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자정이 지나고, 또 시간이 더 흘렀다.
새벽.
안칠성은 숨을 죽인 채 여전히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악화 되었다.
이제는 굳게 닫힌 객실 문 너머로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젠장.'
안칠성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맞은 편에 앉은 메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음료수에 뭔가를 탄 게 분명해.'
지금의 사태가 빌런 조직 케이디의 만행이라는 건 그도 인터넷 뉴스를 통해 파악했다.
그러니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도 분명 그들의 짓일 터.
시상식의 참가자들이 공유한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음식을 안 먹는 사람은 있어도 음료조차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
빌어먹을 빌런 놈들.
안칠성은 놈들에 대한 욕설을 속으로 삼켰다.
작은 소리도 조심해야 했다.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평범한 짐승을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발생한 동물원 습격 사건이 모두 그놈들 짓이었을 줄이야.'
그들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한 괴물들은 감각이 극도로 발달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짐승들은 감각이 예민하기 마련인데, 그게 더 강화되었으니 작은 부스럭거림조차 그들에게는 소음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만 할 수는 없는데.'
가만히 있는다고 구조대가 올 상황이 아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여러 사정을 파악했다.
스카이 아일랜드의 주둔 군대는 적들의 무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다른 국가들은 현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구조대를 기다리는 건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시상식에 참가한 헌터들도 힘을 못 쓰고 있겠고.'
그나마 희망을 걸 만한 건 국가의 뜻과 반하여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헌터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그들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으..."
그때, 메이블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안칠성은 바닥을 기어 최대한 조용하게 그녀의 곁으로 움직였다.
"괜찮냐."
낮은 소곤거림에 고개를 저어 대답하는 메이블.
안칠성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망치는 통에 넘어지고 긁히며 부상을 입었다.
다리를 감싸는 드레스가 달리기를 방해했고, 굽이 있는 구두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지혈한다고 이것저것 했지만 역시 역부족인가.'
상처가 심각하여 제대로 지혈이 되지 않았다.
드레스 밑단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와이셔츠까지 동원했는데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데려가야 해.'
병원이라고 멀쩡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약품이 있으니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려면 나가야 하는데.'
복도에는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창문을 통해 나가기에는 너무 높은 층이다. 게다가 도시에도 몬스터들이 잔뜩 깔려 있다.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그랬다면 억지로 길이라도 뚫어봤을 텐데.
혹시나 하여 마나 코어를 살폈으나 여전히 요지 부동이었다.
체내에 흐르는 마나가 없으니, 메이블도 자신도 일반인과 다를바 없는 상태다. 이런 상태로 나갔다가는 꼼짝없이 먹이가 될 것이다.
"조금만 참아라."
"너무 아파요…."
이미 많이 참고 있다는 듯 말하는 메이블.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안칠성도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현아.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
그나마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마나가 없어도 헌터 수준의 능력을 가진 사람. 게다가 그는 시상식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몸 상태는 최상일 것이며,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우우웅!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칠성은 황급히 전화를 꺼냈다.
그의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유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진동 소리는 제법 컸고, 객실 바깥에는 여전히 짐승들이 거닐고 있었다.
-크르르르.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안칠성은 화면을 계속해서 터치했으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젠장. 왜 안 꺼져?'
도망치며 깨진 액정은 절묘하게 종료 버튼 주변을 먹통으로 만들었다.
안칠성은 결국 휴대전화를 객실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더 지체했다가는 복도 바깥에 있던 몬스터들을 다 불러들일 것 같았다.
"서, 선생님."
"쉿. 숨 쉬지 마."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그들의 위치는 객실 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 구석.
하지만 워낙 조용했기에 문 바깥의 소리를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다.
'문 앞에서 멈췄어.'
으르렁거리던 놈이 문 앞에서 멈췄다. 떠나는 낌새는 없다. 계속 문 앞에서 이쪽을 보고 있다.
'들키면 끝장이야.'
놈들의 손짓 한 번에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이곳까지 도망치며 몇 번이고 목격했다.
도주할 곳도 마땅치 않은 밀폐된 객실.
여기서 걸렸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조용히만 있으면 돼.'
소리를 내지 않으면 들킬 일도 없다. 두 사람은 간간히 호흡을 조절하며 놈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왜인지 놈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안칠성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곧 들려온 소리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킁, 킁.
안칠성의 고개가 메이블의 다리로 돌아갔다.
피가 본격적으로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건 조금 전.
지금까지와는 달리 좀 더 확실히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안칠성은 급히 메이블의 피를 닦았지만 아무래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크르르르!
사나운 으르렁거림과 함께 객실의 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유현은 단숨에 스카이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아일랜드의 서부의 공사현장이었다.
개발이 한창인 곳이라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무사하기를.'
유현은 곧장 서부 구역을 가로질렀다.
도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가 심해졌다. 또한, 불길한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곧 서부 구역과 중심가의 경계를 지났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곳은 슬럼가. 중간중간 밝혀진 가로등 아래로 드러난 거리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
거리 곳곳에 놓인 부랑자의 시체. 그 시체조차 온전치 못한 것들이 많았다.
유현은 시체에 고개를 처박고 쩝쩝거리는 놈에게 다가갔다.
'케이디가 풀어놓았다던 그 괴물이군.'
네 다리를 가진 제법 큰 모집의 괴물. 뒷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곰이었다.
'동물을 이용해 만들었다더니….'
평범한 동물과는 달리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
팔과 다리는 물론 전신까지.
존재 자체가 하나의 병기나 다름없었다.
'피해가 심각하겠는데.'
고개를 처박은 채 식사하던 녀석이 유현의 냄새를 맡고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로 서니 더 거대해진 곰.
웬만한 2층 건물 높이의 크기였다.
'기존 크기에서 두 배 정도 커진 건가.'
이런 괴물이 한두 종류가 아니다. 심지어 그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하니, 사람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크아아아!"
거대 곰이 포효를 지르며 네 다리로 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쯧."
유현은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직진으로 돌진한 곰이 저 멀리서 멈춰선다.
다시 방향을 틀려는 곰.
유현은 곧장 발을 튕겨 놈을 향해 쇄도했다.
힘을 담아 뻗은 주먹이 곰의 복부를 강타했다.
우두둑.
무언가 부러지는 감각이 주먹을 타고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곰의 거대한 몸뚱이가 저 멀리 날아갔다.
쾅!
한참을 날아가 건물에 처박히는 곰. 유현은 무너진 건물을 보며 코웃음쳤다.
'그래봤자 곰이군.'
케이디 놈들이 수를 썼다고 해도, 동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져도 곰은 곰이며, 늑대는 늑대다.
움직이는 고깃덩이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능력을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유현은 안칠성에게 메시지로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시상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과 지금 호텔에 있다는 정보 등.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약물이라니.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면, 헌터는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사건이 터지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니, 이미 많은 능력자가 죽었을 것이다.
'제발 살아 있어라.'
유현은 다시 움직였다.
그의 목적지는 호텔이었다.
'한서희는 무사하겠지?'
그녀의 보호자인 한상용은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서희는 그의 비호 아래 무사할 터. 어쩌면 이미 섬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
그런데 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그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
병원의 절반이 사라졌다.
칼에 베인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간 듯한 단면.
무너진 잔해가 지상 위로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다.
"허억, 허억."
한상용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치열하게 이어진 전투가 자신의 패배로 끝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꽤 오래 버티네."
그의 앞에 있는 건 얼굴에 뒤집어진 해골 페인팅을 한 남자였다.
뒤로 보이는 평화로운 밤하늘과 달리 그가 풍기는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런 짓을…."
"그 여자가 필요하니까."
한상용의 뒤편에는 한서희가 누워 있다.
처음 테러가 시작되었을 때.
한상용은 곧장 유현에게 연락했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는, 곧장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도망칠 새도 없이 적들이 몰려왔다.
그 뒤 이어진 치열한 전투.
수십 명이었으나 이제 남은 건 한 사람뿐이었다. 문제는 남은 한 사람이 그들의 대장격 존재라는 것.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강하다.
"서희는 넘겨줄 수 없어."
"몇 번을 말해. 선택권은 나한테 있다니까."
남자가 키힉, 거리며 웃었다.
안 그래도 기괴한 해골 페인팅이 더욱 끔찍하게 꿈틀거렸다.
"대체 왜 필요한 건데?"
"그 여자가 왜 깨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남자.
한상용은 의문을 느끼며 답했다.
"그건 단순히 혼수 상태라서."
"푸하하하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재밌네."
"......뭔가를 알고 있군."
한상용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한서희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될 정보일지 모른다.
"알다마다. 선천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죽음의 위기에서 겪는 현상이지."
"현상?"
"쉽게 말해 각성이라고 하지. 깨어난 자는 더 강해진다. 코어는 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지며, 마나의 활용 폭이 넓어지지."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한상용조차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걸 믿으라고?"
"청소년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니 모를 수밖에. 참고로 내 경험담이기도 해."
"......그래. 믿는다 치고. 우리 서희가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해도, 그게 너희랑 무슨 상관인데?"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각성 코마에 빠진 이들의 몸에서는 특수한 성분이 나오지. 우린 그게 필요해."
"......"
"죽이면 조금 나와. 이 병원에 한 명 더 있는 걸로 알고 있…."
남자는 돌변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한상용의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 나왔다.
그 사나운 기세에 남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죽기 싫으면 얌전히 줘."
"내 팔다리가 모두 잘리기 전까지, 넌 서희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할 거다."
"죽여달라는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그렇게 당해놓고도 아직 파악이 안 돼?"
줄곧 이어진 전투에서 승기는 점차 남자에게 기울었다.
남자는 강했다. 한상용조차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이게 케이디 간부의 힘.'
자신을 케이디의 간부라고 소개한 남자. 심지어 간부 중에서도 약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상관 없어. 여기서 반드시 막는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조카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쯧. 이래서 무식한 놈들이 싫다니까."
남자가 혀를 찼다.
그 순간, 눈앞에 실이 반짝였다.
한상용이 움찔하며 반응하려 한 순간.
그의 몸이 기울었다.
"......?"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몸뚱이.
그의 눈은 여전히 의문에 차 있었다.
"팔은 남겨두지. 지혈해도 죽겠지만, 가는 모습 정도는 지켜보라고."
한상용은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발목의 아래가 사라졌다.
시선을 조금 위쪽으로 움직이니, 제 자리에 서 있는 두 발이 보였다.
"끄으으아아아악!"
인지한 직후, 뒤늦게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
붉어진 눈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의 시선은 침대에 고정되었다.
"손대지마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든, 말을 하든, 하나만 해라."
"크흐... 으으으..."
"풋. 데려간다."
남자가 한서희를 들쳐 업었다.
한상용은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너무나 심한 고통 때문에 마나가 모이지 않았다.
서서히 흐릿해지는 시야.
입 안에서 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혀를 깨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꾸만 눈이 감겼다.
잘린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무너진 잔해 사이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눈이 감기기 직전.
무언가가 눈앞에 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