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44화 (14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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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곧장 이어진 준결승.

유현의 대전 상대는 쿠로가네로 확정되었다.

4강 첫 번째 경기는 메이블과 영국 팀인 엘리스의 대결이었다.

유현은 늘 그랬던 것처럼 대기실에서 중계화면을 통해 경기를 관람했다.

단조롭고, 단순하게 흘러가는 전투 양상.

공격 방법이 하나뿐인 메이블과 달리 엘리스의 빙결 특성은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모두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아무리 메이블이 날고 기며 모든 공격을 피해내도, 가까이 다가가 몸에 접촉할 수 없으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지."

누군가는 대진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유현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진즉에 전방위적인 전투에 능한 상대를 만났다면 메이블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

"만약 저 능력을 원거리에서도 쓸 수 있었으면 결승도 가능했을 텐데."

메이블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사거리가 1미터 정도만 되었어도 전투 양상은 조금 달랐으리라.

"저렇게 버티는 게 용해."

한참 전에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 메이블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동 장치를 활용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하고.

끝없이 회피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계속하서 상대의 틈을 노리고 공격을 시도한다.

"크윽!"

메이블의 움직임은 엘리스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분명 맞았다고 생각한 공격이 빗나가고, 틈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기어이 파고들다니.

그녀의 기분이 곧장 표정에 드러났다.

"곧 끝나겠군."

유현은 일어나 몸을 풀었다.

메이블은 지쳤고, 엘리스는 잔뜩 열이 올랐다.

지금껏 메이블의 방식을 학습했을 테니, 다음에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무리해서라도 시도하리라.

-아아!

그때, 해설자의 감탄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화면 위로는 유현이 예상한 장면이 펼쳐졌따.

빙하가 깔린 듯 경기장 전역을 뒤덮은 거대한 얼음.

머리를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얼음으로 뒤덮인 메이블의 낯빛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곧 생명 장치에 이상 신호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종료되었다.

"쯧."

유현은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서도, 시도는 않길 바랐는데.

저런 공격은 메이블의 몸에 가해지는 데미지가 너무 컸다.

"무사해야 할 텐데."

결승전이 끝나고 하루의 휴식 이후 시작되는 두 번째 종목. 게이트.

만약 메이블마저 쓰러진다면, 거기에는 꼼짝없이 유현 혼자 참여해야 했다.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혼자나 둘이나.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녀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은 한서희를 걱정하는 마음과 같았다.

"가자, 현아."

타이밍 맞게 안칠성이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유현은 그와 함께 어제 걸었던 복도를 걸어 경기장의 입구로 이동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상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쿠로가네 잇시키.

그간 순박하던 눈동자가 이제는 명백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

'여자가 뭐라고 저러냐.'

유현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케가미가 돌아와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당신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며 협박했다고 들었습니다."

쿠로가네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현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입니까?"

틀린 말은 없었다.

몇 가지 빠진 게 있었지만, 굳이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게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뭐, 대충은 맞네."

"......정말 실망스럽군요."

"짝사랑하냐? 혼자 좋아하고, 혼자 실망하고."

"말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유현은 과장스럽게 하품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쿠로가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메이코에게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이기면 하지. 그 대신."

유현이 쿠로가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쿠로가네가 긴장을 머금었다.

"내가 이기면 너랑 나랑 걔랑 셋이 만나는 거다. 내가 거기서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든 넌 가만히 있어야 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허튼짓 안 해, 멍청아."

"...제가 이기면 정말 사과하는 겁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사과쯤이야, 정말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몇 번이고 해줄 수 있다.

쿠로가네도 유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선수 입장하세요."

진행 요원이 앞을 막고 있던 문을 열어주었다.

쿠로가네가 기선을 잡겠다는 듯 먼저 경기장으로 나갔다.

유현은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이래서 어린 애들은.'

쿠로가네 잇시키.

생각이 깊어 보이고, 신중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여자 하나에 휘둘려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다니.

전형적으로 경험이 부족하여 시야가 좁은 케이스였다.

'나도 그리 어른스러운 건 아니지만….'

오래 산다고 사람의 성격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늙어가는 외형과 변해가는 주변 상황에 맞게 어른스러운 척을 할 뿐.

유현은 많은 경험을 했지만, 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아직 학생인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잘 깨달으면 좋으련만."

유현은 쿠로가네의 시야가 넓어지길 바랐다. 좁은 시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그가 지닌 재능이 너무나 아까웠다.

수많은 괴물을 죽이고, 그보다 많은 사람을 구할 힘.

부디 그 힘을 책임감 있게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유현 선수."

잠시 생각이 팔려있던 유현은 진행 요원의 부름에 경기장에 입장했다.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과 환호성.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유현은 곧장 메이코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자식."

수수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웃음.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걸까.

마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라도 한 듯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꿩 대신 닭 같은 건가.'

어차피 이케가미를 데려오기는 글렀으니, 나라도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유현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행동, 생각 하나하나가 우스웠다.

'연기는 잘하는데, 머리는 좀 나쁘군.'

여태껏 주변의 비호 아래 살아왔으니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모르는 것 같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그런 방법이 통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 때가 됐다.

'똑똑히 깨닫게 해주마.'

어리숙하고 아둔한 꼬마에게 순순히 끌려다닐 만큼 헛되게 살진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머지않아 깨달을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이 초래한 결과를. 그때 가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무기를 챙겨오셨군요."

쿠로가네가 다가와 말했다.

유현의 등 뒤로 솟아난 기다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이왕 이길 거 확실하게 이겨야지."

유현의 손이 등으로 움직였다.

손에 착 감기는 기다란 봉의 느낌. 그가 등에서 꺼낸 건 끝이 뾰족한 창이었다.

"......"

쿠로가네 역시 창을 들고 있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외형을 가진 유현의 창보다 더 세련되고, 튼튼해 보이는 창이었다.

"제 경기를 보고도 제게 창으로 도전하는 겁니까?"

"말했잖아. 확실하게 이기겠다고."

상대의 강점을 활용하여 도리어 상대에게 패배를 안겨주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언행이었다.

쿠로가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유현의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그 행동, 후회하게 만들어드리죠."

"말이 많아. 시작해."

두 사람은 거리를 벌렸다.

경기가 시작될 수 있는 최소 거리. 곧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반드시 사과하게 만들겠어."

쿠로가네의 창 위로 마나가 덧씌워졌다.

서서히 번지는 그라데이션처럼, 처음에 푸른색이었던 마나는 이내 보랏빛과 붉은빛을 동시에 머금었다.

'처음부터 전력이군.'

유현은 쿠로가네의 행동을 보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쪽에서도 고분고분 나갈 생각은 없었다.

쿠로가네는 강하다.

몇 번 방심한다고 지지야 않겠지만, 한 번의 타격이라도 허용할 마음은 없다.

[강화]

유현의 전신으로 마법이 퍼져나갔다.

근육의 폭발적인 팽창.

그 위에 마나를 덧씌워 몸 전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현은 마나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다른 버프 마법도 신체에 부여했다.

속도를 빠르게 하고, 무게를 줄이는 헤이스트.

전신의 움직임을 더욱 가속하는 신속.

힘과 속도를 보다 증폭시키는 과열.

효과가 겹치며 중첩된 마법들이 유현의 신체를 한계까지 이끌었다.

두근두근.

오랜만에 느껴보는 절정의 힘에 유현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지금의 마나로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길어 봐야 1분.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지금의 힘은 단순히 육체로만 낼 수 있는 전력. 판대륙의 전장에서 항시 유지하던 그 상태였다.

이 상태라면, 쿠로가네가 몇십 명이 오든 패배하지 않는다.

"......"

쿠로가네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유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동안 바깥에서 관람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각.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등줄기에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경기장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번의 전투를 봤을 때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친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봤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밀려드는 패배감.

난생처음으로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아니, 안 돼. 겁먹지 마. 내가 메이코를 도와야 해.'

꽈악.

쿠로가네가 창을 움켜쥐었다.

아카데미에 편입한 이후, 겉돌던 자신을 자상하게 챙겨주던 메이코.

어제 그녀가 유현의 대기실 근처에서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접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볼 일이라면 자신을 대동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부탁을 했다면, 혹여 신상에 위험이 생길지도 모르는 심각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갔고, 너무 오랜 시간을 나오지 않아 문을 두드렸다.

그 결과는 설마 했던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나쁜 새끼.'

메이코에게 전해 들었던 사정은 그의 분노가 오롯이 유현에게 향하기 충분한 사유였다.

'메이코를 건들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손의 떨림이 분노로 가라앉았다.

쿠로가네는 창을 양손에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멀찍이서 유현의 몸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뛰어올 듯 자세를 잡는 유현.

그의 속도를 알고 있던 쿠로가네는 마나를 한껏 끌어올려 공격에 대비했다.

'오른발.'

유현은 오른발을 튕겨 뛰어온다.

이제 곧 움직일 것이다.

거리는 10미터 남짓.

지금껏 봐왔던 그의 탄력이라면, 도착 시간은 약 몇 초 뒤.

대비할 시간은 충분...

"......?"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유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쿠로가네가 움찔하며 반응한 건, 목덜미에 날카로운 창날이 닿고 난 뒤였다.

"움직이지 마."

쿠로가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기도 전에 눈앞에 도착한 유현.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도화지처럼 새하얘진 머릿속.

서늘한 감각만이 온몸에 소름을 돋구었다.

"다, 당신 대체..."

"다물어."

유현은 창을 쥔 반대 손으로 냅다 쿠로가네의 면상을 후렸다.

폭탄이 터지듯 엄청난 펀치가 강한 풍압을 일으키며 쿠로가네를 저편으로 날려 보냈다.

힘없이 허공을 날아가는 몸뚱이.

그 상태로 한참을 날아가다 바닥에 떨어졌지만, 몇 바퀴를 더 구르고나서야 멈췄다.

그가 지나간 경로 위로 군데군데 끊어진 핏자국이 남았다.

"......"

우승 후보 중 하나인 쿠로가네를 주먹질 한 번에 제압한 유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무력에 관중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게 말이 돼?"

"아니, 아무리 빠르다지만…."

"예전보다 몇 배는 빨라진 것 같아."

지금껏 보여주었던 속도와는 차원이 다른 민첩함.

그뿐 아니었다.

"저거 살아있는 거지?"

"머리 깨진 거 아니야?"

"소리가 무슨…."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꽂힌 주먹 역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 창은 계속 쥐고 있네.'

유현은 쓰러진 쿠로가네를 향해 다가갔다. 기절한 건 아닌지, 쥐고 있던 창으로 땅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일어나? 누워있어 그냥."

유현은 그가 짚었던 창을 걷어찼다. 쿠로가네가 철퍽하며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크으으…."

유현은 쭈그려 앉아 쿠로가네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드러난 얼굴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뼈의 타격은 없었지만, 볼의 피부가 터져 피가 잔뜩 칠해져 있었다.

"용케 기절을 안 했네."

"......"

"그럴 정신으로 뭐가 진실인지를 알아봤어야지."

쿠로가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이 무어라 뻐끔거리지만, 정신이 혼미한지 말을 하지 못했다.

"이케가미는 죄가 없어. 메이코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걔를 데려오라며 날 협박했지. 널 데려온 것도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고."

"......그건 말이"

쿠로가네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유현은 그의 귓가에 고개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메이코를 객실로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여자를 직접 찾아갈 테니까."

유현은 쿠로가네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법을 해제하자 순간 현기증이 일어 휘청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사용했나.'

판대륙에 있을 때는 하루건너 사용하던 마법들을 몇 달 만에 썼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유현은 곧장 경기장을 내려가는 대신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보이는 메이코의 얼굴에는 시작 전과 달리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현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메이코가 급히 관중석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딜 그냥 가?'

이대로 보내버리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불어 그냥 보내기에는 엿 같아서 참을 수 없다.

유현은 남은 마나를 모두 사용해 손가락을 튕겼다.

강한 마법은 아니지만, 그녀의 생활을 고달프게 하기에는 충분한 저주가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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