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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지금까지 본 경기 중 가장 아름다운 경기로군!"
관중들은 두 사람을 향해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승자는 유현이었지만, 하오란 역시 눈부신 활약을 보인 덕이었다.
"잘 싸웠다! 하오란!"
"엄청난 싸움이었어!"
들것에 실려나가는 하오란.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옆을 걸어가는 유현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정말 강하군요."
"쉬라니까."
"당신 덕분에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언젠가 중국에 온다면 꼭 대접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인마."
유현은 피식 웃으며 경기장을 내려갔다.
여전히 등 뒤로 들려오는 관중들의 환호성.
하지만 이미 유현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먹을 중국의 전통 음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봐요."
그때, 고운 목소리가 경기장의 소음 사이로 섞여 들어왔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있던 유현도 그 목소리에 반응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운 목소리의 주인은 일본 팀의 메이코였다.
일본 아카데미 특유의 수수한 교복을 입어 청초한 외모가 더욱 돋보였다.
"나?"
"네."
"왜?"
유현은 의문스러웠다.
따로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할 만한 이야기도 없었으니까.
"우선 4강 진출 축하해요. 대기실로 가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누어도 될까요?"
그녀가 주변을 의식한 듯 두리번거린다.
어차피 대기실로 가는 중이었기에, 유현은 그녀의 동행을 허락했다.
"정말 잘했...!"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안칠성은 메이코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이야기 좀 하재서요."
그 말에 안칠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내 능글맞게 변화하는 표정. 잘 해봐~ 라는 말을 남기고 안칠성은 대기실을 나갔다.
"잘해보기는 무슨."
"뭐라고요?"
"아냐. 앉아."
유현은 메이코의 맞은편에 앉았다.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먼저 메이코가 입을 열었다.
"요구사항이 있어요."
"...뭐?"
"이케가미를 돌려보내요."
유현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와서 부탁도 아니고 요구사항이라니.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처구니가 없어진 유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헛소리할 거면 나가."
"이케가미는 벌을 받아야 해요."
"하아..."
유현이 뒤통수를 긁었다.
이놈의 일본 팀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이케가미에 집착하는지 원.
거기서 내쳐진 놈, 한국 와서 잘 사는 게 그리도 꼴 보기 싫은 걸까.
죄가 없다는 데도 왜 이리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일까.
유현은 자꾸만 차오르려는 화를 억지로 삭이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그놈을 데려가고 싶으면 네가 직접 움직이든가 해."
유현은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도 모자랄 마당에 웬 정신 나간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 다 했으면 나가봐."
"한서희."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유현이 멈칫했다.
"혼수상태에 빠져있죠? 죽었을 것 같지는 않고."
외부에는 자세히 공표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었다.
피격 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으니, 죽었거나 활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말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유현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자 메이코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여자친구라도 되나요? 그렇게 반응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닥쳐."
"......"
처음 받아보는 취급에 메이코는 당황스러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나 강하게 나올 줄이야.
'싫진 않네.'
신선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눈빛도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도.
메이코는 한 차례 헛기침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제가 그 여자를 깨울 방법을 알아요."
"......뭐?"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발언.
유현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물음표가 떠올랐다.
"송진 그룹도 못 찾는 방법을 네가 안다고?"
"네.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경험해봤거든요."
그녀의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져 1년을 깨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해메었을 때.
할아버지가 한 헌터에게 의뢰하여 어떤 재료를 얻었고, 그 재료로 만든 환을 먹이자 아버지가 곧장 깨어났다는 게 그녀의 경험담이었 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집안이 꽤 유명해서요. 그 정도는 가능했죠."
"내가 그걸 믿어야 하나?"
"저는 진실을 말했어요.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죠."
"그게 한서희에게도 먹힐 거라는 근거는?"
"총탄에 독이라도 섞여 있었나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혼수상태에 빠진 게 아니라면, 아버지랑 비슷해요. 그러니 먹힐 거고요."
총알은 평범했다. 그 뒤에 이어진 조치도 평범했고.
메이코의 말처럼 한서희가 혼수상태에 빠진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걸 차치하면 제법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한 번쯤은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대체 왜 이케가미를 원하는 거야?"
유현이 대화의 여지를 두자 메이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망친 죄수에게는 다시 족쇄를 채워야죠."
"자기 입으로는 결백하다던대."
"그걸 믿나요?"
"믿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어떤 범죄자도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아요."
유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야 증거가 명확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지금 당장 걔가 잘못했다는 증거 가져올 수 있어?"
"데려오기만 하면…."
"이미 아무런 죄 없이 풀려난 놈이야. 다시 데려간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유현은 그녀를 향해 바짝 상체를 숙였다. 메이코가 코앞까지 다가온 유현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먼 짓 그만해. 네가 이케가미와 문제 있던 여자하고 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이제 그놈 좀 가만히 놔둬라."
"당신이 뭘 몰라서 그래요."
"내가 모르는 게 뭔데? 말해봐. 합당한 사유면 넘어가 주마."
"이케가미는 저와 제 친구에게 몹쓸 짓을…."
"적당히 해."
유현이 메이코의 말을 끊었다.
"그놈이 나쁜 짓을 했다면, 당연히 경찰이 밝혀냈겠지. 심지어 언론에 나오면서 국가적인 관심도 끌었으니 뇌물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테고."
"그건 이케가미의 부모님이 손을 쓴 거예요."
"멍청아. 그게 퍽이나 가능하겠다."
두 여배우를 상대로 정말 몹쓸 짓을 했다면 설령 대기업의 총수가 오더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사건이기도 하니 메이코의 말은 더욱 앞뒤가 맞지 않았다.
유현이 판단의 근거를 말하자 메이코가 입을 다물었다.
"사소한 복수심 같은 거야 얼마든 생길 수 있지. 근데 그따위 장난질하는 데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면 안 돼."
"......"
"너도 곧 성인 아니야? 네가 한 행동에 책임질 나이라고. 아무 죄없는 이케가미 데려다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말을 끝맺은 직후.
메이코의 표정이 돌변했다.
귀신처럼 찢어지듯 올라간 입꼬리. 크게 뜬 눈동자는 무서우리만치 희번뜩거렸다.
"뭐, 뭐야?"
순간 당황한 유현이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당혹스러운 변화였다.
"쓸데없이 설교하기는."
메이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오라면 데려와. 안 그러면 너도 얼굴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줄테니까."
"뭐?"
"이케가미가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 다 내 작품이야. 내 말만 잘 들었으면 지금도 잘 먹고 잘살았을 텐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렇게 협박까지 하는 꼴이라니.
유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진짜 제대로 돌았네.'
"웃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되나 봐? 내가 소리만 한 번 지르면…."
"질러 봐. 마음껏 질러 봐."
유현이 메이코와 거리를 좁혔다.
이전보다 더 강해진 기세에 메이코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지, 지, 진짜 지를 수 있어!"
"질러 보라니까?"
유현이 손을 튕겼다.
마나가 퍼지며 침묵 마법이 대기실의 소리를 가뒀다.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악!"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메이코.
유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지르네."
"하, 하! 이제 넌 끝이야!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고!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온 줄 알아?!"
"뭐라는 거야,"
유현은 개의치 않고 몸을 낮춰 메이코와 시선을 맞췄다.
"네가 똑똑한 것 같지?"
메이코가 마른 침을 삼켰다.
겨우 말 한마디였지만, 그가 주는 압박감은 만만치 않았다.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서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넌 그냥 이케가미가 호구라서 살아있는 거야."
유현의 손이 메이코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내 서서히 조여오는 압박감. 메이코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멀쩡히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지. 네 아버지를 깨어나게 했다는 그 방법을 말해."
처음 요구했던 거래의 조건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
그런데도 메이코는 반발할 수 없었다. 자칫했다가는 어깨에 올라온 손이 그대로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저, 적어 줄게."
유현은 메이코에게 펜과 종이를 건넸다.
메이코는 유현의 눈빛 아래 재료의 목록을 적었다.
"만약 이게 거짓말이면…."
유현이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이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메이코는 침을 꼴깍이며 황급히 고개를 도리질 쳤다.
"거, 거짓말 아니야."
"그러길 바라지."
유현이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메이코는 두 다리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알아서 나가라."
유현이 문을 열려던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들은 메이코가 눈을 번뜩이더니 재빨리 문 앞으로 움직였다.
"저기 유현님 혹시..."
문을 두드렸던 쿠로가네는 메이코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헝클어진 머리와 잔뜩 겁먹은 눈동자. 누가 보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할 상황이었다.
"유, 유현님 이게 무슨..."
유현이 혀를 차며 메이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해두었다는 게 이런 건가.'
쿠로가네에게 미리 말을 해두고는 오랜 시간 나오지 않으면 문을 두드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쿠로가네가 지금 이곳에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데리고 나가."
"설명해주시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쿠로가네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살벌한 눈빛이었다.
"설명은 네 친구한테 듣고."
"아뇨.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유현은 손을 들어 쿠로가네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그리고 확 끌어당겨 이마를 부딪쳤다.
"개소리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가."
유현의 목소리에 담긴 무거운 압박감.
쿠로가네는 대꾸하는 대신 그를 밀쳤다.
"제 친구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면, 아무리 유현님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유현은 메이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쿠로가네의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선 메이코가 유현의 눈을 피했다.
"이케가미에 관한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지."
그 말에 반응한 건 쿠로가네였다.
"이케가미?"
"네 친구가 이케가미를 돌려보내라고 난리를 피웠어."
"그게 무슨..."
"데리고 나가서 사정 청취를 하든 해."
쿠로가네가 메이코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쿠로가네가 유현을 향해 사나운 기세를 쏟아냈다.
유현은 피하지 않고 그와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일촉측발의 분위기. 일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이코가 쿠로가네를 말렸다.
"난 괜찮아, 잇시키."
"...그래."
메이코를 부축하여 방을 나가려 던 쿠로가네가 문 앞에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4강전에서 당신과 만날 수도 있다고 하여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분노라는 감정이 더 크군요."
유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놈이 저 여자에게 코가 꿰여도 단단히 꿰였다고 생각했다.
메이코가 했던 말이 전부 헛소리란 걸 알게 되면 어쩌려고 저럴까.
"그래. 이겨서 올라와라. 올라와서 꼭 그 여자 복수해 줘."
"끝까지 비꼬는군요. 나는 유현님보다 내 친구를 신뢰합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어요."
"그래, 그래~"
유현은 쿠로가네를 밖으로 내몰고는 문을 닫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피곤했다.
"하아."
불쌍한 이케가미.
어떻게 그놈 주변에는 하나같이 저런 애들 밖에 없는 걸까.
쿠로가네야 백 번 양보하면 간신히 이해할 수 있다쳐도, 메이코라는 여자의 사고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체 그동안 혼자서 어떤 싸움을 해온 거냐."
유현은 이케가미의 과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메이코가 적은 재료의 목록을 살폈다.
"......"
메모지 위에는 이상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 몇 개는 정상적으로 재료의 이름을 적었지만, 중간부터는 유현을 향한 욕설로 돌변했다.
아무리 영어를 못 읽더라도 이런 간단한 욕설은 알아듣는 유현이었다.
"개 같은 년이…."
유현이 종이를 구겼다.
당장이라도 찾아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선은 참았다.
지금 그녀에는 물소가 한 마리 있었으니까.
'연기 솜씨가 일품이구나.'
겁먹은 줄 알고 가만히 뒀더니만, 그것들이 전부 연기였다.
유현은 심호흡을 통해 한 번 더 화를 삭여야 했다.
"기다려라, 둘 다."
반드시 다시 찾아가서 어떻게든 알아내고 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