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동이 트고 16강 전의 아침이 밝았다. 대회장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천편일률 했다. 새벽에 있었던 제임스의 기자회견이었다.
"대박 아니냐?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내 상대 미국 팀이었는데 이러면 난 부전승인가?
"바보야. 넌 동부 팀이잖아. 이번에 문제가 된 곳은 서부 팀이야."
한참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문 건, 한국 팀이 대회장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하, 한국 팀이다."
"유현이야."
"와, 진짜 멋있다."
이틀 연속으로 일어난 세상을 뒤흔든 충격적인 일들.
그 두 사건의 중심에는 유현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관심이었던 시선들이 이제는 조금 뜨거워졌다.
다른 참가자들은 유현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이거 좀 부담스럽구나."
안칠성은 자신들에게 향한 수십이 넘는 눈동자에 너스레를 떨었다.
"저희가 아니라 저를 보고 있는 거죠."
"......"
유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만큼 파장이 컸다는 뜻이죠. 잘 됐어요."
"그래. 그 덕에 수사도 한결 수월해졌어."
지난밤 이후, 안칠성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지금껏 물증이 없어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제임스의 기자회견으로 착착 진행된 덕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전부 말하겠다고 했을 때는 어찌나 놀랐는지 원."
"진짜 다행이에요. 이제라도 사람들이 알게 돼서. 서희만 빨리 일어나면 좋을 텐데..."
메이블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언제 깨어날지 감이라도 잡히면 좋으련만. 그나마 무사하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유현씨!"
그때, 한 남자가 한국 팀을 향해 뛰어왔다.
다들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새벽에 밝혀진 사건의 경중이 중한만큼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기에 남자의 행동은 더 눈에 띄었다.
"일본 팀의 쿠로가네군."
안칠성이 그를 알아보았다.
쿠로가네는 대회장의 저편에서부터 쉼 없이 달려와서는, 숨을 헉헉거렸다.
"뉴스 봤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괜찮으신가요!?"
걱정하는데 매몰차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멀쩡해."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 제가 무슨 도움이라도..."
"네가 돕긴 뭘 도와 이 멍청아?"
뒤에서 같은 일본 팀 소속의 아이들이 다가왔다.
조금 전의 앙칼진 목소리는 일전에 자신을 타치바나라고 소개했던 여자의 것이었다.
"아, 이쪽은 저와 같은 일본 팀 소속의 동료들입니다."
쿠로가네가 팀원을 소개했다.
유현의 시선을 끈 건 가장 뒤편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자였다.
쿠로가네가 다른 팀원들을 소개할 때 유현의 눈은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뒤쪽에 서 있는 친구는 메이코라고 합니다.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친구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메이코가 앞으로 나와 가슴팍에 손을 대고는 꾸벅 상체를 숙였다.
예상대로 그 여자가 메이코였다.
오철용이 사인을 부탁했던 여자.
일본의 양갓집 규수 느낌이랄까.
한서희가 전형적인 도시의 차가운 인상을 지녔다면, 이쪽은 한적한 시골에서 볼 법한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의 용모였다.
'오철용이 좋아하는 게 이해가 가는구만.'
누가 말을 걸어도 생긋 웃으며 대답해줄 것 같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말 걸기 편한 스타일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현을 보며 메이코가 얼굴을 붉혔다.
하얀 피부 위로 떠오른 붉은 홍조. 유현의 고민이 한층 깊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케가미가 말한 건 틀린 것 같은데...'
친절해 보이지만, 전부 가식이라던 이케가미의 한 마디.
하지만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뒤통수 친 전 여자친구와 친한 관계라고 해서 그런 험담을 한 건 아닐까? 그럴 듯한데...
'...아냐. 방심하지 말자.'
상대는 10년차 배우.
아역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면, 그 연기력이 일품이라는 뜻.
엄연히 스크린과 사생활은 다르다지만, 필요에 따라 사생활 속에서 가면을 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케가미가 더 잘 알겠지.'
이제 막 얼굴을 봐놓고서는 판단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유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강 고개를 까딱였다.
"뭐,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다른 일본 팀원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은 한국 팀은 그들을 지나쳐 대기실로 향했다.
"쿠로가네라는 친구는 너랑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말 걸고 싶어 하던 것 같았어요!"
유현 역시 그런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다들 눈치만 볼 뿐 선뜻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가가는 게 어렵겠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만큼, 그를 향한 경계심도 컸다.
언젠가는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어제 기자들 찾아온 것처럼 시끌벅적할 줄 알았는데."
숙소부터 대회장에 오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한적했다.
차에 탑승해 자면서 오느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잠을 깰 정도의 인파는 몰려올 줄 알았다.
"주최 측의 배려가 있었어. 숙소부터 대회장까지 사람들의 통행을 완전히 차단했지."
"아, 그래서..."
"만약 도와주지 않았다면 숙소에서 차로 이동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거야."
"다행이네요."
"하지만 대회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대회가 종료되면 주최 측의 도움도 거기서 끝. 당장 숙소 바깥이나 포탈 관제소 앞에 모일 인파를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전 그냥 혼자 뛰어갈게요."
"뭐?"
"사람들 어차피 저 때문에 모이는 거잖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근데 현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세 사람은 대기실이 있는 복도로 진입했다.
앞서가던 안칠성은 맞은편에 오던 상대를 보고 걸음을 늦췄다.
유현도 전방의 무리를 발견했다.
지난번 한국과 일본 팀을 도발했던 인솔 교사 왕쓰총을 선두로 한 중국 팀이었다.
"...!"
한국 팀을 발견한 왕쓰총의 가늘고 긴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이내 그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며 얍삽한 웃음을 지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중국 팀.
안칠성은 유현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가만히 있어라."
그 역시 유현이 일으킨 파장과 새벽에 밝혀진 한국 팀이 겪은 사건은 알고 있을 터.
안칠성의 걱정은 후자에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도발했던 지난 기자회견처럼 이번에도 생각 없이 사건과 관련된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
유현이 그 자리에 있었고, 한서희가 관련되어있는 만큼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
안칠성은 유현이 과격하게 반응할 것을 우려했다.
"이거이거 하루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한국 팀을 여기서 다 보네요."
왕쓰총이 쥐새끼 같은 앞니를 드러내며 비아냥거렸다.
"반갑습니다."
안칠성은 그 비아냥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 경기는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희도요."
유현과 메이블의 16강 상대는 중국 팀이었다. 왕쓰총은 유현과 메이블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아주 무서운 상대군요."
"중국 팀 아이들도 무척 강하잖아요. 저희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아이만 하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쪽에 선생을 잡아먹으려는 놈은 없거든요."
왕쓰총이 유현을 향해 삿대질했다. 지난번 그에게 당했던 수모를 잊지 않았다는 듯한 말과 행동이었다.
유현은 왕쓰총이 내민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너희는 할 말 없니?"
왕쓰총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만두 머리로 상투를 튼 남자로 얼굴의 선이 굵었다. 녀석은 유현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허접한 속임수는 잘 봤다."
주어는 없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알아들었다.
"...속임수?"
"네가 보여준 특성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
"오늘 내가 너의 속임수를 세상에 증명해주지."
반응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유현이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 딴에는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슬슬 대기실로 갑시다."
서로 지나가려던 그때.
왕쓰총이 아차하더니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제가 까먹고 빼먹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
"너무 과한 폭력은 삼가주시죠?
괜히 저희 아이들을 안톤처럼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한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왕쓰총은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했는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복수라지만, 경기장 바깥의 일을 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다행히도 우리는 그쪽과 원수를 지진 않았네요! 애초에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게 신기해요. 능력자가 총에 당하다니. 얼마나 멍청하고, 애들 관리가 안 되면..."
유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놓고 듣는 모욕까지 참아야 할까. 안칠성을 돌아보니 그의 주먹 역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이만."
왕쓰총은 옅은 웃음소리를 남긴 채 한국 팀을 지나갔다.
유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중국 팀에게 돌아갔다.
"......"
무리 중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중국 팀의 강자라고 불리던 남성성이 짙은 외형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유현과 눈이 마주치자 멈춰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가라는 인사일까.
아니면, 사과일까.
"잘 참았다, 현아."
유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는 선생님이 한 마디 해주셔야죠. 저런 말을 듣고 참아야 돼요?"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입 다물고 있었다. 후. 저 쥐새끼 같은 놈 주둥이를 꿰매버려야 하는데."
안칠성 역시 단단히 화가 났지만, 참았다. 괜히 대화를 시작했다가는 참지 못하고 주먹질을 할 것 같았으니까.
"꼭 이겨라."
"당연히 이겨야죠."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블이 입술을 꽉 깨문 채 중국 팀이 사라진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생긴 건 쥐새끼 같아서는 말하는 것도 꼭..."
유현은 분노에 씩씩거리는 메이블의 어깨를 붙잡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겨. 이기면 돼."
유현의 말에 메이블의 새파란 눈에도 힘이 들어갔다.
"당연하지! 아주 묵사발을 내버릴 거야!"
메이블은 결의에 가득 차 승리를 다짐했다.
왕쓰총의 도발은 도리어 승부욕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결국 자기 눈으로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결국 중국 팀이 한국 팀 아래라는 것을.
아직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유현은 절대 그들에게 질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 팀을 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