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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41화 (141/219)

141

16강전 경기가 모두 마무리된 저녁.

다음날 있을 8강을 위해 참가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텅 비어 있어야 마땅한 훈련장에서는 연신 커다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팡!

걸려 있던 샌드백 하나가 또 나가떨어졌다.

유현은 버튼을 눌러 다른 샌드백을 눈앞에 데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떨어지는 땀방울.

구석에 처박힌 옆구리 터진 샌드백들.

퍽!

주먹이 샌드백의 옆구리를 때렸다.

쇠사슬에 매딜린 샌드백이 크게 흔들린다.

주먹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적당한 위력과 빠른 속도.

유현은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정신 없이 주먹을 쏟아냈다.

그건 훈련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팡!

샌드백의 옆구리가 터졌다.

유현은 동작을 멈춘 채 흘러내리는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등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

위아래로 들썩이는 상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곳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아."

유현은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표정에 드러난 복잡한 심경.

바쁘게 몸을 움직여도 충격받은 심신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에는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를 물어볼게요. 나도 잘은 모르니까.

아까 전, 자신을 인터뷰했던 한국의 기자가 했던 발언.

그리고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하나 밖에 없었다.

"믿기 싫은데."

믿을 수밖에 없다.

자신 이외에도 판대륙에서 지구로 넘어온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만 했었다.

판대륙의 세계관과 비슷한 세계관의 작품들을 발표한 작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의 영역이었다.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니 단순히 상상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여기자의 그 한마디 덕분에.

"하아."

유현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몇십 대는 맞은 것 같은 충격.

그간 판대륙의 흔적들을 마주했을 때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이제야 좀 설득력이 생겨서 좋긴 한데..."

판대륙의 물건이나 식물뿐만 아니라 그곳의 생명체마저 이곳에 있다면 하나는 확실해졌다.

두 세계의 연결점이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것.

가끔 두 세계의 교류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연결 통로가 존재한다는 게 결코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지구에 새로운 위협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기자를 찾아야 해."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기자도 아닐 것이다.

언론사에 직접 연락해서 알아보니 알려준 신상은 모두 가짜였다.

기사가 등록된 사이트 자체가 직접 만들어낸 일종의 피싱 사이트였던 셈이다.

'하필 이 시기에 접근했다는 건, 내 마법을 간파했다는 뜻이겠지.'

아무리 특성이라고 연막을 쳐봤자, 이미 마법의 존재를 아는 이에게는 소용없는 짓이다.

'게다가 용언을 사용했어.'

용언(龍言).

목소리에 담기는 특유의 힘. 듣는 것만으로도 범인의 몸을 벌벌 떨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름에 용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처럼 오직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존재에게 특성을 마법이라고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인간의 몸으로 용언을 사용할 정도면, 얼마나 강하단 거지?'

용언은 보통 본체로 현현했을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기자는 인간의 몸으로 변한 상태에서 용언을 말했다.

그게 뜻하는 건 한 가지.

그녀가 그만큼 오래된 존재이자 그 시간만큼의 강함을 지닌 자라는 증거였다.

'하필 마주쳐도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뚱이 하나로 차원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할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판대륙의 어떤 존재라도 손쉽게 지구로 넘어올 터.

지구에 혼란이 초래할 건 명백했다.

판대륙이 아무리 평화를 되찾은 세계라고 해도 잔존한 소수의 마족 세력이 있으며, 몬스터도 남아있으니 말이다.

'대체 언제 지구로 넘어온 걸까.'

전쟁이 시작되기도 더 전에?

혹은 전쟁이 이루어지던 시기?

'그러고 보니 나를 아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물어보겠다는 그녀의 말.

판대륙에 자신이 있었을 때를 아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언제 넘어왔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계속 판대륙과 지구를 넘나들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차올랐다.

머리를 쥐어 짜내던 유현은 뒤로 몸을 넘겼다.

곧장 눈에 들어오는 천장의 전등 빛. 등으로 딱딱한 훈련장의 바닥이 느껴진다.

"모르겠다."

유현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질문들을 지웠다.

이런 사소한 정보들은 그리 중요치 않다.

정말 핵심이 되는 건 왜 그녀가 이곳에 있고,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였다.

지구에 심각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를 중대한 상황.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인 만큼, 당장 본인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기자는 추적 마법을 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특유의 냄새나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런 실력자에게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 위험한 인물은 아닐 것 같은데..."

비록 마물인 드래곤이지만, 계략을 꾸미고 있다면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의 행보로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

바라는 게 있으니 찾아왔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의도를 감췄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래도 일단은 안심이군.'

구태여 찾아 나설 필요는 없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테니까.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냐.'

판대륙에서 넘어온 드래곤이 바라는 것.

그게 무엇인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 그녀가 바라는 게 세상에 위해가 생길 일이라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만약 정말 그런 일을 꾸미고 있다면.

"죽여야겠지."

유현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지구를 두고 협박하든 뭘 하든 개의치 않는다.

설령 국가 하나를 파괴한다고 해도, 손속에 자비는 없을 것이다.

***

이튿날이 밝았다.

8강전이 예정된 대회장에는 구름떼 같은 관중이 몰려왔다.

외부에서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스크린이 설치되었기에, 공원에도 엄청난 인파가 운집했다.

스크린 위로는 8강전의 1경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아아아!"

"이겨라! 엘리스!"

"엠마! 파이팅!"

영국의 엘리스와 미국 동부 팀 엠마의 대결.

두 강국의 대결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엠마! 너마저 탈락하면 끝장이야! 제발 이겨!"

특히 엠마를 응원하는 관중이 많았다.

미국 서부 팀의 몰락으로 유례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미국 팀.

서부 팀에서 일어난 사건도 사건이지만, 올해는 유독 아이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그건 동부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 업보다 쯧."

유현은 대기실에서 TV를 보며 혀를 찼다.

미국 팀이 16강전에서 대거 탈락한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회가 진행 중인 와중에도 이어진 한서희 피격 사건에 대한 조사.

주요 용의자인 서부 팀은 물론 동부 팀 아이들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훈련은 고사하고 제대로 휴식조차 취할 시간이 없으니 컨디션이 나빠지고.

다른 국가의 강자들에 온전한 실력으로 맞서지 못해 대부분이 패배했다.

'그래도 의외네. 제임스가 기자회견을 하긴 했어도 어물쩡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무리 스카이 아일랜드에서 입김이 강한 미국이라고 해도, 다른 국가들의 견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컨디션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겠지.

"아주 잘 됐어."

이 일의 주동자로 지목된 안톤은 앞으로 편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거다.

헌터는 물론 일반적인 직장도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자국에서는 이미 희대의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고.

-아아! 엘리스의 맹공! 엠마 버텨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TV에서 한국어 해설이 흘러나왔다. 엘리스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을 흩뿌리며 엠마를 거세게 압박했다.

'끝났군.'

엘리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미국의 마지막 희망인 엠마가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미국 팀은 준결승 이전, 전원 탈락이라는, 미국 아카데미 역사에 유례가 없는 새로운 발자취를 기록했다.

"꼴 좋다."

유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낄낄거리던 그때.

-경기 준비해라.

노크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안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경기는 두 번째.

1경기가 막 끝났으니, 준비를 위해 이동할 시간이었다.

"아까는 피곤해 보이더니 지금은 한결 나은 거 같구나."

"미국 팀이 전부 떨어졌잖아요."

유현의 말에 안칠성도 피식 웃었다. 그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 팀의 탈락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 나가서 괜히 티 내지 마라."

두 사람은 함께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경기장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지금까지의 경기장과는 달리 두 선수가 하나의 입구를 공유했다.

"......"

유현은 거기서 하오란과 마주쳤다. 인솔 교사도 없이 혼자 서 있던 하오란은 유현을 발견하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잘됐네."

유현은 하오란의 경기를 보지 않았다.

기자와 만나고 난 뒤로 줄곧 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탓에 다른 일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가 이기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드립니다."

유현은 하오란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건장한 남성처럼 커다란 손. 수련의 결과인지 오돌토돌한 굳은 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슬슬 올라가라."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유현은 먼저 경기장으로 진입했다. 밝은 조명과 열성적인 관중의 함성이 그를 맞이했다.

유현은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이전 경기장보다 더 늘어난 수용인원. 어디를 봐도 사람으로 빼곡하다.

"유현! 우승까지 가자!!"

"오늘도 화끈하게 보여줘!"

유현이 먼저 경기장 내부에 자리잡은 뒤.

이어서 하오란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향해서는 사뭇 다른 함성이 쏟아졌다.

짝- 짝- 짝-

"하오란!"

세 번의 박수 이후 이어진 함성.

다음 순간, 전방의 관중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

천천히 관중석 위로 만들어지는 중국의 오성홍기.

완성된 매스게임이 관중석의 일면을 붉게 물들었다.

중계용 카메라가 관중석을 찍으며 전광판 위로 국기의 형태가 나타났다.

"하오란!"

"하오란!"

목이 터져라 그녀를 응원하는 관중들. 누군가는 목놓아 그 이름을 부르짖었다. 마치 광기에 가까운 현장. 응원단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열성적이다. 마치 사이비 집단의 포교 현장이 펼쳐진 것 같았다.

"중국의 20억 인민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 아카데미의 최강 유망주.

소문으로는 자국의 S등급 헌터들도 몇 번인가 이겼다고 한다.

그만큼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

사람들이 예상한 승률이 그것을 증명했다.

50대 50.

정확히 반반인 비율.

유현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상대를 압도하는 무력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유현도 장담할 수 없어."

"하오란의 힘을 생각하면 유현도 고전할 거야."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도 어느 한쪽의 승리를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창과 창의 대결.

세간의 평가로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승부였다.

"하오란! 하오란!"

하오란의 호명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열 띄는 응원 속에 하오란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

하오란은 계속 걸어가 유현의 지근거리에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10미터 남짓.

하오란은 긴장감을 숨긴 채 유현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아.'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터.

그런데도 유현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걸까.

하오란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그녀가 주먹을 꽉 말아쥐던 그때.

'점심 뭐 먹지.'

유현은 점심을 고민하고 있었다.

곧 종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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