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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긴 더럽게 많네."
포탈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유현은 몰려온 짐승들을 상대했다.
아까 전과는 달리 엄청난 물량이 밀려 들어왔다.
'어그로가 너무 심하게 끌렸어.'
여러 사람을 한 번에 옮기기 위해 로프에 묶어 매단 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본 팀의 비명이 수많은 짐승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다음에 옮길 때는 입을 막아버려야겠어.'
한국 팀을 옮길 때는 인원이 적어 등에 업고 품에 안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고 미리 알지 못했다.
"유현님! 뒤에!"
유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먹을 뻗었다.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짐승 하나가 그의 주먹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포탈 언제 열리냐!"
"거의 다 됐습니다!"
포탈은 한 번에 뿅 하고 열리지 않는다. 준비 과정이 필요하며 제법 오래 걸린다.
저쪽에서도 최대한 서두르고 있겠지만, 상황이 급하다고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못 버틸 건 없어.'
문제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
고작해야 몇 분이지만, 그 몇 분 동안 또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열렸습니다! 유현님!"
몇 분 뒤.
쿠로가네가 다른 이들을 포탈로 밀어 넣으며 소리쳤다.
아래쪽을 확인한 유현은 그를 향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같이 안 가십니까!?"
"먼저 가!"
망설임 없이 적을 향해 나아가는 유현. 쿠로가네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홱 몸을 돌렸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하다니..."
쿠로가네가 맨주먹으로 무너진 기둥을 후려쳤다.
그는 거친 숨을 몇 번 내쉬더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다 갔군.'
지상을 흘끗인 유현은 곧장 관제소를 떠났다.
주변에 가득 깔린 개량 짐승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어.'
지금처럼 계속 관계된 국가에만 도움을 요청하면, 구조의 한계는 명확하다.
포탈 하나를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원활하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
'미국? 중국? 영국?'
여러 국가들이 떠올랐지만, 누구도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당장 이곳에 구조를 위한 헌터도 보내지 않는 마당에 누가 과연 도와줄까.
'일단 사람부터 찾고 보자.'
유현은 다시 도시 속으로 뛰어들었다.
***
일본팀의 구조 소식은 자국의 언론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처음으로 보고된 구조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일본에 쏠렸다.
구조된 이들은 누구인지, 그들을 구조한 사람은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구조가 이루어졌는지 등.
-대한민국의 유현님이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구조된 직후 촬영된 영상에서는 쿠로가네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유현님께서는 맨몸으로 적들을 죽였습니다. 비록 포탈 관제소까지 가며 몇 번이나 속을 게워내긴 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죠.
쿠로가네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구조된 직후인 탓에,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다른 일본 팀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구조된 건 저희 뿐입니다.
질문은 계속됐다.
처음에는 사건과 관련 있는 질문들이었지만, 그 뒤로 갈수록 쓸데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메이코를 품에 안고 나왔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한국 팀에게 이케가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는지 등.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쿠로가네의 미간은 일그러졌다.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현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여론이...
줄곧 참아오던 쿠로가네는 그 질문에 가만히 손을 들었다.
격앙된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한 차례 호흡하는 영상 속 그의 모습.
그러나 결국에는 감정을 참지 못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안위를 위해 손 놓고 상황만 지켜보고 있는 당신네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자국의 정부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겨냥한 한 마디였다.
쿠로가네는 가까이에서 자신을 촬영하던 카메라를 덥썩 붙잡고는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당신들이 진정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 안다면 당장 사람을 보내세요! 아직도 섬에는 사람들이 남아있단 말입니다! 유현님 혼자서 그 많은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고요!
쿠로가네가 울분에 차 소리쳤다.
-나는, 나는 돕고 싶었지만,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돕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입술을 꽉 깨무는 쿠로가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짙은 혈흔이 입술을 타고 터져 나왔다.
인터뷰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더 진행했다가는 선을 넘는 발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인터뷰 영상이 올라온 채널 역시 공식 채널이 아니었다.
"......"
한상용은 심각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구조된 건 한국 팀이었지만, 보안상 그들의 구조 소식은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다.
케이디가 한서희를 노리고 있는 만큼, 그들이 구조되었다는 게 알려진다면 한국에서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구조 사실을 알려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유현..."
자신을 쓰러뜨린 간부를 무찌르고, 다른 한국 팀을 훌륭하게 구출해낸 그의 활약.
분명 대단한 행동이었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빠져나온다던 놈이...'
포탈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 걱정하던 자신에게 유현은 안칠성과 메이블도 데려온 뒤에 넘어갈 거라며 먼저 가라고 했다.
그 뒤, 그 두 사람은 넘어왔지만, 유현은 넘어오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만."
설마 다른 이들을 구하고 있었을 줄이야.
한상용은 얼굴을 쓸었다.
그 역시 구조대를 파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국가 원수의 명령으로 모든 헌터의 발이 묶인 상황.
아무리 길드 마스터라도 쉽게 헌터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젠장."
한상용은 휠체어를 움직였다.
의사는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라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 두 손 놓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
"끄아아아악!"
"우웨에에엑!"
밧줄에 꽁꽁 묶인 한 무리의 인파.
유현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거침없이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입을 막아놔도 소리 지를 놈은 지르는군.'
옷을 찢어 입에 쑤셔 넣었는데 기어이 그걸 뱉어내고 소리를 지른다.
'침묵 마법은 마나가 아까운데.'
코어의 마나는 계속해서 회복되고 있다.
더불어 팔 보호대도 마석을 갈아 끼워가며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마나량이 부족하다.
최대한 서두르기 위해 강화 마법을 유지한 탓이었다.
'포탈은...'
관제소에 진입한 유현은 곧장 열린 포탈이 있는지 살폈다.
한국 팀과는 달리 일본 팀의 구조는 세상에 공표되었을 터.
자신이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곳쯤은 포탈을 열어놓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없군.'
역시 말로 직접 호소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건가.
그들이 왜 그토록 사리는지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구조대를 파견하면, 케이디가 직접 공격할 거라며 엄포를 놓았으니까.
그러니 이해는 되지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조대는 몰라도 포탈 정도는 열어놔도 되잖아.'
유현은 관제소에 마련된 비상 시설로 들어갔다.
전파가 끊긴 지금 유일하게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소통망이 바로 이곳에 있는 위성 전화였다.
유현은 구해온 사람들에게 자국에 전화를 걸라며 연락망을 넘겨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워어어어어!"
그들의 뒤를 쫓아온 짐승들이 사방에 깔려 있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전장이었다.
'설마 포탈을 안 열어 주지는 않겠지.'
포탈이 열리기 전까지, 이들의 접근을 막으면 된다.
아까와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생각한 유현이 적들을 향해 도약하려던 순간.
달빛이 드리운 어두운 하늘 아래. 일렁거리는 수많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것은 포탈이었다.
이윽고 포탈 안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집힌 해골 가면을 착용하고, 전신에 새까만 망토를 두른 수많은 사람.
유현은 그들이 누구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케이디."
케이디의 조직원들이었다.
"너구나. 우리 일을 방해하는 애송이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일반 조직원이 아닌 이들이 섞여 있었다.
가면을 착용하지 않은 두 사람.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가면을 착용한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제트가 누구한테 죽었나 했더니."
여자 하나와 남자 둘.
케이디의 간부였다.
유현은 그들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 새끼도 간부랍시고 뻗대던데, 그 꼴을 보아하니 너희 수준도 알만하군."
유현의 말이 통역기를 통해 그들의 귓가에 똑똑히 울렸다.
아낌없는 비꼼에 두 사람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어리석은 놈. 네가 아무리 길고 날뛰어도 학생의 레벨이다. 그깟 짐승 몇 놈 잡았다고 기세가 등등해진 모양인데, 우리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제트는 간부 중 가장 수준 낮은 녀석이야. 온갖 약물에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밑바닥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지."
유현은 따분한 얼굴로 귀를 한 번 후비고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시설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러 개의 눈동자. 왜인지 눈빛에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설마.'
유현이 관제소의 포탈을 죽 훑었다. 어떤 포탈도 가동 중이지 않았으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버리겠다는 뜻이군.'
자국민의 목숨을 구하는 것조차 거부하겠다는 그 태도가 한탄스러웠고, 동시에 지긋지긋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인간의 이기심을 목격했던가.
아무리 국가의 위기가 닥칠 수 있는 문제라고는 해도, 이런 식의 외면은 너무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유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때.
머리 위로 서슬 퍼런 감각이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유현은 곧장 발을 튕겼다.
자리를 피한 직후, 땅 위로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졌다.
'포탈?'
다시금 느껴지는 위협적인 감각.
유현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직원들이 등장하던 조금 전의 모습처럼 여러 개의 포탈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 포탈 안으로 보이는 건 힘껏 시위가 당겨진 활이었다.
시위에는 날카로운 화살이 매겨져 있었다.
'마나로 만들어졌어.'
포탈과 활은 서로 다른 특성이었다. 마나의 차이가 느껴졌다.
'각기 다른 능력을 서로 협력하여 사용하는 건가.'
곧 화살의 시위가 힘을 잃었다.
발사된 수십 발의 화살이 유현을 향해 쇄도했다.
쐐애애액!
다수의 파공음이 허공을 찢었다.
마나가 실린 활은 금방이라도 살갗을 헤집을 듯 매섭게 날아왔다.
[슈퍼 서클 배리어]
유현은 전신에 원형의 방어막을 둘렀다. 원형 방어 마법인 서클 배리어의 술식에 몇 개의 식을 추가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마법이었다.
그만큼 마나가 더 소요되지만, 방어력도 높아졌다.
팅!
방어막을 때리고 튕겨 나가는 화살이 있는가 하면, 방어막을 꿰뚫은 화살도 있었다.
'강하군.'
방어막을 관통하지는 못했다.
얕게 뚫고 들어왔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화살의 위력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총알 수준인데.'
유현의 눈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듯 비릿한 웃음을 짓는 그들.
유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아까 전 그 간부도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은 더 강했다.
포탈이라는 능력과 무기를 다루는 능력.
각각의 능력은 한계가 명확했지만, 두 능력이 합쳐지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했고 강점은 더욱 강해졌다.
'맨몸으로는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는데.'
마나라도 충분하면 모를까.
저 많은 조직원, 짐승들, 거기에 간부까지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쓸 때가 왔어.'
유현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나가 담긴 손길이 아공간을 휘저었다.
지구로 돌아온 뒤, 제대로 사용한 적 없는 판대륙의 무기들.
아까 전 제트라는 놈과 싸울 때 꺼냈던 검도 판대륙의 무기지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아껴두었는데….'
이제는 그 힘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때가 왔다.
'와라.'
유현의 의념에 반응한 무기가 아공간 깊은 곳에서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