. 보나 마나 암시장이겠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니티움이 심상치 않은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사람. 사람을 매개체로 쓸 수 있어. 적은 숫자의 룬석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지. 비윤리적이라서 틸칸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야."
사람을 쓴다는 말에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설마 한서희를 노린 이유가..."
"그 아이는 각성 수면에 빠진 상태야. 매개체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네."
"각성 수면은 뭐야 또?"
이니티움은 유현에게 각성 수면에 대해 설명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죽음의 위기에서 겪는 현상.
정확히는, 죽음의 위기를 이겨냈기에 성장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각성 수면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 몸 자체가 마나의 기폭제나 다름없어. 깨어났을 때, 각성을 위한 에너지가 몸 내부에 가득하니까."
"한서희는 내가 구했는데."
"음? 그래? 그럼 안심인데."
유현은 왜인지 모를 찜찜함을 느꼈다. 무언가를 잊은 듯한 감각이었다.
'뭐지? 누가 또 있었...'
그때, 언젠가 병원에서 안칠성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엘리스의 동생. 아무런 증상도 없이, 꽤 오랜 시간을 사경에서 헤매고 있다고 했었다.
"뭐야? 왜 그래?"
유현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이니티움이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유현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포탈 열어. 한 명 더 있어."
"뭐? 더 있다고? 각성 수면이 그렇게 흔한 게 아닌데."
"엘리스의 동생. 그 아이도 3년간 한서희와 같은 상태야. 그래서 약을 구할 때 그녀의 것도 같이 구했어."
이니티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녀가 허둥지둥 마법을 구동했다.
"...이미 늦었을 것 같긴 한데."
"뭐? 왜?"
"엘리스가 한참 전에 동생을 찾아달라고 말했거든."
그 시점에서, 이미 병원에서 동생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섬에 남아 있을 수도 있어.'
포탈을 사용하여 금방 돌아갔을 수도 있지만, 아직 목적이 남아 섬에 체류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설령 없더라도, 흔적이라도 찾아야 해.'
게다가 아직 섬의 테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열었어."
유현은 고민 없이 전방에 열린 포탈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