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36화 (13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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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대기실.

참가자는 경기장으로 올라오라며, 방송이 흘러나왔다.

"......"

유현은 몸을 일으켰다.

대기실을 나와 경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에 들어서자 관객의 함성이 사방을 메웠다.

맞은편 문이 열리며 곧 금발 머리의 서양인이 입장했다.

'안톤.'

온갖 장비로 무장한 그의 외형.

기계들이 덕지덕지 붙어 원래 몸의 크기보다 몇 배는 더 커졌다.

씨익.

안톤이 웃었다.

얼굴에 기계 장치가 붙은 마스크를 장비하여 표정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눈은 분명 곡선이었다.

"......"

유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싸움은 단순히 그를 향한 복수가 아니다.

자신과 관련된 이들을 건들지 말라는 세상을 향한 공표였다.

그러니 아카데미에서 싸우던 것처럼 적당히 상대해 줄 요량은 없었다.

유현은 체내의 마나를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용솟음칠 듯 활발하게 순환하는 마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하하, 새끼."

안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웃음을 지웠다.

지난 며칠간 느꼈던 부담감은 막상 경기장에 올라오니 사라졌다.

그건 아마 상대에게서 지난 번과 같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장비는 잘 작동하고.'

안톤은 최종적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공격과 방어, 더불어 기동력까지 한계를 초월한 수준까지 높여주는 마력 갑옷.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 가까이 붙은 적을 튕겨내는 마력 폭탄, 내장된 스크롤을 버튼 하나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자동 기계 까지.

미세하게 마나를 주입하자 모든 장비가 마력 반응을 보인다.

점검은 끝. 이상은 없었다.

"해 볼만 해."

안톤은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인솔 교사였던 제임스의 말처럼 승리의 가능성이 있다.

비록 예상하지 못한 힘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염려해 둔다면 크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힘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한 두 개. 침착하게 대응하면 장비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

긴장감이 흐르는 경기장.

관중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누었다.

"안톤이 이길 수 있을까?"

"지난번 보다 장비가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아무리 유현이라도 저런 장비 상대로는 힘들지 몰라."

관중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경기 시작 직전까지 진행되는 실시간 투표에서도 막상막하였다.

유현이 다른 경기에서 보여준 일방적인 모습에도 사람들은 미국 팀의 안톤이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미국 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영향이 컸다.

"이번에도 이기겠죠?"

메이블은 두 손을 모은 채 불안한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질 것 같냐?"

"상대는 장비가 너무 많잖아요. 저 정도면 진짜 2대1 수준 아니에요?"

"굳이 머릿수를 따지자면 2대1 이상이지. 저쪽 팀에서 투입하는 인력은 우리랑 차원이 다르거든."

국가의 위세만큼이나 남다른 지원 규모.

주최 측에서 마련한 상한선이 있긴 하지만, 미국은 그 상한선 안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냈다.

상한선을 채운 다른 국가와 비교해 봐도 그 효율이 1.5배 가량 차이가 났다.

"하지만 장비가 좋다고 이길 싸움이었으면 미국이 한 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겠지."

미국은 최다 우승국이긴 하지만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진 않았다.

본래 장비라는 건 뛰어난 사용자를 만나야 그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

적절한 파일럿을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따금 불세출의 천재가 등장했을 때.

미국은 우승을 놓치고는 했다.

"결국 장비라는 건 전투의 부가적인 요소야. 아무리 좋아도 메인이 될 수 없어. 뭐, 안톤 정도면 뛰어난 파일럿이긴 하지만."

메이블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럼 질 수도 있어요?"

"아니. 상대도 상대 나름이지. 뛰어난 장비와 파일럿이 만나도 좁힐 수 없는 격차라는 게 있어."

유현과 안톤의 차이는 압도적.

안칠성은 유현이 패배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메이블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유, 유현 파이팅!"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해 큰 소리로 응원하는 메이블.

유현은 관중석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여기저기 위치한 카메라도,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의 눈동자도.

모두 자신의 강함을 세상에 알릴 소식통이었다.

그들을 통해 이 경고가 확실하게 통하기를 바랐다.

-때애애애앵!

그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 속에서 먼저 움직인 건 안톤이었다.

땅을 박차고, 기동장치의 도움을 받아 몇 미터씩 성큼성큼 뛰어 이동한다.

몇 톤에 가까운 갑옷이 땅을 울리며 쿵쿵거리는 모습은 마치 메카닉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거리. 안톤이 갑옷을 조작하자 팔 부근의 장치에서 커다란 송곳이 튀어나왔다.

'바로 한 방 먹여주마.'

안톤이 주먹을 콱 움켜쥔다.

꽉 쥔 주먹에서 빠져나온 마나가 그대로 장치에 주입되었다.

이내 크게 땅을 박차는 안톤.

허공을 날아 유현을 내려다보는 직선의 궤도에 오른다.

다음 순간, 그를 향해 정조준한 송곳이 발사됐다.

마치 작살처럼 유현을 향해 쇄도하는 송곳.

미동도 없는 유현의 모습에 안톤이 미소 지었다.

'맞았다.'

무조건 적중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눈앞이 빛으로 물들었다.

직후, 착지하려던 몸이 무거워지며 강한 충격과 함께 떨어졌다.

'......?'

땅바닥에 처박혀 어둠 일색인 시야. 안톤은 실수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왜일까.

조금 전까지 동력과 마력으로 작동하던 장비들이 동작하지 않았다.

몇 톤에 해당하는 무게가 온전히 그의 몸을 구속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안톤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마나를 주입해보기도 하고 다시 전원을 켜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장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시발…."

장비를 벗어보려는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앞으로 엎어지듯 처박힌 탓에 장비의 해제 자체가 불가능했다.

"넌 죄책감도 없냐?"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안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바로 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서늘하다 못해 오한이 느껴지는 시선. 지난번 차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압도적이고 위압적일 정도의 기세. 보이지 않는 시야에서 공포감이 밀려왔다.

"크윽. 으으으윽!"

안톤은 벗어나기 위해 애써 몸부림쳤지만, 무거운 장비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전투에 도움을 주던 장비가 한순간에 죽음의 감옥이 되었다.

"애쓴다, 애써."

"사, 살려줘."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통역기를 착용했기에 소통에는 문제 없었다.

유현의 말에 안톤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기, 기권해야 해.'

기권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당장 여기서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멀쩡히 보내줄 리는 없었다.

자존심은 상해도 기권하여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딸깍, 딸깍.

안톤은 기권하기 위해 장비에 삽입됨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어, 어...?"

"내가 그것도 몰랐을 것 같아?"

"이, 이게 왜..."

"그것도 장비 내장 부품이야. 전기로 작동하지."

장비가 먹통이 되었으니 기권 버튼 역시 작동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안톤은 턱끝까지 차오른 위기감과 두려움에 목소리를 높였다.

"씨, 씨발! 너, 너 뭐야!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수를 좀 썼지."

"반칙이야! 이건 반칙이라고!"

"네가 내 친구 가슴에 총알 박아 넣은 건 정당방위고?"

안톤의 목을 유현의 손이 휘감았다. 그 차가운 손바닥의 느낌에 안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네, 네가 먼저 날 때렸어! 난 복수한 거라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등의 불필요한 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유현은 올려놓은 손바닥을 통해 마법을 사용했다.

빠지직.

"아아아아악!"

푸른색 빛이 일며 안톤이 고통을 내질렀다.

"하악, 하악."

입에서 침이 빠져나왔다.

목이 아래로 축 처지고, 전신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잠깐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찾아보니까 이게 총에 맞은 것보다는 덜 아프다고 하더라고."

"......"

"더 맞아야겠지?"

안톤은 정신이 흐릿해가는 와중에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생명 유지 장치의 경고로 경기가 끝날 테니까.

이건 장비와 관계없이 몸에 심어진 칩이 행하는 기능이었다.

"아, 참고로 네 칩도 조금 전에 마비됐어."

"......?"

"그것도 체내의 전류 신호로 작동하는 거라고 하더라. 어느 정도 되는 전압에서 마비되는지 물어보니까 전부 대답해주더라고."

말의 진위를 파악할 새도 없이 다시금 고통이 밀려왔다.

이전처럼 짜릿한 통증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더 고통스럽고, 더한 격통.

살이 타들어 가는 열통에 안톤이 온몸을 비틀었다.

"후우우, 후우우."

뜨거운 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빠져나왔다.

안톤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더 심해지지 않았다.

기절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선을 타며 최대한의 고통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물은 어떨까?"

안톤은 머리 위로 축축한 무언가 쏟아지는 걸 느꼈다.

곧 그게 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은 적시다 못해 차올랐고 곧 숨통을 막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궁금할 겨를이 없었다.

꼬르륵.

안톤의 입에서 공기방울이 빠져나왔다.

호흡기를 타고 역류하는 액체.

이전보다는 덜했지만, 이번 고통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다음은..."

유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원소의 힘을 활용해 안톤을 옥죄었다.

바람은 억지로 입을 벌리고 들어가 폐 속에 숨을 가득 채워 터질 것 같은 통증을 주었다.

종류를 바꿔 가는 괴로움 속에서 안톤의 정신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는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후회였다.

***

관중들은 안톤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여지없이 완벽한 타이밍이었으며, 상대는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안톤의 송곳이 발사된 그 시점. 경기장 안쪽에서 엄청난 빛이 일었다.

"......"

송곳은 유현의 옆에 꽂혔다.

안톤은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한순간 눈을 멀게 한 강렬한 빛의 영향으로 대부분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맙소사."

그러나 몇몇은 빛에 반응하여 마나로 시야를 지켰다.

미국 팀의 인솔 교사들도 그중 하나였다.

"지, 지금 봤어요?"

"......"

메리는 입을 벌리며 경악했고, 제임스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했다.

"손에서 번개가…."

"......"

"다, 다중 특성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돼요? 저런 수준의 능력을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다고?"

유현이 다중 특성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었다.

다중 특성이 흔하지 않긴 하지만, 무척 희귀한 것도 아니니까.

그들이 놀란 점은 그 특성의 힘이었다.

단순히 몸뚱이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압도하는데, 거기에 저런 강력한 특성까지 존재한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고작 학생들의 대회에 참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자기 팀의 경기인데도 제임스는 침묵했다.

그라고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허."

긴 침묵 끝에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탄식이었다.

지난 며칠간 행해온 수십 시간의 분석. 거기에 맞춰 개량된 장비들.

새로운 능력의 등장으로 그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됐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생각했거늘. 애초부터 이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던 싸움이었다.

"꺄, 꺄아아악!"

메리가 소리를 질렀다.

경기장에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입을 다물고 있던 제임스의 턱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

제임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경기장을 응시했다.

안톤을 향해 쇄도하는 수십 줄기의 전격.

이윽고 그 위에 덧씌워진 타오르는 불꽃.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강풍이 불며 화마가 경기장 전역을 뒤덮었고, 허공에서 쏟아진 물이 경기장을 적시며 불꽃을 제압했다.

제임스의 부릅 뜬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건조하여 흘러나온 물이 그렁그렁 맺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하나만이 아니다.

그 옆에 있는 메리도, 그들 주변에 앉은 각 국가의 관계자들도, 경기장에 운집한 관중들도, 심지어는 중계하던 해설자까지도.

눈앞에 휘몰아치는 수많은 특성의 향연에 모두가 말을 잊었다.

"......"

유현은 안톤을 마무리 짓고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중만 수만 명이었지만,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빙결 마법은 안 썼는데."

혼자 중얼거리고는 혼자 웃었다.

그는 다시 안톤에게 눈을 돌렸다.

흰자를 내보인 채 기절한 안톤.

겉으로 보이는 원소의 연희는 화려했지만, 실질적으로 안톤에게 가해진 고통은 적었다.

물론 한 인간이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고통이긴 해도 쇼크나 내상으로 죽을 수준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야 찢어 죽여도 시원찮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어.'

아마 다시 깨어난다면 이전처럼 평범하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경고가 됐겠지."

유현은 손을 탁탁 털고 중계용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사납게 몰아치던 자연의 힘을 세상 사람들이 지켜봤다.

조금 과한 측면이 없지 않긴 했으나 이제 누구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잘 가라."

유현은 안톤을 양손으로 들어 반대편 입구로 내던졌다.

얼마나 강하게 던졌는지 장비가 합쳐진 엄청난 무게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지고서도 몇 바퀴를 굴러서야 멈춰 섰다.

그로부터 잠시 뒤.

-삐이이이이이!

마찬가지로 유현의 전투에 혼이 빠져 있던 심판진이 경기의 끝을 알렸다.

유현은 경기장을 나와 대기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경기장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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