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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을 통해 넘어간 곳은 동굴이었다.
천장에 달린 종유석을 타고 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빛이라고는 책상 위에 놓인 등불 하나뿐이었다.
'...책상?'
왜 동굴에 책상이?
유현이 동굴의 환경에 의아함을 느꼈을 때.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마법이라도 부린 듯 곳곳에 설치된 등불이 동시에 켜진 것이다.
"안녕."
낡은 나무 책상 앞에는 마찬가지로 낡은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니티움."
"어머. 내 이름을 아는구나? 그 개같은 놈한테 들었나 보네?"
"세 번째 용사. 틸칸에 대해서는 네가 알 거라는데."
"보여줄게."
이니티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과 동시에 유현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이니티움은 사라졌고, 책상이나 가구 같은 것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동굴의 중앙에 생겨난 커다란 포탈이 보였다.
기존에 알던 포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포탈이었다.
좀 더 거창하고, 좀 더 화려했다.
-크윽!
그 커다란 포탈 너머에서 한 남자가 몸을 던졌다.
'틸칸.'
유현은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세 번째 용사이자 판타지의 시초 격인 틸칸의 얼굴이었다.
인터넷에서 보던 사진과 완전히 똑같았다.
'전혀 늙지 않았구나.'
자연스레 불길한 가정 하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유현은 거기에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그 가정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야.'
틸칸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는 웬 가녀린 체격의 여자가 안겨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도, 유현은 곧장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생겼군.'
이니티움 역시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건 과거인가?'
과거라기에는 눈앞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지는 풍경.
유현은 앞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유현의 손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들을 뚫고 허공을 만지작 거렸다.
"이건 내가 처음 넘어왔을 때의 모습이야."
유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던 이니티움이 어느새 옆에 있었다.
막 과거의 얼굴을 본 참이라 그런지, 그 옆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넌 드래곤이잖아. 마물이 왜 인간이랑..."
"모든 드래곤이 마물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던 건 아니었어.
고룡들은 대부분 마족을 거부하고 은거를 선택했지."
"...내가 알기로 그런 고룡은 없는데."
"드래곤이라면 모두 죽이기 바빴으니까. 시대가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지."
이니티움은 차분하게 과거를 말했다.
"나 역시 그 추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저 평화롭게 살고 있었을 뿐인데 인간들에게 공격받았고, 도망쳤지."
"틸칸이 널 구했군."
정답이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진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도망친 산맥에서, 틸칸은 지구로 넘어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어.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날 그가 치료해 주었지."
"용사의 책무를 버리고?"
"싸움보다는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참, 대단하다면 대단한 사람이다.
그 힘을 가지고 고작 연구하는 데에다 써먹다니.
"아까 네가 말했지. 마법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그는 과학자였어. 지구의 과학이 판대륙에 통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응용력이 뛰어났기에 판대륙에 존재하던 여러 가지로 온갖 것들을 만들어냈지. 여전히 원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차원을 넘어온 것도 그 장치들과 마법의 결합 덕분이야."
유현은 굳이 원리를 묻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니, 자신이 듣는다고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걸 보니 꼭 누구한테 쫓기던 것 같은데."
유현이 눈앞의 환영을 가리켰다.
조금 전 틸칸은 급하게 포탈을 통과했다.
이니티움은 그 품에 안겨 있었고. 그다지 평화로운 광경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치료도 받고, 추격도 따돌려서 평화롭게 지냈는데 말이야."
"놈들이 계속 추적했군."
"응. 그게 일인 녀석들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
"......드래곤 슬레이어즈."
드래곤을 잡는 데 특화된 이들.
드래곤처럼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존재들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드래곤을 사냥하는 집단이다.
유현 역시 그들과 함께 드래곤을 토벌했던 기억이 있다.
"살벌했었는데."
"그놈들이 동굴을 습격했어. 제법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추적자라는 포지션이 있어. 놈들은 드래곤의 마법적 흔적과 물리적 흔적을 동시에 찾아내."
유현의 말에 이니티움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그런 녀석이 있었구나!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네."
"계속 말해봐. 그 뒤로는 어떻게 됐어?"
이니티움이 적인지 아군인지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유현의 관심은 이미 틸칸과 그녀의 과거에 쏠려 있었다.
"보여줄게."
이니티움이 손가락을 튕기자, 시간이 멈춘 듯 고정되어 있었던 과거의 환영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넘어오자마자 사라진 포탈. 이니티움이 첨언하기를, 원래 포탈은 불완전한 상태라고 했다.
"도망치기 위해 그런 상태에서 강제로 열어버린 거야. 운이 좋아 망정이지, 자칫했다면, 차원의 경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비디오의 배속을 누른 듯 스피디하게 움직이는 환영.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을 엿보기에는 충분한 속도였다.
동굴에는 가구가 늘었고, 쓰임새를 모를 연구 장비들도 늘어났다.
제법 그럴듯한 거주지가 되어가는 와중에, 두 사람은 애정행각을 보이기도 했다.
키스를 하거나, 깊은 사랑을 나누거나.
"......"
"후훗. 이런 적도 있었지."
틸칸과 이니티움은 연인이라도 된 듯 동굴 안에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인간과 드래곤의 사랑이라니.
참으로 기묘하고, 상상해본 적도 없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드래곤 하나 소개해 줄까?"
"꺼져. 좀 더 빨리 돌려봐. 그놈은 언제 나오는데?"
"이제 하이라이트가 하나 있는데, 그냥 넘겨?"
유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이라이트?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불러오는 이니티움의 배.
폴리모프는 결국 인간의 외형을 가져올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종간의 임신도 가능할 줄이야.
"애는 어딨어?"
"죽었어."
날붙이로 잘라내듯 소리가 툭 하고 끊겼다.
침묵 속에서도 동굴 속의 과거는 계속해서 미래로 나아갔다.
포탈의 연구와 실험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지구에서 포탈을 여는 건 사뭇 다른 일인지, 많은 실패를 겪었다.
지속된 노력 끝에 처음으로 포탈을 생성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조차도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저렇게 바쁜데도 아이랑은 잘 놀아주네."
"우리는 좋은 부모였지."
두 사람은 늙지 않았지만, 아이는 평범하게 성장했다.
포탈에 변화가 생긴 건 아이가 성인이 된 시점이었다.
꾸준히 포탈의 지속 시간을 늘려가던 도중. 느닷없이 포탈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마족?"
검은색 날개를 가진 마족 꼬마였다.
"바로 알아보네."
"당연하지. 저놈들 죽이는 게 내 일이었는데."
"근데 여기서는 왜 못 알아봐?"
"뭐? 뭔 소리야?"
이니티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전방으로 눈을 돌렸다.
마족은 그 뒤로 동굴에 눌러 붙었다. 포탈이 곧장 사라진 탓에 바로 돌아가지 못한 원인도 있고, 본인이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기도 했다.
"판대륙에서 버려졌던 아이야."
"전쟁통이니 전쟁고아야 수두룩하지."
"아니. 정말 버려졌어. 쓸모가 없다고 했었나."
마족은 성장이 빠른 게 특징이다. 환영 속 마족 꼬마는 고작 몇 년 만에 성인 수준으로 자라났다.
"내 딸과 저 아이가 짝을 맺었지. 반대했는데, 꼴에 누구 자식이라고."
밀접한 접촉이 늘어가고, 어느 순간부터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진짜 할머니였네?"
"제일 오래 살아 남은 할머니가 됐지."
"......"
"내 아이의 아이가 또 자식을 낳았지. 그 친구는 아직 살아 있어."
"증조 할머니인가?"
그녀의 말대로 또 다른 아이가 영상 속에 나타났다.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 거기에 마족의 피까지 더 해진 아이였다.
이번에도 아이는 부모와 조부모의 극진한 보호 아래서 성장했다.
그걸 보며 유현은 크게 하품했다.
당사자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유현에게는 상당히 지루한 광경이었다.
"이거 언제까지 봐야 하냐? 내가 원하는 건 언제 나와?"
"조금 있으면."
얼마나 지났을까.
포탈은 이제 제법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점부터, 포탈 안에서 무언가가 본격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책, 도구, 장신구 등.
판대륙의 물건들이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가 빛을 발한 순간이지. 단순히 포탈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위치를 지정하려고 노력 했거든."
그렇게 나온 물건들은 동굴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이따금 이니티움이 그 물건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마석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차원 포탈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마나가 필요해."
그동안 꾸준히 마석을 사용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니, 부연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판대륙의 물건들이 왜 세상에 나왔나 했더니.'
의문 하나가 해소되었다.
물론 아직 궁금증은 남아 있다.
"책에 지도를 숨긴 것도 너희지?"
"지도? 뭐야 그건?"
"어떤 길드의 창고에 판대륙의 책이 있었어. 마법이 걸려 있었고, 그걸 해독하니 지도가 나왔지."
유현은 아공간에서 책을 꺼내 이니티움에게 건넸다.
이니티움은 책을 펼쳐 휙휙 넘기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아니야."
"그럼 틸칸의 짓인가 보네."
"......혹시 이 책, 내가 가져도 될까?"
"내놔, 인마."
유현이 책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이니티움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재생되는 환영에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반복되는 똑같은 나날.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유현은 문득 한 가지 원초적인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포탈을 열려는 거야? 넘어왔으면 끝난 거 아냐?"
지구로 돌아온다는 소기의 목적은 진즉에 달성했는데도, 틸칸의 실험은 끝날 줄을 몰랐다.
"틸칸은 소환된 사람이 자신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강제로 소환당한 그들을 다시 지구로 돌려보내는 게 포탈을 열 수 있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지."
"......일종의 구조대였군."
이니티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반복된 실험은 소환자의 흔적을 찾고 위치를 조정하기 위함이었어."
"세 번째 용사 놈도 그렇게 돌아왔나?"
"...응."
대답하는 이니티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전 욕을 지껄이던 그렇고, 관제소에서 그놈이 했던 말도 그렇고.
그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뭐, 보면 알겠지.'
또 다시 포탈이 열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세 번째 용사가 등장했다.
"거지꼴이네."
"그 험준한 산맥에 몇백 년이고 은둔해 있었으니 당연하지."
"나도 좀 찾아주지 그랬냐."
"후후. 우리도 원한다고 다 할수 있는 게 아니라서. 성공한 것도 한 번뿐이야."
유일하게 이들이 연 포탈을 통해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던 남자.
머리를 밀고, 깨끗하게 씻으니 아까 전 포탈 관제소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나타났다.
"저놈을 지구로 데려온 게 우리의 가장 큰 실수였지."
유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니티움은 자연스레 설명을 시작했다.
"케이디의 시작이 뭔지 알아?"
"작품 연구회."
"표면적으로는 연구회지. 그래야 후원자들이 돈을 보내주거든. 우린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실험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도 했어. 뭐,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어쩌다 테러 단체가 됐지?"
이니티움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술을 뗀다.
"사실, 게이트를 열려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