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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전 1경기가 시작되었다.
일본 팀의 쿠로가네와 영국인 선수 간의 대결이었다.
훈련장에서 봤던 것처럼 기다란 무기를 들고 나타난 쿠로가네.
저번에 봤던 투박한 무쇠 창과는 다른 무기였다.
"봉?"
뾰족한 창날이나 날카로운 도끼날 따위는 없었다.
밋밋하고 살상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쇠봉이었다.
창과 봉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무기. 아무리 쇠로 된 봉이라고 해도 살상력은 확연히 떨어진다.
'무기를 잘못 들고나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쿠로가네는 봉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동작.
잘못 들고나왔다면 선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지난번에 훈련했던 창술은 뭐지?'
그쪽이 더 압도적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창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걸까?
유현은 아리송함을 느끼며 영국 선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는….'
영국 선수는 양 주먹에 커다란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갑옷 역시 착용하고 있었지만, 무척 얇아 보였다.
'격투 쪽이군.'
봉과 주먹의 싸움이라면 전투의 관건은 사거리다.
우세한 건 쿠로가네.
봉의 긴 사거리를 활용하여 적을 공략하면 손쓸 새도 없이 당할 게 뻔했다.
'상대는 어떻게든 가까이 파고들려고 하겠군.'
아마 그래서 최소한의 방어력을 가진 갑옷을 착용한 것 같다.
파고들기 위해서는 속도가 생명이니 조금이라도 몸의 무게를 줄이고 싶었겠지.
그렇다고 방어를 완전히 포기하면 아무리 봉이라도 쉽게 당할 것이다.
'신발에도 기동장치가 달린 것 같고.'
그에 비해 쿠로가네의 옷차림은 평범하다. 봉 외에는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았다.
장비로만 승패를 따진다면 쿠로가네의 패배. 실전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그리 유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감 혹은 자만.'
경기가 시작되었다. 영국 선수가 기동장치를 활용해 빠른 속도로 쿠로가네를 향해 쇄도했다.
이윽고 이어지는 엄청난 폭발력의 펀치. 총알처럼 튀어 나간 주먹을 쿠로가네가 민첩한 움직임으로 회피했다.
풍압이 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펀치였다.
'강화 능력자인가 보군.'
주먹에 한정하여 속도와 힘을 강화하는 특성.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쿠로가네는 저걸 어떻게 피한 거지?
"...오."
곧 보여준 쿠로가네의 반격이 그 의문의 해답이 되었다.
상대와 비슷한 속도로 창을 내찌르는 쿠로가네.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으니 피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봉을 창처럼 쓰고 있어.'
봉을 휘두르는 봉술을 보여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빗살처럼 연속하여 이어지는 찌르기. 영국 선수도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공격을 피했지만, 쿠로가네는 지치지도 않는지 연격을 멈추지 않았다.
"와…."
쿠로가네의 공격에는 리듬이 있었다.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 이후 찰나의 텀.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찌르기.
상대가 패턴을 파악할 수 없게 찌르는 횟수 역시 계속 바뀌었다.
오직 유현만이 그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경기는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시작부터 끝없이 이어진 찌르기.
만약 저게 봉이 아니라 창이었다면 어땠을까.
경기는 진즉에 끝났을 테고, 경기장에는 유혈이 낭자했을 것이다.
봉을 사용한 건 쿠로가네 나름의 핸디캡이었다.
어쩌면 대회 측으로부터 제한당했을지도 모르고.
'대단한 재능이야.'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봉 따위가 아닌 진짜 창으로.
지지야 않겠지만,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이라 등골이 서늘하긴 할 것 같았다.
잠시 뒤, 곧장 2경기가 시작됐다.
두 번째 경기는 일본 팀과 미국 동부 팀의 대결이었다.
'미국 동부 팀.'
인솔 교사와만 한 번 마주쳤을 뿐 동부 팀과는 접점이 없다.
지난번에 검색해 보니 올해는 동부 팀이 서부 팀보다 좀 더 우세하다고 봤었는데….
'이제는 압도적 우세가 되었군.'
서부 팀이 저들끼리 헛짓하느라 죄다 나가떨어졌으니, 어느 팀의 위용이 더 높을지는 뻔했다.
"오."
2경기는 제법 팽팽하게 흘러갔다. 두 특성의 격돌. 거기에 더해지는 개인의 무력까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동부 팀 선수가 일본 팀을 압박했다.
'같은 국가라고 실력까지 비슷하진 않나 보군.'
1경기와 달리 2경기의 일본 선수는 힘을 쓰지 못했다.
동부 팀의 승리로 두 번째 경기가 끝났다.
이어지는 3경기.
유현은 대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 거실에서 TV를 보듯 편한 자세로 경기를 관람했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
그동안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직접 겪어본 조별 리그의 수준이 처참했기에 타인의 경기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근데 이건 재밌네.'
본선은 사뭇 달랐다.
자국 아카데미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는 능력자 중에서도 예선이라는 검증을 거친 실력자들.
1경기도 2경기도 모두 흥미로운 대결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열광하는 게 아니라니까."
좋은 구경거리였다.
동시에 다른 이들의 실력을 파악할 기회이기도 했다.
유현은 참가자들의 특성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마법이라고 만능은 아니야.'
상대의 능력에 따라 효과가 있는 마법의 종류도 다르다.
흔한 말로 카운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이에게 불꽃 마법을 사용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
'찍어 누를 수야 있지만, 자칫하면 위험해 질수도 있으니까.'
강력한 마법은 찰나의 순간으로 상대를 저승으로 보내버리기도 한다. 카운터를 이기겠답시고 힘을 쏟아붓다가 잠깐이라도 삐끗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약하면 안 돼."
본선에서 제대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안톤과의 전투에서 원소 마법으로 난리를 피웠던 효과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당장 자신의 16강 상대가 된 중국 팀의 남학생만 봐도 그렇다.
속임수니 뭐니 하며 능력을 부정하던 놈. 전 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의견을 가졌거나 더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강함에 논란의 여지가 없게.'
유현이 나름의 경기 전략을 구축해가고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서 있던 건 아까 전 봤었던 중국 팀의 일원이었다.
"이름이..."
"하오란이라고 합니다."
헤어지기 전 유현에게 고개를 숙였던 여자.
남성적인 외형을 가진 그녀의 이름은 하오란이었다.
"아까는 저희가 실례했습니다."
하오란은 자신의 팀이 행한 무례를 대신하여 사과했다.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잘못은 잘못이니까요. 같은 팀이니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하오란에게는 상식이 있었다.
따져보면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유현은 감격스러웠다.
허우대만 멀쩡한 놈들 사이에서 상식까지 갖춘 사람이 있다니.
"우린 8강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오란의 눈동자에는 짙은 승부욕이 담겨 있었다.
중국 팀의 최강이라고 불리는 그녀. 조별리그 때만 해도 아시아의 최강이자 우승 후보라는 말까지 붙었다.
그러나 유현이 원소 능력을 선보인 이후, 그녀를 향하던 찬사는 하루아침에 유현을 치켜세웠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대체 이 자가 얼마나 강하길래 자신의 이름 앞에 붙던 수식어들이 순식간에 옮겨간 걸까.
그의 경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신은 강합니다. 하지만 저보다 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도발처럼 들릴 말.
유현은 그녀의 눈빛에서 호기심을 읽었다.
누가 더 강한지, 정말 궁금해하고 있었다.
"당신과 싸우고 싶습니다. 꼭 올라오시기를 바랍니다."
하오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호승심.
아직 그녀가 싸우는 건 본 적 없지만, 쉬운 상대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직 8강 대전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저렇게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면, 16강에서 승리하고 올라올 수도 있겠지.
유현은 멀어지는 하오란의 등을 일별하고는 대기실의 문을 닫았다.
***
시간은 흘러 유현의 경기가 다가왔다.
유현은 사람들의 환호 아래에 경기장에 올랐다.
맞은 편에는 아까 전 본 만두 머리의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속임수를 다 밝혀내겠다는 의도를 미리 밝힌 것처럼, 숨겨진 무언가를 꿰뚫어 보겠다는 느낌을 풀풀 풍겨댔다.
'빠르고 간단하게.'
그게 대기실에서 정한 앞으로의 전투 방침이다.
한 번 힘을 밝혔으니 이제는 확실하게 해야 했다.
어중간하게 싸웠다가는 원소의 힘을 밝힌 게 악수로 바뀌리라.
"어이! 확실히 보여달라고!"
"기대한다! 유현!"
세상에 마법을 드러내고 처음 맞이하는 전투.
사람들이 유현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오라! 선수를 허락하마! 세상에 보였던 술수를 내게도 행하라!"
상대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환호성이 더욱 더 커졌다.
유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렇게 본무대에서는 조금 건방을 줄이는 편인데.
'저놈은 더하는군. 무대 체질인가.'
유현은 웃음을 지우고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선수를 허락한다고 하니, 기꺼이 사용해줄 생각이었다.
일정해지는 들숨과 날숨의 간격.
마나가 코어를 빠져나와 전신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이 전신에 맥박치고.
체내를 달리던 마나의 양은 서서히 많아져 금방이라도 넘칠 듯 날뛰었다.
"......"
여전히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향해.
유현이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번쩍-
광명이 일었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우르릉!
뒤이어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환호와 열기에 뒤덮였던 경기장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
이어지는 침묵 사이.
약속이라도 한 듯 관중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커헉."
맹렬하게 허공을 찢어발긴 한 줄기의 뇌전(雷電).
그 끝에는 중국 팀의 참가자가 있었다.
털썩.
거대한 천둥을 동반한 전격은 상대를 일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전신.
몸의 주변으로 파직거리며 스파크가 일었다.
생체 경고 장치가 울리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삐이이이익.
전투의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심판단이 경기의 끝을 알렸다.
승리의 신호를 받은 유현은 단호히 몸을 돌렸다.
그의 뒤통수로 사람들의 뒤늦은 함성이 닿았다.
뒤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경기장을 내려오는 유현.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했겠지.
누가 보더라도 압도적인 무력.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난날 보였던 상식을 초월한 특성에 어울리는 힘이었다.
"대단한데요?"
그때.
조금의 기척도 없이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은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일전에 봤던 여기자가 서 있었다.
"...기자님?"
지난번과 비슷한 스타일과 옷차림. 그러나 평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형언할 수 없는 친숙함.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익숙함.
왜인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
그리고, 미지의 존재를 맞닥뜨린 것 같은 이질감.
여러 감상이 뒤엉켜 복잡해진 머릿속. 유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담아 입을 열었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안경 너머 기자의 눈빛이 묘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가는 굳어 있다. 검은색 동공은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유현씨."
조금 딱딱한 음성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
정체는 몰라도 묘한 감각을 포착한 유현은 경계심을 높였다.
"강하시네요."
"......"
"나중에 또 인터뷰해주실 거죠?"
예상외로 평범한 질문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기자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경계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유현은 의심을 지우지 않은 채, 인사말을 건넸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몸을 돌리는 유현.
"다음에는."
그런 그의 등 뒤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를 물어볼게요. 나도 잘은 모르니까."
그 순간.
낯익은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감각.
전장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마법과 비슷한 힘. 용언(龍言).
깊은 무게감, 카리스마, 압박감 등. 드래곤이 말을 할 때면 느껴지던 그것들이 조금 전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유현은 흠칫하며 홱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복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