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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삐이이이이익!
한쪽의 전투 불가를 알리는 생체 장치의 경고음이 장내를 메웠다.
응원을 준비하던 응원단은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한 채 멍청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마찬가지로 고요해진 관중석.
저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와중.
전광판으로 조금 전 전투가 흘러나왔다.
"저, 저기 나온다!"
모두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돌아갔다.
초고속 카메라처럼 느릿한 재생속도.
화면 위로 유현의 움직임이 그대로 담겼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움직임.
하지만 느린 화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치 홀로 다른 시간 선에 사는 듯한 엄청난 민첩함이었다.
"맙소사."
"내가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하이라이트의 리플레이가 종료되자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함성이 쏟아졌다.
커다란 경기장 규모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함성.
유현은 아무런 호응도 없이 등을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꿀꿀한 기분. 승리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지, 진짜 이겼네요?"
메이블은 유현의 승리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봤던 그의 전투 중 어떤 싸움보다도 압도적이고 적나라했다.
직접 싸워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그간의 전투는 상대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나 조금 봐주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누군가에게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폭력적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축하는 안 하는 게 좋겠죠…?"
"그래."
안칠성은 내심 걱정이 들었다.
그간 괜찮은가 싶었는데 대회 당일이 되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설마 병문안이라도 다녀왔나?'
가지 말라고 막은 건 아니지만, 대회에 방해가 될까 싶어 같이 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안칠성은 스마트폰을 통해 대회 일정을 재차 확인했다.
사흘 뒤, 조별 리그의 마지막 날.
유현과 안톤의 싸움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을 넘으면 안 될 텐데….'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힘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큰 위해가 생길 수도 있다.
생체 장치가 있어 위급할 시 경보가 울리지만, 유현이라면 그보다 빠르게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
"잠깐, 여기 있어라."
안칠성은 관중석에서 내려와 유현의 뒤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의 등장에 유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에요?"
"병원 다녀왔냐?"
"안 가 볼 수는 없으니까요."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모습.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화난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선은 넘지 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 날이 안톤의 경기잖냐."
이미 알고 있었는지 유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연한 태도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화가 난 거지 멍청해진 건 아니니까."
그의 분노는 침착했다.
안칠성은 그제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유현이 자신의 화를 다스릴 수 없는 이였다면, 사단이 나도 진즉에 났을 것이다.
대회 참가자들의 숙소는 같은 호텔이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알겠다. 남은 경기도 잘하고."
"제가 못하는 거 봤어요? 당연히 잘하죠."
평상시처럼 호언하는 유현의 모습에 안칠성이 가볍게 웃었다.
"너 혹시 전화기는 아예 꺼뒀냐?"
"요새 안 들고 다녀요."
"너한테 볼일 있는 애들이 자꾸 나한테 전화하잖아."
"볼일이요? 뭔데요?"
안칠성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유현에게 건넸다.
"봐봐."
화면 위에는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아이들이 웬 플랜카드를 들고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누구는 구석에 있고, 누구는 찍기 싫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단체 사진이라기에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지만, 일단 반 아이들이 전부 사진 속에 있기는 했다.
"가온이가 보내줬다."
플랜카드에는 세 사람의 선전을 바란다는 내용의 응원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정말 평범한 고등학생다운 모습.
하지만 오히려 신선한 모습이기도 했다.
"재밌네요."
"옆으로 더 넘겨봐."
사진을 한 장 더 넘기자 이번에는 동영상이 나왔다.
재생하니 신가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하고 있을 친구들에게 한 마디!
화면 위로 나타난 오철용의 커다란 얼굴.
녀석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아무나 메이코쨩노 싸인 오네가이시마스!!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오철용. 정수리가 보이다 못해 뒤통수까지 보였다.
-그년 다 가식이라고!
뒤에서 이케가미기 소리쳤다.
카메라는 곧장 그에게 돌아갔고 이케가미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자, 잘 하고 와라. 그 메이코년은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 친절해 보이지만, 전부 가식...
-오이 키사마!! 지금 나의 천사 메이코 짱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오철용이 이케가미를 덮치며 화면이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
그때까지도 유현은 어리둥절했다.
"메이 뭐시기?"
"일본 팀에 메이코라는 아이가 있다. 그 친구의 사인을 받아달라는군."
"아니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연예인이야."
"예?"
"메이코라는 아이. 아역 배우로 데뷔하여 10년차 배우라더구나. 이케가미의 여자친구였던 배우와 제법 친하다더군."
"허, 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세계 대회에 참가할 정도의 힘을 가졌으면서 배우라는 직업까지 가지고.
그것보다 더 흥미가 생기는 건 그녀의 친구였다.
'이케가미 여자친구랑 친구?'
이케가미가 말해주지 않던 일에 대해 물어볼 기회였다.
과연 열애설이 나고 뒤통수를 친 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자의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강제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이케가미를 위해 나중이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메이코라는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철용와 이케가미를 지나 화면에 나온 건 며칠 사이에 좀 더 살이 오른 것 같은 한주석이었다.
녀석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힘내라! 유현! 메이블! 하, 한...
마지막으로 한서희의 이름을 외치려던 한주석의 시선이 카메라 너머로 향했다.
-응? 뭐야?
신가온이 카메라를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서혜빈이 서 있었다.
-야! 내가 한서희 이름 말하면 죽이기라도 하냐?
-아, 아니! 내는 그냥 본능적으로….
잠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이내 화면 위로 서혜빈이 나타났다. 왜인지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입술을 뗐다.
-히, 힘내든지 말든지….
서혜빈은 애매모호한 응원을 남기고는 더 붉어진 얼굴을 가린 채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얘는 상태가 왜 이래요?"
"네가 원인 아니냐?"
"며칠 내내 여기 있었는데 제가 왜요?"
안칠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알아채지 못하는 마음만큼 주변에서 안타까운 게 없는데.
-풀잎아! 너도 응원해줘!
김풀잎은 신가온의 응원 요청에 그저 엄지 손가락만 치켜세웠다.
30초가 지나도 1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 없이 따봉만 이어졌다.
-고, 고마워!
김풀잎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이내 셀카모드로 바뀌었다.
영상은 신가온이 파이팅을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도 재밌네요."
편안히 웃는 유현을 보며 안칠성은 보여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쩌나 싶었는데. 다들 좋은 녀석들이야."
안칠성은 처음 S반이 결성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고작 몇 달 전이었지만, 그때의 분위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았다.
무슨 분위기가 그렇게 험악했는지 원.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라."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같은 반이 되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이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없으면 허전할 것 같다.
'나도 참 무르구나.'
지구가 평화로운 탓일까.
판대륙에서 가지고 있던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바뀐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언제 어디서 동료가 죽고 떠나갈지 모른다. 시종일관 벌어지는 게 전투였고, 번번이 사상자를 낳았으니까.
헌터라는 직업 역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판대륙처럼 일상에서 불안에 떨 이유는 없었다.
'평화란 건 정말로 무섭구나.'
평화가 있기에 짧은 시간동안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인연을 만들었다. 새삼스럽게도 한서희가 쓰러지고 나서야 그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잃고 싶지 않아.'
이별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언젠가는 멀어지겠지만, 그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기를 바랐다.
"......"
유현의 얼굴에 자연스레 고뇌가 드러났다.
안칠성은 조용히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조별 리그는 여러 경기장에서 제각기 다른 시각에 치러진다.
제2경기장에서는 B조의 경기가, 제3경기장에서는 C조의 경기가 한창이었다.
개막전이 끝난 뒤, 제1경기장.
아직 다음 경기의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았기에 관중들은 다른 경기를 보러 이동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내 눈에는 안 보여."
호야와 미우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관중 중 한 사람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케이디의 작전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재. 두 사람은 작전에서 벗어나 유현의 경기를 구경하러 왔다.
"호야. 너 정말 마법이 있다고 믿어?"
"몰라. 근데 그때 그건 진짜 마법 같았다고."
이곳에 온 건 지난번 겪었던 미스터리한 일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착각 아니야?"
미우의 말에 호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 몸으로 직접 느꼈는데 착각일 리가 없지."
몸을 쥐어짜던 엄청난 힘.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투명한 무언가.
그런 것들이 모두 한 인간의 능력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그냥 다중 특성일 거야."
호야와 달리 미우는 마법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야, 나 따라왔으면 입 다물고 있어."
"내 의견도 말 못해?"
"거슬리니까 조용히 해."
호야가 쏘아붙이자 미우가 볼을 부풀렸다.
"호야, 바보."
"내가 바보면 넌 등신이냐?"
"나 운다?"
운다는 말에 호야가 흠칫하며 급히 그녀를 토닥였다.
"미안. 내가 말이 심했어."
"한 번만 봐줄게. 대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호야가 식은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마법에 집착해? 대장이 엄청 싫어하는데."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넌 반대쪽이랑 관련도 없잖아. 계속 이쪽에서 지냈으면서."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야."
앞에 있던 잠깐의 침묵에 미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쪽의 언급은 케이디 내에서 중대한 상황. 누구라도 격하게 반응할 질문인데 호야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미우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마침 A조의 2경기가 시작되어 타이밍을 놓쳤다.
***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조별 리그가 진행됐다.
누군가는 포효하고 누군가는 좌절하는 승부의 연속.
어느새 마지막 날인 사흘째를 맞았다.
남은 경기는 선수당 한 경기.
상위 1, 2위 만이 본선에 진출하는 만큼, 어떤 조는 이미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었고, 어떤 조는 여전히 팽팽했다.
"안톤."
서부 팀의 인솔교사 제임스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예."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해."
"선생님도 그게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제임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 싸움이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지든 이기든 말이야."
"질 것 같아요."
"너에게도 가능성은 있어."
제임스는 부정적인 안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현재까지의 전적만 보더라도 안톤 보다 유현이 우세했으니까.
"지난 며칠간 꼼꼼히 분석했잖아."
서부 팀은 담당 전력 분석관을 동원해 유현의 모든 경기를 분석했다.
대회에서 분석은 기본이지만, 유현의 분석에 투입된 전력은 예나 미래에나 전례가 없을 규모였다.
"네 능력과 준비한 아티팩트들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결론도 나왔어."
"......"
안톤은 깊이 심호흡했다.
분석에서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 습격했던 날 봤었던 그의 안광.
비루한 특성의 소유자라기에는 그가 가진 마나량이 지나치게 많다.
그리고 그 많은 양의 마나를 몸이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안톤의 두려움은 거기에서 기했다. 그에게 아직 숨겨진 힘이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슬 시간이 됐구나. 장비 입어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제임스가 대기실을 나가고.
안톤은 한 차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가 끝까지 내쉬었다.
"이겨야 해."
안톤이 속한 A조는 아직 2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안톤이 2위였지만, 오늘의 결과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할 수 있어."
여전히 불안은 존재하나 일방적인 패배는 아닐 것이다.
유현이라는 최고의 상대와 비등할 수 있도록, 최고의 국가에서 최고의 장비를 준비해줬으니까.
"...설마 대회장에서 내게 화풀이 하지는 않겠지."
지난 사건 이후로 한서희가 보이지 않게 된 건 서부 팀에서도 자자한 사실.
안톤은 그 원인 제공자였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유현을 향한 두려움만이 존재할 뿐.
"뭐, 정 위험하면 기권하면 되니까."
안톤은 두려움을 한결 떨쳐내고 장비를 착용했다.